오늘, 봄이 왔다
해를 한 번 바라봐요 눈이 부셔도
핑 한번 눈물 고인 뒤에는
꽃들의 표정이 더 선명해질 거야
라라라라라라라 결국 봄
(윤종신(feat.장필순), '결국 봄' 中)
22년 전 5월의 어느 날, 그토록 기다리던 전역을 했다. 2년 2개월의 긴 기다림의 시간이 무색하게, 전역 신고를 하고 위병소를 나설 때의 심정은 정말 무덤덤했다. 전역하는 날이 오면 미친 듯이 기뻐 날뛸 줄 알았는데 막상 그날이 오니 그냥 좀 어색했던 기억이 난다. 내 전역날에 맞춰 강원도 나들이 겸 삼척으로 마중 오신 엄마의 차를 타고, 해안도로를 하염없이 달려 서울로 올라올 때의 마음은 잔잔한 후련함 정도였던 것 같다. 정작 격렬하게 기쁜 마음은 전역한 다음 날, 집에서 느지막이 일어나 거실에 나왔을 때 거실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던 햇빛을 마주했던 순간에 찾아왔다.
오늘 아침 사무실에서 휴대폰으로 헌법재판소의 탄핵 선고를 보았다. 모두가 일할 분위기는 아니었으니, 나만 유독 월급 루팡은 아니었던 셈이다. 약 30여분의 결정문 낭독을 보다가 점심에 먹을 김밥과 라면을 사러 사무실을 나와 편의점으로 가는 길 위에서 탄핵 주문을 들었다. 승환옹의 '덩크슛'까지 들먹이며 정말 애타게 듣고 싶던 주문이었는데, 막상 '피청구인 윤석열을 파면한다'는 주문을 들었는데 의외로 무덤덤해서 스스로 놀랐다. 그 주문 자체보다는, 주문을 듣고 울며 환호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그제서야 살짝 뭉클해졌다. 22년 전 전역했을 때 그랬듯, 무덤덤한 오늘이 지나고 내일이 오면 그제야 격한 감동이 몰려올까.
지난 3년 그 야만의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목숨까지 잃었다. 너무 참담한 일들이었고 허망한 비극이라 돌이켜보기도 싫은 시간들이다. 많은 것들이 틀어져버렸고 왜곡되어, 다시 바로 잡을 엄두가 안 날 정도로 사회가 망가져버렸다. 그래도 우리는 두고두고 돌아보고 또 되새기며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잘못된 선택이 어떤 괴물을 만들어냈고, 그 괴물이 우리를 짓누르는 시간 동안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는지를. 그리고 또 잊어서 안 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버텨내면 언젠가는 결국 봄이 온다는 것이다.
내가 지금 기쁜 이유는 이름조차 언급하기 혐오스러운 내란범이 파면됐다는 그 사실 자체보다는, 이제서야 제대로 봄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때문이다. 따뜻한 바람이 불고 개나리, 진달래, 목련, 벚꽃이 피기 시작했는데 마음은 늘 춥고 우울했다. "악은 이토록 거침없이 자신의 길을 가는데 어째서 선은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가"라는 어느 드라마 속에서의 탄식처럼, 왜 저렇게 우리에게 총을 겨누며 악행을 저지른 자들은 후안무치하게 고개를 쳐들고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하며 따뜻한 방 안에서 조롱을 일삼는데 우린 왜 추운 길거리에서 몸을 떨며 목놓아 소리를 질러야 하는지에 대한 무력함과 자괴감에 자꾸만 짓눌렸다.
아주 기나긴 기다림 끝에 결국 봄이 왔다. 진짜 내가 기다리던 그 봄이 오면, 이 노래를 꼭 듣고 싶었다. '결국 봄'이라는 세 글자의 제목이 주는 그 포근함이 좋아서 늘 즐겨 듣는 봄노래였지만, 올해는 아끼고 아껴 오늘에야 이렇게 꺼내어본다. 시간이 가면 저절로 올 줄 알았던 그 봄이, 이번엔 정말 너무나 늦게 찾아왔다. 노래 가사처럼 이젠 눈부심에 눈물이 고이도록 해도 바라보고, 선명해진 꽃의 정취도 느끼며 모든 사람들이 봄을 즐겼으면 좋겠다. 장필순의 온화한 목소리에 실린 따뜻한 가사가 윤종신이 만든 설렘 가득한 멜로디에 실려 날아가, 그동안 힘들었던 많은 이들의 마음에 봄바람을 불어넣어 주기를 바라며.
https://youtu.be/1eS0LPrNN64?si=IY6f_cqIrGTZLSC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