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어른이 된 걸까 속물이 된 걸까?
버스정류장 그 아이의 한번 눈길에 잠을 설치고
여류작가의 수필 한 편에 설레어할 때도 있었지
...
이젠 그 사람의 자동차가 무엇인지 더 궁금하고
어느 곳에 사는지 더 중요하게 여기네
(015B, '수필과 자동차' 中)
최근에 '수필'이란 단어를 들어본 게 언제였을까. 학교 다닐 때는 분명 수필이 시, 소설, 희곡과 함께 문학의 4대 장르 중 하나라고 배웠고, 故 이어령 작가의 수필 속에 나오는 호마이카 책상 이야기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한데 요즘은 그 단어를 듣기가 어렵다. 따를 수(隨)에 붓 필(筆), 즉 붓이 가는 대로 따라서 쓴 글이라는 멋지고 예쁜 뜻을 담은 수필이란 단어의 자리를 요즘은 '에세이'라는 영단어가 대체해 버린 것 같아 씁쓸해지곤 한다.
김영하 작가나 김중혁 작가의 소위 '글빨' 넘치는 수필을 읽다 보면 그들의 색다른 시각이나 탁월한 표현력에 감탄을 금치 못하다가도, 이내 이들은 이 책으로 얼마의 돈을 벌까 하는 속물적 궁금증이 머릿속을 스멀스멀 채운다. 이어령 작가의 수필에 감동을 받고 어찌할 줄 모르던 소년은 온데간데없고, 문학적 가치마저 돈으로 계량하는 40대 중반의 아저씨가 여기 있다.
내가 국민학교 6학년 때 나왔던 015B 3집은 테이프를 너무 많이 돌려 들어서 늘어나는 바람에 한 번을 더 샀던 기억이 있다. 이 앨범의 대표곡은 누가 뭐래도 '아주 오래된 연인들'이지만, 난 '수필과 자동차'를 그렇게도 좋아했다. 일단 멜로디가 너무나 예뻤고, 왠지 모르게 이 노래를 들으면 마치 내가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며칠 전 제주에 있는 바이닐 카페에 갔다가 015B 3집 LP가 있는 것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전곡을 천천히 다시 들었다. 역시 모든 노래가 좋았고, 이젠 가요계 원로가 된 윤종신과 박선주가 풋풋한 목소리로 부른 듀엣곡인 '우리 이렇게 스쳐 보내면'을 들으며 이들은 이 때도 감정 표현이 참 좋았구나 하며 새삼 감탄을 했다. 하지만 약 30년 만에 다시 들어도 가장 좋은 곡은 '수필과 자동차'였다.
막 사춘기에 접어들어 이 앨범을 처음 듣고 설레어하던 소년이 30년이 지난 후 중년이 되어 이 노래를 다시 듣는 느낌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좋은 수필집을 읽고도 감동 대신 작가가 받을 인세를 떠올리는 닳고 닳은 아저씨가 되었노라고 30년 전 나에게 고백을 하려니 새삼 부끄러워졌다. 그때 내가 꿈꿨던 모습은 지금의 이런 행색은 아니었을 테니까.
손가락 터치만으로 간편하게 듣는 음원 대신, 조금은 불편하고 비용도 들지만 진지하고 성실하게 음반 전체를 들으면 과거에 그 노래들을 듣던 시절의 나와 만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된다. 그 음반을 듣던 시절의 공기와 그때의 감정까지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다. 그리고 문득 궁금해졌다. 015B 3집을 처음 듣던 그 때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뒤 현재를 살아가는 지금의 나는 어른이 된 걸까, 속물이 된 걸까. 아니 뭐라도 되긴 한 걸까.
https://youtu.be/iFsuV4fc_qc?si=c3m0o8FRHzRNM5p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