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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dioholic Mar 29. 2024

활자혐오

글자는 죄가 없어요. 하지만...

정확하지는 않지만 내 기억으론 지난 3년간 책을 거의 읽지 않고 살았던 것 같다. 간간히 서점에서 눈에 띄는 책을 사긴 했지만, 몇 페이지 읽다 결국 덮어버리고 책꽂이에 꽂아버리곤 했다. '하얀 것은 종이요, 까만 것은 글자' 라는 느낌이 딱 맞았다. 어떤 문장에도 감흥을 느끼지 못했고, 과연 책이란 게 정말 삶에 도움을 주는 것인가 하는 의문만 쌓인 나날들이었다. 그야말로 활자혐오로 점철된 시기였다


언젠가부터 내 대학시절 '지식인' 이라 일컬어졌던 이들의 초라하고 더러운 변절의 모습들을 목도한 충격은 무척이나 컸다. '네 무덤에 침을 뱉'겠다며 사람들에게 기득권에 대한 저항과 진보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던 어떤 이는 자기 얼굴은 물론 자기를 사랑했던 사람들의 얼굴에까지 침을 뱉으며 우스꽝스러운 행보를 보이고 있고, 수려한 언어와 문장을 장기로 삼았던 어떤 기자 출신 작가는 그 언어로 한 때 동지였던 사람들을 조롱하고 상처 주기를 즐기면서 처참한 민낯을 드러냈다. 그들의 책을 읽고 감탄하며 언론사 입성을 준비하던 내겐 청춘을 통째로 부정당한 듯한 충격이었다. 썩어빠진 정신을 가진 사람이 써 내려간 그런 책들로 꿈을 키웠다는 자괴감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런 회의감은 결국 책은 물론 활자에 대한 혐오로까지 이어졌다.


요즘 나오는 책들에 선뜻 손이 가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소위 에세이 작가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쏟아내는 수많은 책들에서 단편적인 감정의 파편 밖에는 느껴지지 않아서였다. 흔한 감정을 온갖 미사여구로 잔뜩 포장하고는 자신은 삶에 대해 시크하면서도 따뜻하게, 한 발짝 떨어진 시선으로 관망한다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작가들이 너무 많아졌다. 물론 성찰에 기반한 솔직한 글을 쓰는 좋은 작가분들도 많지만, 점점 서점 매대가 이런 책들로 채워지는 걸 보며 서점에 가는 게 어느 순간 즐거움에서 피곤함으로 바뀌었다. 책을 낸다는 것은 정말 대단하고 어려운 일임에도, 그 대단한 일에 너무 쉽게 접근하는 이들이 넘쳐난다. 읽고 나서도 가슴은커녕 단기 기억에도 남지 않는 그런 책들이 많아지고, 결국 좋은 에세이에까지도 손이 가지 않는 그런 경험들이 쌓일수록 책은 나와는 먼 존재가 되어갔다, 물론 이런 감정들도 내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생긴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다행히 이제는 흥미가 가는 들이 생기면 들여다보기도 하고, 괜찮다고 느껴지는 문장이 하나라도 있으면 선뜻 주문하기도 한다. 예전에 사놓고 책꽂이에 방치해 뒀던 책들도 하나씩 꺼내어 뒤적여본다. 예전에 비해 책 읽는 느낌이 어색해진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전엔 관심 없던 것들을 알게 되는 소소한 즐거움으로 책장을 넘기고 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예전엔 그토록 찾아 읽던 정치/사회 분야 책은 손대지 않고, 가볍게 마음을 환기시킬 수 있거나 내가 좋아하는 인물들이 쓰는 그런 책들만 읽으며 스트레스를 줄이려 노력 중이다. 독서가 다시 즐거움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나의 최선의 노력이랄까.




다시는 글자가... 그리고 책 읽기가 혐오와 괴로움의 감정으로 다가오지 않기를. 독서가 나 혼자 놀기 생활의 최고의 파트너가 되어주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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