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눈(by 박지윤)

그래... 계절은 견디는 것이었지

by radioholic
자 내 얘기를 들어보렴 따뜻한 차 한잔 두고서
오늘은 참 맑은 하루지 몇 년 전의 그날도 그랬듯이
유난히 덥던 그 여름날 유난히 춥던 그 해 가을, 겨울
계절을 견디고 이렇게 마주 앉은 그대여
(박지윤, '봄눈' 中)


언제부턴가 봄이란 계절에 시큰둥해졌다. 나뭇가지에 새순이 올라와도, 목련이 봉오리를 맺어도, 심지어 봄의 상징인 벚꽃이 만개해도 설레지가 않았다. 그런 무심함의 이유를 꼭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라는 설명하기엔 무언가 부족했다. 나이가 들어도 봄을 좋아하고 꽃 사진을 찍으며 설레어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아마 내가 봄에 무심해진 이유는, 이 좋은 계절이 지나고 나면 나머지 덥고 추운 계절들을 견뎌내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애써 이 계절을 좋아하지 않으려는 방어기제가 나도 모르게 작동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난 박지윤의 '봄눈'에 담긴 모든 가사를 좋아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나 '계절을 견디고 이렇게 마주 앉은 그대여'란 노랫말을 들으면 마음이 뭉클해진다. 우리의 일 년은 내내 봄일 수 없고, 그 좋은 봄을 보낸 뒤 다시 그 계절이 올 때까지의 쉽지 않은 계절들을 함께 견디고 버텨줄 존재가 있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인지도 모르니까.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사계절은 같이 겪어봐야 한다는 어른들의 충고도, 좋은 시기가 지나간 후 힘든 시간이 다가왔을 때 함께 그 시간을 견뎌줄 사람인지를 서로 확인해야 한다는 뜻이었을게다. 계절이란 게 즐기는 것이 아닌, 견뎌야 하는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난 이 노래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약 한 달 전에 예약했던, '봄눈'이 담겨있는 박지윤 7집 LP가 도착했다.(이 앨범에 대해서는 지난 글에서 잠깐 언급을 했더랬다) 봄이 가기 전에 들을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마음으로 기다려왔는데, 딱 알맞게도 벚꽃이 날리기 시작한 시기에 내 손에 들어온 음반이다. 박지윤이 댄스가수, 아이돌이라는 허물을 탈피했다는 증거로 만든 이 앨범에는 보컬리스트 박지윤 특유의 음색이 빛나는 곡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노래들끼리 우위를 매기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짓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시기에 들어야 할 곡을 꼽으라면 나에겐 누가 뭐래도 '봄눈'이다.



벚꽃은 봄눈 되어 하얗게 덮인 거리
겨우내 움을 틔우듯 돋아난 사랑
(박지윤, '봄눈' 中)


벚꽃을 보며 봄눈이라 표현할 수 있는 감수성이란 얼마나 예민하고 서정적인 것일까. 이런 가사를 쓴 루시드폴이란 사람의 내면은 무엇으로 채워졌는지 궁금할 정도로 루시드폴이 부른 이 노래에 정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다 우연히 박지윤의 목소리를 타고 흐르는 '봄눈'을 들으며, 루시드폴에겐 참 미안하지만 난 박지윤의 봄눈을 좀 더 사랑하게 되었다. 루시드폴 버전이 좋지 않아서가 아니라, 박지윤의 음성이 내 마음에 좀 더 스며들어 왔기 때문이다. 루시드폴의 버전이 처연함이라면, 박지윤의 버전은 애잔함이랄까. 어떤 이에겐 루시드폴의 따뜻한 음색이 더 좋았을 수도 있으니, 이건 순수하게 내 개인적인 감정일 뿐이다.





누구보다 화려하고 빛나는 젊음의 시기를 지나온 그녀가, 이젠 그 영화를 다 내려놓은 채 따뜻한 차를 앞에 두고 누군가에게 나지막하고 편안하게 자기 이야기를 하는 듯한 그 느낌이 난 너무나 좋았다. 어느 봄날에 햇살 잘 드는 방에서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누군가와 그녀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장면이 자꾸만 떠오른다고 해야 할까. 수많은 사람들을 열광하게 만들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디바에서, 이젠 위안이 필요한 사람들의 가슴을 어루만지는 뮤지션이 된 지금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편해 보이는 것 같아 팬의 입장에서 흐뭇한 마음이 든다. 좀 더 우리와 가까이에서 숨 쉬는듯한 내적 친밀감이 생겼다고 하면 너무 오버인가.


어제까진 벚꽃비가 한없이 흩날리더니 오늘은 진짜 봄비가 내렸다. 이러다 덥단 말이 나오면서 여름이 불쑥 찾아올 테고, 징그러운 더위가 내내 우릴 괴롭히다가 또 추워진다는 말과 함께 가을, 겨울이 오겠지, 그렇게 계절을 견디고 보내고 맞이하면서 우리는 나이를 먹어간다. 예전엔 심상하게 넘겼던 이 자연스러운 현상이 점점 서글프게 느껴지는 것은, 계절이 거듭되면서 지금의 좋은 시간이 머무르지 않고 지나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겠지. 그래도 아직은 식목일도 지나지 않은 봄이니까... 박지윤의 목소리와 함께 따뜻한 시간을 즐겨야겠다.


https://youtu.be/9k9V5DzRsk4

그 좋은 목소리로 계속 노래를 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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