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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dioholic Oct 06. 2024

스팸 김치볶음밥을 볶으며...

나만의 신포도를 떠나보냈다

이솝 우화 중 우리가 익히 아는 '여우와 신포도' 라는 작품이 있다. 배고픈 여우가 나무에 매달린 포도를 발견하고 따서 먹으려 애써보지만 결국 실패하니 '저건 시어서 못 먹었을 거야' 라며 포기했다는, 자기 합리화에 대한 대표적인 이야기. 사실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신포도가 있다. 저건 어려워서 안될꺼야, 저건 내가 애초에 이룰 수 없는 것이었어...라는 자기 합리화의 구실을 제공하며 결국 '포기' 라는 편하고 달콤한 길로 이끄는 것들이 한두 개쯤 있지 않을까. 나에겐 김치볶음밥이 그런 신포도였다.


요즘에서야 요리라는 것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40년을 넘게 사는 동안 아예 음식을 안 해본 건 아니다. 끼니를 때우기 위해 TV나 유튜브에 나오는 흥미로운 레시피를 따라 해보기도 하고, 와이프 생일엔 낑낑대며 더듬더듬 미역국이라도 끓여봤으니까. 하지만 유난히 손이 가지 않았던 메뉴가 바로 김치볶음밥이었다. 그건 왠지 내가 해서는 맛있는 음식이 되기 어려울 테니 안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아마 아주 예전에(언제인지도 희미한) 한번 해봤다가 아주 처참한 괴식이 되었던 경험의 탓도 있었을게다.


유난히 쉬는 날이 많았던 축복받은 지난주의 어느 휴일 점심, 문득 김치볶음밥을 먹고 싶다는 와이프의 주문에 과감히 오케이를 외치며 주방에 들어섰다. 그래, 나 요리 배우는 남자였지! 마트에서 햇반을 사 오고 냉장고를 뒤적여 있는 재료들을 준비한다. 냉장고와 찬장에 묵은 재료들이 있다는 게 이럴 땐 참 축복이 된다. 요즘 같은 고물가 시대에는 특히나 그렇다. 늘 그랬듯 재료 준비만 되면 과정은 그리 어렵지 않으니까. 


언제나 간단히 정리가 가능한 집밥 네컷


대파와 양파를 총총 자르고, 스팸과 김치를 다지면 재료준비 끝. 식용유에 대파를 넣어 파기름을 내고, 버터와 함께 양파, 스팸, 김치를 볶은 뒤 햇반 2개를 넣고 밥알이 죽지 않게 가볍게 치댄 다음 계란후라이를 올리면 모든 과정이 완료된다. 이토록 조리법은 간단하지만 맛이 없을 이유가 없는 요리가 사실 김치볶음밥이다. 그저 순서를 지켜 차근차근하기만 하면 되는, 어찌 보면 라면만큼이나 쉬운 그런 음식인 것을 난 왜 그토록 오랜 시간을 돌아온 것일까.




사람이란 존재가 참 안타까운 건, 이상한 신념이 생기고 나면 그걸 고치기를 본능적으로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간의 행태를 부정하는걸 마치 인생을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일 게다. 


이렇게 쉬운걸(나쁜 짓을) 내가 지금까지 안 했다고(해왔다고)? 그럴 리가 없어... 분명 내가 못할 만큼 어려운 이유가 있었을 거야(내가 해야 하는 정당한 이유가 있었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그동안의 내 인생이 너무 한심하잖아. 아닐꺼야...


이건 비단 내가 언급한 요리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흔히 보이는 현상들이다. 과거의 나의 과오를 인정하면 지금까지의 내 인생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는 거라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늦게라도 그 잘못이나 실수를 인정하고 앞으로 잘할 수 있는 계기로 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참 우습게도 김치볶음밥을 하다가 느끼게 되었다. 이런 것도 성찰이라 할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ㅎ


아마 나의 먼 기억 속에서 김치볶음밥이 망했던 이유는, '나혼자산다' 속 기안84처럼 그냥 재료들을 다 때려 넣고 볶아버렸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김치찌개든 김치볶음밥이든 김치만 맛있으면 된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주워듣고, 엄마의 맛있는 김치만 믿으며 파기름이니 뭐니 다 무시한 채 무조건 냄비에 넣고 섞었겠지.(그런 걸 우린 '개밥' 같다고 하지 않던가) 당연히 맛은 없었을 테고, 그때 생긴 선입견으로 김치볶음밥은 나만의 신포도가 된 게 아닐까. '김볶은 내가 하면 맛없어' 라는. 내 인생의 쓸데없는 신포도 하나가 없어진 것만으로도 이번 요리도 성공적이었다. 물론 비주얼은 좀 더 신경을 써야겠지만 ㅎ


비록 모양은 이래도... 맛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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