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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아 Sep 28. 2022

버밍엄, 꿈의 궁전을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

BIRMINGHAM in UK - 눈감으면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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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할 때마다 빼놓지 않고 들리는 곳이 있다. 바로 도서관. 이따금 낯선 도시의 이름 모를 상점 앞에선 주저하게 되지만, 도서관은 예외다. 자연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뿐이니까. 가지런히 꽂힌 책들 사이로 낡은 책 내음이 밀려오면, 이끌리듯 그곳으로 한 발짝 더 발을 디딘다.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고 저마다의 책을 바라보고 있으니, 묘하게도 그래서 더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셰익스피어부터 J.K. 롤링까지, 세기의 작가들을 배출한 영국은 그만큼 도서관에도 각별한 애정을 쏟아냈다. 런던의 대영 도서관만 봐도 세계 최대 규모의 소장 자료를 자랑하며, 생생한 문화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아우른다. 이런 까닭에 영국에 머무는 동안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 도서관이었다. 도시마다, 동네마다, 개성 가득한 도서관들이 문을 활짝 열고 내 발길을 붙들었으니까.      


버밍엄을 찾은 이유 또한 도서관 때문이었다. 언젠가 잡지를 넘기다 사진 한 장에 시선이 꽂혔다. 3단 케이크 같은 구조에 철제 고리 장식이 뒤덮인 화려한 건물 때문이었다. 어떤 곳일까 호기심이 일었는데, 알고 보니 버밍엄 도서관이었다. 도서관에 대한 고정관념을 단번에 날려버린 파격이었다. 게다가 영국에서, 나아가 유럽에서 가장 큰 공공 도서관이라니! 그 거대한 책의 세상으로 성큼 들어가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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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밍엄은 영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다. 서울과 부산이 확연히 다르듯 런던과 버밍엄도 그랬다.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런던과 전혀 다른 버밍엄 특유의 인상이 강하게 느껴졌다. 물론 거칠기로 유명한 버밍엄 악센트도 한몫을 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투박한 버밍엄 사투리에 방황하는 사이, 눈앞에는 도시의 다채로움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버밍엄은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매력을 지녔다. 예스러우면서도 모던하고, 고요하면서도 활력이 넘쳤다. 이러한 다채로움의 배경엔 도시의 역동적인 역사가 자리한다. 영국 중서부에 위치한 버밍엄은 지리적 이점을 잘 살린 교통의 요지였다. 그 까닭에 18세기 산업 혁명의 수혜를 입으며 세계 최초의 공업 도시로 눈부신 성장을 이뤘다. 하지만 20세기 후반 경기 침체로 제조업이 쇠퇴하며, 직격탄을 맞았다. 화려했던 산업도시의 몰락이었다.      



한동안 암흑기에 빠졌지만 버밍엄은 포기하지 않았다. 1990년 ‘시티 센터 디자인 전략’을 내놓으며, 과감한 도시 재생 사업을 시작했다. 일곱 개의 구역으로 도심을 나누고, 각기 특성에 맞게 도시의 이미지를 새롭게 디자인한 것이다. 그 결과 침체된 산업 도시는 경제, 문화, 관광의 도시로 새롭게 거듭났다. 흥망성쇠를 거듭하면서도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오늘날 다채로운 버밍엄이 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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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성공적인 도시 재생 사례로 손꼽히는 버밍엄. 그 대표적인 예가 불링 지구다. 12세기부터 형성된 재래시장 지역인데, 대형 쇼핑센터를 더해 새로운 변화를 이룬 곳이다. 불링 지구에 도착하자 전통과 현대의 조화가 특별한 아우라를 뿜어냈다. 1452년 세워진 고딕 양식의 세인트 마틴 교회와 2003년 혁신적인 디자인으로 탄생한 셀프리지 백화점. 그리고 재래시장인 불링인도어마켓과 모던한 불링쇼핑센터. 각기 다른 색채의 개성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데도 제법 잘 어울렸다. 함께 있어 더 빛이 난달까.      



그중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단연 셀프리지 백화점. 버밍엄의 새로운 랜드마크답게 위풍당당한 자세를 뽐냈다. 파코라반 드레스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이 건물은 곡선미를 살린 디자인이 특징이다. 파란색으로 칠한 압축 콘크리트 벽면에 15000개의 은빛 알루미늄 원반을 장식해, 미래에서 갓 튀어나온 듯한 감각적이고 혁신적인 건축물을 선보였다. 영국왕립건축가협회의 건축상을 받은 만큼, 영국 현대 건축의 위상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기회였다. 이렇듯 디자인에 방점을 찍은 버밍엄 답게 거리마다 건축물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남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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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링 지구에서 센티너리 광장으로 향하자 또 하나의 랜드마크가 등장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버밍엄 도서관이다. 도심 한 중간에 과감하게 유럽 최대 규모의 도서관을 설립하고 미래지향적인 디자인으로 존재감을 부각한 추진력이 놀라웠다. 실제로 이를 눈앞에 마주하자, 영국인들이 얼마나 도서관에 진심인지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외실과 내실을 이토록 탄탄하게 다진 세심함이라니! 매일 이곳을 오가며 책을 읽고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버밍엄 사람들이 참 부러웠다.      



버밍엄 도서관을 설계한 네덜란드의 메카노 건축사무소는 ‘사람들의 궁전’을 만드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만큼 이 공간은 큰 꿈을 품고 있었다. 단순한 도서관을 뛰어넘어 누구나 오가는 꿈의 궁전이자 문화 광장으로 문을 활짝 연 것이다. 건물의 외관은 화려한 만큼 그 의미도 특별하다. 우선 가장 인상적인 건 다양하게 중첩되어 있는 원형 메탈의 향연. 버밍엄을 대표하는 장인의 손길로 탄생한 이 메탈은 도시의 끝없는 시간을 도서관에 새기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또한 멀리서 건물을 바라보면 금빛을 품은 보석처럼 보이는데, 그 자체가 보석 산업이 발달한 버밍엄 도시를 형상화했기 때문이란다. 그 의미를 되새기다 보니, 자꾸만 도서관 주위를 빙글빙글 맴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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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사람들의 궁전 속으로 들어갈 차례. 스르륵 도서관의 문이 열리자 형형색색의 책들이 하나의 세계를 이루며 나를 맞이했다. 원통형의 내부를 따라 둥근 곡선 책장에 무수한 책들이 정렬되어 있었다. 또한 파란 조명을 품은 에스켈레이터가 도서관의 중심부를 과감히 가로지르며, 층층마다 펼쳐지는 책의 세계로 사람들을 안내했다. SF 영화 속의 정교한 한 장면 같달까. 마치 책을 테마로 한 우주선 안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도서관에 간다는 건 책을 읽는 것과 같다. 책을 펼치면 처음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찬찬히 읽어 내려가야 그 의미를 곱씹을 수 있듯, 도서관도 마찬가지다. 1층부터 꼭대기까지 모두 둘러봐야 그 매력이 완성된다. 버밍엄 도서관은 꿈의 궁전답게 낭만을 가득 품고 있었다. 열람실을 장식한 책의 향연에 설레다 7층에 이르렀을 때 탄성이 나왔다. ‘시크릿 가든’이란 멋진 이름을 가진 보석 같은 장소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버밍엄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였다. 코끝에 아직 책 내음이 남아있어서인지, 버밍엄의 풍경 또한 한 권의 책처럼 스르륵 내 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보물 같은 장소는 9층에도 있었다. 이름하여 셰익스피어 메모리얼 룸. 작가의 초판본과 더불어 그의 작품 세계가 전시되어 있는 소중한 방이었다. 이렇듯 건물 가득 꽉 채워진 책의 세계는 끝이 없었다. 온종일 머물러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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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해가 저물어 갔지만, 버밍엄 도서관이 전해준 여운은 쉬 사라지지 않았다. 게다가 도시를 따라 흐르는 아름다운 운하는 그 여운을 더 짙게 만들어 주었다. 베니스보다 더 긴 운하를 가졌다는 버밍엄. 오래전 영국 수상 교통의 중심지로 화려한 명성을 쌓은 것도 이 운하 덕분이었다.      


도로마다 연결된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운하를 더 가까이 볼 수 있었다. 운하 위에는 저마다의 탐험에 나선 작은 보트들이 떠다니고, 운하 둔치를 따라 제멋대로 멋을 부린 그라피티가 자유를 노래했다. 물의 풍경은 늘 그렇듯 보는 이의 마음을 조금씩 흔들었다. 특히나 버밍엄을 가로지르는 운하는 새로운 변신을 거듭하는 도시의 얼굴들과 어우러지며, 가슴을 울렁이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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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건 천천히 오래 봐야 하는 법. 그 불변의 진리를 실천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본 뒤, 전망 좋은 벤치에 서둘러 자리를 잡았다. 벤치마다 운하의 풍경을 즐기는 사람들이 가득했는데, 운 좋게 빈 벤치가 하나 남아 있었다. 그곳에 앉아 운하를 바라보니 도시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운하의 찰랑임을 따라 버밍엄의 풍경들이 일렁이고, 다시금 도서관에서의 여운이 밀물처럼 스며들었다. 어쩌면 단 한 번 뿐일지도 모르는 애틋한 순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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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갑자기 옆 벤치에서 오늘의 일상을 나누는 버밍엄 사람들의 웅성임이 들려왔다. 센티한 생각에 빠져들다 갑자기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내겐 일생에 딱 한 번일지도 모르는 순간이 버밍엄 사람들에게는 평범한 일상이라는 생각을 하니, 왠지 작은 희망이 생겼다. 반대로 나의 평범한 일상 중 하나도 누군가에게는 애틋한 순간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뜻이니.   

 


내친김에 기분 좋은 상상을 해보았다. 언젠가 다시 이곳에 돌아올 수 있을까? 아직 언제일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그날이 오면 제일 먼저 버밍엄 도서관으로 달려가 셰익스피어 희곡집 <퍼스트 폴리오>를 빌릴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이 벤치에 앉아 그 책을 읽으며, 책장을 넘길 때마다 버밍엄 운하에 비친 우리의 풍경을 바라보리라!     

           

한 권의 책, 하나의 펜, 한 명의 교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걸 잊지 말아 주세요

Let us not forget that even one book, one pen, one teacher can change the world   


- 말라라 유사프자이(노벨평화상 수상자)

  버밍엄 도서관 개관식 축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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