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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아 Oct 30. 2022

도버, 하얀 절벽 위의 바다

DOVER in UK - 눈감으면 영국

*

“화이트 클리프 꼭대기에 톱니꼴 왕관 아래, 안식일의 평온함보다 더 깊은 고요함 속에.”   

  

나를 도버로 이끈 건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 한 구절이었다. 19세기 영국의 낭만파 시인인 윌리엄 워즈워스는 소박하고 친근한 언어로 영국의 전원 풍경을 아름답게 묘사했다. 그의 시 ‘도버에서’를 읽고 난 뒤 눈을 감고 그곳의 풍경을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화이트 클리프를 검색했다. 각기 다른 구도의 사진이었지만 풍경은 하나로 이어졌다. 까마득하게 펼쳐진 새하얀 절벽 아래 푸르게 넘실거리는 바다의 풍경. 그러니 내가 도버를 찾은 건 뜻밖이 아니었다.      



도버는 영국의 동남쪽, 유려한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켄트주 해안에 위치한 작은 항구 도시다. 버스 정류장에 내리자 벌써부터 끼룩끼룩 갈매기가 울었다. 머지않아 바다를 볼 수 있으리란 표시였다. 갈매기가 나르는 방향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더니 저 멀리 도버성이 눈에 띄었다. 도버성은 11세기부터 도시를 지켜온 역사적인 요새이자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해발 114m의 석회암 절벽 위에 기틀을 다지며 오랜 세월 외세의 침략을 막았던 도버성. ‘영국으로 가는 열쇠’라 불리며 도버 해협을 지켰던 남다른 존재감에 자꾸만 시선을 빼앗겠다.     


*

주위를 살펴보니 표지판에 화이트 클리프로 가는 길이 보였다. 그곳을 따라가면 금세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화이트 클리프는 꽤나 멀었다. 걷고 또 걸었다. 수십 마리의 갈매기들이 머물고 있는 공원을 지나 무채색의 작은 상점들이 몰려 있는 시가지를 스쳐 지나갔다. 앞만 보고 걷다 마을 끄트머리에 다다랐을 때 길 건너 저 편에 푸른 바다가 출렁이고 있었다. 다시금 표지판의 안내를 따라 왼쪽으로 발길을 꺾자, 투박한 절벽의 모양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곳은 마치 화이트 클리프의 예고편 같았다. 위태롭게 쏟아져 내릴 듯한 하얀 절벽들이 작은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인상적인 건 절벽 아래에 일렬로 꿋꿋이 늘어서 있는 낡은 집들이었다. 그 집들은 마치 새하얀 절벽에 당당히 맞서겠다는 듯 저마다 다른 색깔로 자신을 뽐내고 있었다. 하늘 위의 절벽, 눈앞의 바다, 그와 어우러진 강인한 집들의 행렬을 보니 저절로 마음이 울렁거렸다.      


*

비로소 화이트 클리프로 오르는 산책로가 시작됐다. 그런데 의외로 입구가 황량했다. 길은 좁았고, 흙먼지가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뒹굴고 있었다. 정말 이 길로 가면 화이트 클리프가 나오는 걸까? 입구에서 올려다보니 언덕 위로 길게 길이 뻗어 있었고, 그 끝에는 구름 낀 하늘만 보였다. 모든 일이 그렇듯, 직접 가 닿아봐야 그다음 풍경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누군가 산책로에 들어서고 있었다. 어색하게 눈이 마주친 김에 화이트 클리프로 가는 길을 확실하게 물어보기로 했다.      


“제대로 왔네요. 이 길을 따라 쭉 가면 화이트 클리프예요. 그냥 나를 따라와요.”      



얼떨결에 동행자가 생겨버렸다. 화이트 클리프로 향하는 길은 한 방향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그를 따라 걷게 되었다. 그의 이름은 에드. 도버에서 태어나고 자란 토박이였다. 점심을 먹고 화이트 클리프로 산책을 나서는 게 그의 일상이라고 했다. 이토록 근사한 일상이라니! 내심 부러워하고 있는데, 그는 의외의 말을 던졌다.    

  

“그런데 왜 도버로 여행을 왔어요? 솔직히 난 도버가 지겹거든요. 너무 심심한 곳이에요.”     


갑자기 도버를 향한 속마음을 털어놓는 현지인의 푸념에 왠지 공감이 가 웃음이 났다. 그래서 나 또한 살던 곳이 지겨워 도버로 여행을 떠나왔다고 화답을 했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꼭 가보고 싶은 아름다운 절경이 어떤 이에게는 매일 봐서 지루해진 현실이라니. 꿈같은 풍경도 현실이 되면 그곳을 떠나고 싶은 것일까? 어쩌면 꿈과 현실의 간극은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

화이트 클리프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좁은 오솔길을 오를 때는 날카로운 나뭇가지들이 머리를 찔렀고, 제법 평탄한 길이 나왔다고 방심할라치면 갑자기 언덕 위에서 자갈들이 굴러 떨어졌다. 알고 보니 언덕에서 풀을 뜯고 있던 염소들이 사람들을 향해 뒷발질을 하고 있었다.    

  

아래에서 봤을 때는 조금만 걸으면 도착할 것 같았는데, 한 시간을 걸어도 화이트 클리프는 보일 듯 말 듯 나타나지 않았다. 이마엔 송글송글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숨소리도 조금씩 거칠어져 갔다. 내가 지쳐가자, 그 길에 익숙한 에드가 나를 향해 응원의 말을 건넸다.      


“힘내요! 거의 다 왔어요. 화이트 클리프로 가면 재밌는 이야기 하나 해줄 게요.”  


*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에드는 화이트 클리프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라 했다. 사실이었다. 오솔길의 모퉁이를 돌자 사진에서 본 풍경이 거짓말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넓고 푸른 언덕 아래로 마치 눈이 내리듯 순수하게 떨어지는 하얀 절벽이 바다를 향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 옛날, 고대 로마인들은 브리튼섬을 바라보며 ‘알비온’이라고 불렀단다. 그 뜻은 하얀 나라. 바로 도버의 화이트 클리프를 마주하며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곳에 오르자 ‘알비온’의 의미가 더욱 실감 났다. 5Km에 달하는 아름다운 하얀 절벽의 향연. 자연의 신비로움이 온통 하얀 나라를 이루고 있었다. 화이트 클리프를 만든 건 분필의 성분인 초크. 7000만 년 전부터 바다의 미생물들이 계속 퇴적되어 하얀 절벽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저기 보이는 게 프랑스 칼레예요.”     


에드는 손을 뻗어 수평선의 끝을 가리켰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있는 도버 해협. 그중 가장 좁은 폭은 34Km에 불과해, 날씨가 맑은 날에는 건너편의 해안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그런 만큼 도버 해협은 전 세계에서 통행량이 가장 많은 해상 교통로로 손꼽힌다. 바다에 유독 많은 대형 선박들이 떠 있는 것은 그런 이유였다.   



도버 해협을 바라보며 넋을 잃고 있는 나에게 에드는 재밌는 이야기를 해주겠다며 핸드폰을 내밀었다.      


“핸드폰을 한 번 봐요. 지금 프랑스 시간으로 바뀌었죠. 칼레가 가까우니까 여기서 프랑스 통신사로 연결될 때가 있어요. 나도 모르게 자동 로밍돼서 국제 전화 요금을 낸 적도 있다니까요. 통신사에 항의를 하긴 했는데, 바다를 넘어오는 전파까지 완벽하게 차단할 순 없대요. 웃기지 않아요?” 


    

에드의 말이 맞았다. 핸드폰을 열자 시계가 프랑스 시간으로 넘어가 있었다. 영국의 땅끝 절벽에서 프랑스의 시간을 맞이하니 기분이 색달랐다. 배를 타고 한 시간 반이면 프랑스에 도착한다니. 정말 가까운 거리였다. 유수한 수영 선수들이 도버 해협 횡단에 도전장을 내미는 것 또한 바로 이런 까닭. 정말인지 바다 건너 프랑스 칼레의 기운이 코앞까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왕 왔으니 저 끝에 있는 사우스 포어랜드 등대에도 꼭 들렸다 가요. 거기 경치가 멋져요. 그리고 다시 돌아갈 땐 꼭 영국 시간으로 확인하는 거 잊지 말아요!”     


이제 그만 일상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에드는 마지막까지 친절하게 화이트 클리프의 초심자를 위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말로는 도버가 지겹다고 했지만, 사실 내가 본 그의 모습에는 고향에 대한 애정이 잔뜩 묻어 있었다.      



나는 조금 더 가까이 화이트 클리프를 보기 위해 절벽 끝으로 다가갔다. 세상에 오직 나와 하얀 절벽, 그리고 푸른 바다만이 존재하는 듯했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사이로 스며드는 공기가 오히려 시원하게 느껴졌다. 그곳은 공기마저 특별했다. 은은한 바다의 향과 물기를 머금은 풀내음이 뒤섞여 잊고 있던 어떠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오래전, 이곳에 올라 시를 썼던 윌리엄 워즈워스도 나와 똑같은 기분을 느꼈을까?      


시인이 말했던  '평온함보다 더 깊은 고요함’이 하얀 절벽 위의 바다로 서서히 밀려왔다. 한참 동안 이곳에 있으니 에드가 부러워졌다. 적어도 지금의 나는, 영원히 하얀 나라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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