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NBURGH IN UK - 눈감으면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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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든버러에 발을 디딘 순간, 시간 여행이 시작된 듯했다. 산등성이의 고성들이 일제히 나를 내려다보았고, 그 모습을 입을 벌린 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에든버러. 여행을 다니며 도시마다 저마다의 기운을 갖고 있다는 걸 느꼈는데, 에든버러가 뿜어내는 에너지는 정말 대단했다. 무엇이든 집어삼킬 수 있을 것처럼 거대했고, 무엇이든 품을 수 있다는 듯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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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서 에든버러는 기차로 약 5시간의 거리, 꽤나 긴 여정이었지만 유독 가깝게 느껴진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곳에서 여행 메이트를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3살 터울인 모모 언니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최고의 여행 메이트다. 우리는 매년 새로운 도시로 여행을 떠났는데, 언니와의 여행은 조금 특별했다. 언니가 이탈리아에 살고 있는 까닭에 늘 각자의 장소에서 출발을 따로 해야 했다. 여행을 마칠 때도 각자의 길로 떠나야 했다. 그래서 낯선 도시에서 재회하는 그 순간이 더 애틋했다.
생각해보면 늘 그랬다. 언니와 만나 함께 여행했던 곳들은 하나 같이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낯선 나라에 대한 기대감과 친근한 이를 다시 만난다는 기쁨이 한 데 어우러져 좋은 에너지를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곳에서 소중한 이와 재회하는 그 순간, 낯섦은 사라지고 두려움도 달아났다. 함께 걷는 이가 친숙하니, 여행의 모든 순간도 더욱 친근하게 느껴졌다.
오후 4시. 나는 언니와 만나기로 한 에든버러 역 앞에 서 있었다. 어느 방향에서 언니가 올지 몰랐기 때문에 계속 두리번거리며 오랜만의 재회를 기다렸다. 잠시 후,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렸고, 돌아보니 캐리어를 든 언니가 활짝 웃고 있었다. 다시 만난 우리는 반가운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때부터 에든버러는 더 이상 낯선 도시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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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 북아일랜드, 웨일스와 더불어 영국을 이루는 네 개의 구성국 중 하나다. 스코틀랜드의 중심지인 에든버러는 무수한 수식어를 지닌 도시다. 해리포터가 탄생한 문학의 도시, 강렬한 스카치위스키의 고장, 매년 세계 최대 공연 페스티벌이 열리는 문화의 중심지 등. 그만큼 에든버러는 보고 듣고 느낄 것이 많은 무궁무진한 도시였다. 그중에서도 우리가 가장 매료된 것은 바로 ‘위스키’였다.
시작은 우연이었다. 언니와 나는 프린세스 스트리트 북쪽의 뉴타운에 에어비앤비를 얻어 스코틀랜드에서의 밤을 보내기로 했다. 뉴타운이란 이름이 무색하게 거리에는 200년이 훌쩍 넘은 건축물들이 즐비했다. 오랜 연식이 느껴지는 건물 3층에 위치한 이 집은 들어가는 순간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났다. 창밖으로는 스코틀랜드 특유의 회색빛 풍경이 보이고, 거실의 나무 바닥은 걸을 때마다 삐걱삐걱 소리를 냈다. 우리는 스코틀랜드 가정집의 운치에 푹 빠지게 되었다. 그러곤 침대에 누워 그동안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다 깊이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개운하게 잠이 깬 우리는 머리맡에 놓인 종이 하나를 발견했다. 스카치위스키 익스피리언스의 초대장이었다. 우연히 발견한 비밀스러운 초대장이 금세 우리의 마음을 빼앗았다.
“오늘 여기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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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세워둔 계획을 미루고, 가장 먼저 스카치위스키 익스피리언스를 가보기로 했다. 스코틀랜드 하면 떠오르는 술은 단연 스카치위스키. 지난밤 간식거리를 사기 위해 찾아간 막스앤스펜서 지하 슈퍼마켓에서도 한 섹션에 빼곡히 진열된 위스키가 눈길을 끌었다. 위스키의 본고장에 왔으니, 위스키와의 귀한 만남을 도저히 놓칠 수 없었다.
스카치위스키 익스피리언스는 에든버러 성 앞에 위치해있었다. 저 멀리 우뚝 세워진 성을 표지판 삼아 그곳을 바라보며 한참을 걸어야 했다. 가파른 절벽으로 이루어진 바위산 캐슬록에 단단히 기틀을 잡고 있는 에든버러성. 고대부터 에든버러를 지켜왔던 도시의 요새는 오랜 세월이 빚어낸 견고함을 맘껏 뿜어내고 있었다.
에든버러성으로 향하는 길은 한시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 훌리루드 궁전에서 에든버러성까지 이르는 1.6킬로미터의 로열 마일. 16세기 스코틀랜드 국왕이 성과 궁전 사이를 오갔던 이 유명한 길에 다다르자 중세 시대로 성큼 다가선듯했다. 왕관 모양의 첨탑이 돋보이는 중세 고딕 양식의 세인트 자일스 성당 앞에서 과거로의 여행을 즐기려는데, 기다렸다는 듯 백파이프 소리가 거리에 울렸다. 때마침 킬트를 입고 백파이프를 메고 있는 예술가의 연주가 시작된 것이다. 스코틀랜드의 전통 음악과 함께 펼쳐지는 고색창연한 중세의 거리. 오직 이 도시에서만 마주할 수 있는 한정판 풍경이 진한 울림으로 마음속에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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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치위스키 익스피리언스는 스코틀랜드 위스키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독특한 박물관이었다. 스카치위스키 익스피리언스로 들어가자, 단번에 위스키 향이 코를 찔렀다. 위스키 체험장으로 들어서니, 양조용 오크통 모양의 의자가 빙글빙글 돌아 우리 앞에 도착했다. 마치 놀이공원에 온 기분이었다. 동심의 세계로 돌아간 듯 재빨리 그곳에 올라타자, 오크통 열차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힘차게 출발했다.
오크통 열차는 앞으로 나아가며, 위스키 공장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제조 방법, 지역별 특징 등 위스키만의 특별한 이야기가 하나씩 시작되었다. 스카치위스키에 대해 쉽고 재밌게 알려주는 게 인상적이었다. 갑자기 홀로그램의 신사가 뿅 하고 나타나 위스키의 원료를 소개했다. 보리를 말리면 맥아가 되고, 맥아를 발효해 위스키를 만든단다. 이 과정을 눈앞에서 동글동글 알록달록한 기포 모형으로 보여주니, 머리에 쏙쏙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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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치위스키는 원료에 따라 몰트 위스키, 그레인위스키, 블렌디드 위스키로 나뉘는데, 그중 몰트 위스키는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자존심과 같다. 100% 보리로 만든 위스키로, 한 증류소에서 생산된 원액으로만 숙성시켜 맛과 향이 남다르단다. 몰트를 증류한 원액은 최소 3년 이상 오크통에 숙성시켜야 위스키라 불릴 수 있다. 대부분의 싱글몰트는 최소 10년 이상의 숙성을 거친다고 하니, 모든 것이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한참 동안 스카치위스키의 세계에 빠져든 후, 오크통에서 내리자 생생한 오감 체험이 시작되었다. 가이드가 건네 준 예쁜 종이 한 장에는 하이랜드, 스페이사이드, 아일라, 로우랜드, 캄벨 타운, 5개의 지역이 서로 다른 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씩 문지르니 이색적인 향기가 났다. 세계 최대 위스키 생산지인 스코틀랜드의 대표 지역들로, 각각의 위스키의 특징을 향으로 표현한 것이다. 스페이사이드의 간판주자인 싱글몰트 위스키는 신선하고 부드러운 과일향을 머금고 있었다. 향을 먼저 느낀 후 그에 해당하는 위스키를 하나씩 시음해 보았다. 어떤 오크통을 썼느냐, 몇 년의 숙성 과정을 거쳤느냐, 시간과 정성에 따라 맛은 천차만별이었다. 알면 알수록 위스키의 세계는 흥미롭고 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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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키의 천국에서 황금빛 시간을 보내고 다시 거리로 나오자 에든버러가 더욱 친근하게 느껴졌다. 스카치위스키가 그러하듯 에든버러도 오래 숙성된 도시의 깊은 멋을 잔뜩 머금고 있었다. 위스키의 짙은 여운이 가시기 전, 칼튼힐에 올라 에든버러의 풍경을 한눈에 담고 싶었다. 칼튼힐은 에든버러가 한 폭의 그림처럼 내려다보이는 언덕이다. 에든버러를 찾는 사람들은 해가 지기 전 자연스레 칼튼힐에 오르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에든버러의 일몰이 무척이나 아름답기 때문이다.
칼튼힐에는 그리스 신전을 닮은 내셔널 기념탑, 그리고 스튜어트 기념비와 넬슨 기념탑 등이 저마다의 분위기로 어우러져 있었다. 110m의 그리 높지 않은 언덕이었지만, 이곳에서 바라보는 에든버러는 강렬한 끌림으로 다가온다. 뉴타운과 올드타운을 가로지르는 프린세스 스트리트, 그리고 에든버러성과 홀리루드 궁전이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며 빛을 냈고, 북쪽에서는 리스 항구를 품은 바다가 잔잔한 물결을 이루었다. 한 번 보면 눈을 뗄 수 없는, 자꾸만 보고 싶어지는 풍경이었다.
아직 일몰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언덕에 자리를 잡았다. 칼튼힐은 360도로 탁 트인 전망을 갖고 있어, 어느 곳에 서 있어도 잊지 못할 광경을 선물해 주었다. 몇 바퀴를 돌아도 질리지 않는, 새로운 시작 같은 풍경이었다. 나와 언니는 에든버러성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어느새 추억이 된 스카치위스키의 맛을 떠올리며, 에든버러 여행에서 느낀 소소한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다음엔 어디서 만날까?”
에든버러에 매료된 우리는 또 한 번 스코틀랜드로의 여행을 계획해보았다. 아름다운 호수와 한적한 협곡을 마주할 수 있는 하일랜드에서의 위스키 투어, 눈부신 금빛 모래로 유명한 해안도시 애버딘으로의 바다 여행, 스코틀랜드의 도시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다시 떠날 여행을 꿈꾸었다. 그러는 사이 산등성이 너머로 해가 지기 시작했고, 중세를 품고 있는 찬란한 도시가 주황빛으로 선명하게 물들기 시작했다.
아직 몰트 위스키의 맛이 입가에 맴돌고 있어서인지, 에든버러 전체가 위스키에 가득 잠긴듯했다. 노을빛이 오후 내내 보았던 수많은 위스키들의 선명한 빛깔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해가 지고 도시의 불빛들이 하나둘 켜지자 스카치위스키의 강렬한 힘이 다시금 우리에게 전해졌다. 나와 언니는 동시에 같은 감정을 느낀 듯 서로를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다시 같은 방향으로 에든버러를 바라보며, 그 짙은 여운을 오랫동안 음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