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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아 Oct 20. 2022

글래스고, 스코티쉬의 뿌리 깊은 자유

GLASGOW IN UK - 눈감으면 영국 


이른 아침, 글래스고 공항에 도착했다. 저가 항공의 비좁은 좌석을 벗어나기 위해 서둘러 짐을 챙겼다. 빠른 걸음으로 비행기 계단을 내려오는데 눈앞이 흐려졌다. 새벽 비행기를 타기 위해 잠을 설친 탓일까? 눈을 비비고 다시 보니 그것은 안개였다. 악명 높은 스코틀랜드의 안개가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덕분에 글래스고 특유의 아침 공기가 더욱 마음에 들었다.      



공항에서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작은 마트였다. 허기를 달래고 싶기도 했지만,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 오직 스코틀랜드에서만 살 수 있는 걸 맛보기 위해서였다. 먼저 고른 건 스코틀랜드 대표 브랜드인 맥키스(Mackie's)의 감자칩. 그중 스코틀랜드 전통 음식인 해기스맛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음료 섹션에서는 스코틀랜드의 국민 음료인 아이언 브루(Irn Bru)를 집어 들었다. 짭짤미묘한 감자칩과 알싸한 탄산음료의 조화로 스코틀랜드의 아침을 시작할 계획이었다.      



스코틀랜드는 작은 마트에서조차 고유한 지역색을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영국이지만 영국이 아닌 느낌. 역사를 들여다보면 그럴 법도 했다. 9세기에 켈트족이 건국한 스코틀랜드는 앵글로색슨족이 주류를 이루는 잉글랜드로부터 끊임없는 침략과 약탈을 당했다. 천년 동안 원수처럼 지냈지만, 우여곡절 끝에 1707년 두 왕국은 합방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스코틀랜드는 영국 연방에 속해 있지만 독자적인 국기와 화폐, 정부를 가지며 오랫동안 독립을 꿈꿔왔다. 그런 까닭에 스코틀랜드의 어디를 가도 스코티쉬만의 자부심을 마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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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래스고 시내는 공항에서 그리 멀지 않다. 버스를 타면 30분도 채 되지 않아 도심의 한중간에 다다른다. 스코틀랜드 최대의 도시이자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인 글래스고. 에든버러와 기차로 한 시간 남짓 떨어져 있지만, 두 도시의 인상은 확연히 다르다. 에든버러가 역사와 전통을 가득 품고 있는 묵직한 톤이라면, 글래스고는 좀 더 유연하고 다채로운 컬러다. 또한 스코틀랜드 최대 규모의 글래스고 대학을 보유하고 있는 만큼, 보다 젊고 진보적이다.      



글래스고의 심장부인 조지 스퀘어에 도착하자, 탁 트인 광장에 스코틀랜드의 기운이 가득하다. 시청사를 비롯해 빅토리아 시대의 고풍스러운 건축물들이 광장을 둘러싸며 초심자에게 오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미 그 이야기에 익숙한 글래스고 사람들은 아침 일찍 광장 벤치에 앉아 여유롭게 신문을 읽고 있다. 그 사이를 오가며 광장의 아침을 즐기는데, 익숙한 이름들이 눈에 띄었다. 글래스고 출신으로 그레이엄 법칙을 발견한 토머스 그레이엄, 글래스고 대학을 나와 증기 기관을 발명한 제임스 와트의 동상들이 지역의 자랑으로 광장을 지키고 있었다.    


조지 스퀘어에는 총 12개의 동상이 있는데, 그중 단연 돋보이는 건 스코틀랜드 국민 작가 월터 스콧의 기념비였다. 24m의 높은 기둥으로 세워져 광장의 중심을 장악하는 기념비는 스코틀랜드의 대문호를 향한 글래스고인들의 깊은 경의를 느끼게 했다. 그는 소설 <롭 로이>에서 글래스고 성당을 세밀하게 묘사했는데, 오늘날에도 글래스고를 내려다보며 깊은 감상에 젖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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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래스고는 단순히 과거에 머무르지 않았다. 스코틀랜드의 역사를 품고 있는 조지 스퀘어에서 몇 발자국만 걸어가도 뷰캐넌 스트리트의 자유로운 활기가 펼쳐진다. 공작새를 연상시키는 화려한 장식의 프린스 스퀘어 쇼핑센터, 1827년 문을 연 스코틀랜드 최초의 실내 쇼핑몰 아가일 아케이드 등 볼거리가 넘쳐나는 쇼핑 거리. 그럼에도 가장 인상적인 건 뷰캐넌 스트리트를 가득 메운 글래스고 사람들의 활력이다.       



글래스고는 자유로웠다. 이런 기질을 강렬하게 느낀 곳이 예기치 못한 장소라 더 재미있다. 바로 현대미술관 앞에 있는 웰링턴 공작의 동상. 그곳에서 한참 동안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위풍당당하게 말을 타고 있는 웰링턴 공작의 머리에 난데없는 고깔이 씌어져 있는 걸까? 획기적인 미술 전시인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알고 보니 1980년대에 누군가가 장난 삼아 동상 머리에 라바콘을 씌운 게 시초. 시의회가 이를 제거하려고 했지만,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해 결국 표현의 자유로 인정하게 된 거다. 덕분에 지금은 글래스고의 명물로 당당히 자리 잡았다. 라바콘에 가득 담긴 글래스고인들의 위트와 자유로움을 떠올리니, 동상 주변을 계속 맴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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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글래스고는 진보적이었다. 그 이미지를 부각시킨 건 도시의 또 다른 명물, 찰스 레닌 매킨토시였다. 글래스고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 매킨토시, 그는 건축 디자인을 넘어 그래픽, 가구, 조명, 실내 장식 디자인과 수채화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영역을 아우르며 건축의 개념을 한 단계 진보시켰다. 글래스고가 디자인과 건축의 도시로 이름을 알린 건 매킨토시의 영향이 강력했다. 글래스고 예술 대학의 학생이었던 매킨토시는 불과 28살의 나이에 자신의 학교를 새롭게 디자인하며, 건축가로서 화려한 비상을 알렸다.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디자인으로 아르누보 양식의 선구자였던 매킨토시. 글래스고 곳곳에 그의 흔적들이 선명히 남아있어, 그것을 따라 걷는 것만으로도 글래스고 건축의 역사를 깊이 탐독할 수 있다.      



뷰캐넌 스트리트의 작은 골목길에 접어들면 매킨토시의 손길이 가득 깃든 장소를 연이어 만날 수 있다. 윌로우티룸과 라이트하우스다. 윌로우티룸의 모든 것에는 매킨토시의 세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티룸 간판의 독특한 폰트부터 심플하면서도 독특한 조명, 직선의 조형미가 강조된 벽면 장식까지 매킨토시는 심혈을 기울여 공간의 모든 것을 창조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사다리 모양의 래더 백 체어에 앉아 주위를 살펴보면, 먼 과거에 이미 ‘토털 디자인’이란 작업 정신을 실현한 매킨토시의 진보성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라이트하우스에도 놀라움은 가득하다. 1895년 매킨토시가 처음으로 공공건물 의뢰를 받아 허름한 창고를 분위기 있는 헤럴드 신문사 사옥으로 변신시킨 건축물. 이곳의 백미는 화재로부터 건물을 보호하기 위해 설계한 독특한 나선형 계단이다. 워터타워까지 이어진 이 계단을 직접 마주하면, 유려한 곡선의 흐름에 금세 마음을 빼앗긴다.      



라이트하우스는 1999년 스코틀랜드 디자인 건축센터로 탈바꿈했는데, 나선형 계단을 비롯한 매킨토시의 작품 세계를 모두 둘러본 후 루프탑까지 올라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7층 전망대에 오르면 글래스고 시내가 파노라마 펼쳐져 도시의 생동감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색적인 건 전망대 입구에 화려하게 색칠된 피아노가 놓여 있다는 것. 갑자기 자유분방한 기운의 청년 하나가 피아노 옆에 가방을 내려놓고 이름 모를 재즈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여행의 여운을 결정짓는 건 이런 뜻밖의 순간들. 그 덕분에 글래스고 사람들의 자유로움이 한층 더 리드미컬하게 마음을 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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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MAKE GLASGOW’란 도시의 캐치프라이즈처럼, 글래스고는 사람에 방점을 찍는 도시다. 스코틀랜드의 오랜 역사를 품으면서도 자유롭게 앞으로 나아가는 글래스고인의 기질은 오늘날의 글래스고를 이끄는 큰 힘이 되어 준다. 그들은 스스로를 지키고, 유연하게 변화했으며, 또한 잊지 않았다. 이런 인상을 강하게 받은 건, 도시의 뿌리와도 같은 글래스고 대성당과 네크로폴리스에 이르렀을 때였다.     

   


글래스고 대성당은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13세기 원형 그대로를 보존하고 있다. 이 성당이 경이로운 것은 뾰족한 첨탑부터 정교한 스테인드글라스까지, 오랜 세월의 흔적을 온몸으로 드러내는 고딕 양식의 진수를 보여줘서가 아니다. 그 옛날 격변의 대혼란 속에서 스스로를 지켜냈다는 것. 1560년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으로 인해 무수한 성당들이 파괴되었지만, 글래스고 대성당은 일시적으로 장로교 교리를 택해 위기를 모면했다. 현재 유일하게 살아남은 스코틀랜드의 중세 성당이라는 수식, 그 자체가 글래스고 대성당의 선명한 아우라를 이룬다.   

            


글래스고 성당의 유일무이한 존재감은 뒤편 언덕을 지키고 있는 네크로폴리스로 인해 무한의 생명력을 지닌다. 네크로폴리스는 ‘죽은 자들의 도시’란 뜻으로, 빅토리아 시대에 지어진 글래스고에서 가장 오래된 공동묘지다. 누군가의 무덤 앞에서 생명력을 느낀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그만큼 네크로폴리스에는 현실을 초월하는 힘이 있었다.      

    


유럽의 공동묘지는 으스스하고 어두운 기운이 느껴지는 동양의 것과 달리, 공원처럼 개방적이고 평온한 느낌을 전해준다. 특히나 네크로폴리스의 분위기는 독보적이었다. 언덕의 길을 따라 이어지는 묘지를 하나씩 마주하는 경험은 마치 사색의 길을 걷는 듯 주어진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만든다. 또 그러다 보면 어느새 눈앞에 초록 지붕의 글래스고 성당을 품은 글래스고의 전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네크로폴리스의 언덕에 올라 바람을 맞으며 글래스고를 바라보는 순간, 신기하게도 죽음과 삶의 경계가 사라지고 오직 현재만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네크로폴리스는 탄식의 다리를 건너 시작되는 입구부터 언덕 끝까지, 치열한 삶을 살았던 글래스고인들을 기리는 기념비로 가득했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로 잘 알려진 스코틀랜드의 독립 영웅 윌리엄 윌리스의 기념비를 비롯해 각기 다른 크기와 모양의 기념비 3500여 개가 글래스고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똑같은 기념비는 하나도 없었다. 이는 곧 각자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냈던 글래스고 사람들이 전하는 진심 어린 메시지처럼 느껴져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세상에 똑같은 삶은 하나도 없다고, 그러니 네 스스로의 삶을 지키며 자유롭게 살아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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