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아 Oct 30. 2022

라이, 작은 골목의 재발견

RYE in UK - 눈감으면 영국

  *

영국에서의 긴 여행,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라이였다. 왜 라이를 선택했을까?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이곳에는 역사적인 유적도, 유명한 명소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쩌면 평범한 동네일지도 모르는 곳. 영국 남동부에 위치한 작고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라이. 라이. 라이. 그 이름은 하나의 노래처럼 입가에 계속 맴돌았다. 

       


영어로 ‘Rye’의 뜻은 호밀이었다. 뜻을 알고 나니 어떤 풍경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한 장면이었다. 콜필드가 호밀밭에서 아이들을 지켜내는 모습들. 그래서인지 이 도시가 더 궁금해졌다. 라이에 가면 ‘호밀밭의 파수꾼’처럼 근사한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을까? 


으레 여행을 떠나기 전 거치는 중요한 절차가 있었다. 어느 곳을 갈지 계획을 세우고 효율적인 동선을 짜는 것이었다. 한정된 시간에 최대한 많은 추억을 쌓기 위한 필수 과정이었다. 하지만 라이는 달랐다. 동네 한 바퀴를 도는데 두 시간도 채 걸리지 않은 작은 마을. 굳이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길을 잃을 염려가 없었다. 동네 산책을 하듯 천천히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면 라이를 하나씩 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

“같이 여행 갈래?”

“어디로?”

“라이!”

“그래, 좋아.”     


여행이 오래 기억에 남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을 보았느냐 혹은 누구와 함께 떠났느냐는 것이다. 라이의 경우 후자였다. 내게 여행을 같이 떠나자고 묻는 건, 하나의 고백 같은 거였다. 어떤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누군가와 같은 것을 보고 듣고 느낀다는 것. 그 특별한 여정을 함께하고 싶은 이가 있다는 건 얼마나 설레는 일인지.      



작은 골목길을 돌며 숨겨진 보물을 발견할 수 있는 도시 라이, 이곳은 꼭 내가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 가고 싶었다. 그래서 영국에서 만나 친한 친구가 된 반에게 물었다. 런던에서 태어나 자란 반도 아직 라이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 함께 보물 찾기를 하기에 제격인 여행지였다.     

  

런던에서 기차를 타고 2시간 우리는 라이역에 도착했다. 런던에서 마주했던 복잡한 도심의 풍경은 완연히 사라지고, 우리 앞에는 고요하고 아기자기한 마을이 동화처럼 펼쳐졌다. 어느 곳으로 가면 좋을까? 여러 갈래의 길이 놓였는데, 우리는 오르막길을 택했다. 그리곤 주저 없이 앞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

라이는 울퉁불퉁한 자갈밭 거리가 매력적이었다. 걸을 때마다 발끝에 오돌토돌한 자갈의 감각이 그대로 전해져, 온몸으로 여행하는 기분이 들었다. 길을 따라 오르막을 오르니, 어느새 머메이드 스트리트에 도착했다. 라이에서 가장 유명한 곳. 라이의 그림엽서들에 대표적으로 등장하는 그 거리였다.     

 

중세 시대부터 조성된 머메이드 스트리트는 라이에서 가장 예쁜 거리로,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좁고 길게 이어진 자갈밭 거리, 그리고 양옆으로 중세 시대에 지어진 반목조 가옥과 근현대의 벽돌 가옥이 고즈넉하게 어우러져 있었다.      



오르막길 끝에 다다르니, 이 거리에서 가장 유명한 명소가 미스터리한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 12세기에 지어진 유서 깊은 건물인 머메이드 여관이었다. 당시 라이는 샌드위치, 도버, 하이드, 뉴 롬니, 헤이스팅스와 함께 다섯 항구 연맹에 포함되며, 항구도시로서 큰 발전을 했다. 그때 선원들이 이 여관을 주로 이용했고, 엘리자베스 1세도 이곳에서 묵었다. 하지만 지역이 쇠락하면서 17~18세기 라이는 밀수의 천국이 되었단다. 그로 인해 메머이드 여관도 범죄자들의 아지트로 변모하고 말았다. 호크허스트 갱단처럼 악명 높은 밀수 조직들이 이 여관을 아지트로 삼은 것이다. 그로 인해 지하실엔 무수한 비밀 터널들이 존재한다고 했다.      



오랜 역사가 담긴 낡은 건물인 만큼, 이곳은 유령이 출몰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1호실 벽난로 옆 의자에는 흰색 옷을 입은 여자 유령이, 16호실에서는 두 남자 유령이 결투하는 모습이 포착되었단다. 이야기만 들으면 으스스할 것 같지만, 막상 여관 안으로 들어가면 그런 분위기는 온데간데없다. 대신 중세 시대의 클래식하고 고풍스러운 감성이 주위를 감싼다.      


그 분위기에 매료되어 1층에 있는 레스토랑에 앉아 점심을 먹기로 했는데, 먹는 내내 흥미진진했다. 혹시 어디선가 유령이 튀어나오지 않을까? 밥을 먹으면서 자꾸 뒤를 돌아보았지만, 유령의 싸늘한 기운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벽난로의 따뜻한 온기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다시 자갈밭 거리를 따라 골목길을 걸었다. 마을 이곳저곳에서 오랜 역사를 지닌 장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 하나는 마을 끄트머리에 당당히 서 있는 이프르 타워. 작지만 볼거리가 가득한 이 요새는 13세기 중반 헨리 3세의 명에 따라 프랑스를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요새 안은 다양한 볼거리로 가득했다. 중세 시대의 무기와 갑옷 등이 전시되어 당시의 시대상을 엿보게 만들었다. 또한 400여 년 동안 감옥으로 사용된 곳이라 교수대처럼 처형과 관련된 전시품들도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좋은 점은 옥상에 오르면 라이 만의 풍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 라이에서 가장 큰 건물인 세인트 메리 교회도 빼놓을 수 없다. 12세기에 지어진 노르만 양식의 성공회 교회다. 14세기 프랑스인의 침공으로 불에 타버렸지만, 지금은 재건되어 라이의 한 모퉁이에 아름답게 자리해 있다.      


*

라이의 오랜 건축물들을 마주하다 보니, 어느새 동네 한 바퀴를 다 돌게 되었다. 이제 어디로 가면 좋을까? 마을을 다 둘러봤다고 해서, 이대로 여행을 끝내기는 아쉬웠다. 우리는 다시 도시의 입구에 섰다. 그리고 처음처럼 눈앞의 오르막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다시 찬찬히 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다. 라이에서의 두 번째 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마을의 풍경을 다시 마주하니, 이번에는 처음에 보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둘 눈에 띄었다. 알록달록 캔디와 초콜릿이 가득한 예쁜 군것질 가게, 오래된 표지판들을 모아둔 골동품점, 라이의 지도와 엽서들을 장식해놓은 기념품점, ‘All You Need Is Love’란 문구가 적힌 스탠드가 눈에 띄는 사랑스러운 조명 가게 등. 라이에는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많았고, 그것들로 라이의 골목은 더 특별해 보였다.      



우리는 기념품점에 들어가 자세히 구경해보기로 했다. 가게에 들어서니 빨간 스웨터를 입은 영국 할머니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나는 한쪽 벽면에 장식된 엽서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여행을 갈 때마다 하나씩 사 모으는 게 있는데, 바로 엽서였다. 그 도시의 풍경을 담은 특별한 그림엽서를 수집하는 게 내 취미였다. 그 순간 내 눈을 빛나게 한 엽서는 메머이드 스트리트를 수채화로 그린 예쁜 엽서였다. 나는 친구와 함께 같은 엽서를 골라 하나씩 나눠 갖기로 했다. 여행지에서 같은 물건을 사고 함께 간직하는 것. 누군가와의 여행을 더욱더 오래 기억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일 테니.           


*

두 번의 산책을 마치고, 우리는 골목 한 모퉁이에 있는 초콜릿 가게에 들어갔다. 따뜻한 핫초코를 먹기 위해서였다. 낯선 도시를 산책한 후 마시는 핫초코가 얼마나 달콤하던지. 찻잔을 들고 창밖을 바라보니 이 도시가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골목에 늘어선 작은 상점들을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분주한 도시의 표정과는 사뭇 달랐다. 그들은 더없이 평화롭고 행복한 일상을 살아가는 듯, 자연스레 미소 짓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한 모금의 핫초코를 마시며, 나는 라이 지도를 펼쳐보았다. 누군가가 손으로 그려놓은 모양의 지도에는 라이의 소중한 보물들이 빠짐없이 적혀 있었다. 하나씩 살펴보니 모두 우리가 하루 동안 마주한 곳이었다. 그 기억들이 고스란히 지도에 담겨 있는 듯해, 소중하게 접어 오래 간직하기로 했다.      


어느새 가방 안에는 여행의 흔적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라이로 가는 기차표, 머메이드 스트리트에서 주은 하트 모양의 돌멩이, 머메이드 여관에서 가져온 명함, 그리고 그림엽서와 작은 지도. 내게는 어느 하나 버릴 수 없는 소중한 추억들이었다.      



라이에서의 시간 또한 여느 여행과 다르지 않았다. 도시가 작든 크든, 여행을 혼자 하든 함께하든, 혹은 비가 오든 해가 뜨든, 낯선 도시들은 어느 하나 부족함 없이 저마다의 추억을 선물해 주었다. 그로 인해 여행의 흔적들은 내 마음속에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았고, 다시금 앞으로 나아갈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천천히 그리고 변함없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