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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아 Oct 28. 2022

요크, 중세 시대로 떠나는 기차를 타세요

YORK in UK - 눈감으면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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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부터 느낌이 좋았다. 요크행 기차에 오르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처음 가보는 요크셔 지방에 대한 기대 때문이기도 했지만, 실은 잊지 못할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하마터면 기차를 놓칠 뻔했기 때문이다. 출발 시간을 코앞에 두고 역에 도착한 탓에 플랫폼까지 전력질주를 해야 했다. 출발 1분 전, 저 멀리 보이는 기차의 역무원을 향해 간절한 눈빛을 보내며 티켓을 흔들었다. 제발 나를 데려가 주세요! 절실함이 가닿은 걸까. 기차는 전속력을 다한 나를 마지막 승객으로 맞이한 뒤, 1초의 지체 없이 플랫폼을 떠났다.     



간발의 차로 기차에 올라탄 행운의 날. 그 설렘을 간직한 채 요크역에 도착했다. 플랫폼에 걸린 요크 표지판을 보고 불현듯 뉴욕이 떠오른 건 우연이 아니었다. 뉴욕(NEW YORK)의 어원이 된 도시가 바로 요크(YORK)이기 때문이다. 요크 공작이었던 제임스 2세가 뉴욕을 정복한 뒤 자신의 이름을 따 새로운 요크라 불렀다. 흥미로운 건 두 도시의 특징이 전혀 반대라는 것. 뉴욕이 가장 새롭고 현대적이라면, 요크는 가장 예스럽고 역사적인 도시다. 그러니 오리지널 요크로 향하는 발길은 자연스레 호기심으로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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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튼 섬의 중앙,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잇는 길목에 위치한 요크는 철도의 요충지로도 유명하다. 요크역의 북적이는 활기를 마주하자 첫 일정이 명확해졌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또 다른 기차를 향해 달려갔다. 기차를 타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기 위해서였다. 목적지는 국립철도박물관. 요크역 바로 옆에 위치한 이곳은 철도 마니아들의 필수 성지다. 철도의 탄생지인 영국에서 꾸린 세계 최대 규모의 철도 박물관이라니! 그 수식만으로도 찾아갈 이유가 충분했다.      

 


박물관은 외양부터 철도의 기운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1877년 건설된 요크역의 차량기지를 개조해서 만든 박물관이어서 그럴까? 마치 특별한 기차역으로 초대받은 기분이 들었다. 그곳의 문을 열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기차에 올라탄 것 같았다. 종착역은 길고 긴 철도의 세계. 200여 년의 철도 역사가 추억을 가득 안고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메인 전시장인 그레이트홀은 거대한 플랫폼 같았다. 과거의 영광을 누렸던 역사적인 기차들이 이제 막 선로에 도착한 듯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세계 최고 속도의 증기 기관차 맬러드, 세계 최초의 고속 열차 신칸센 등 세계 기록을 보유한 기차들이 시공간을 넘어 한데 모여 있다니! 각기 다른 시대에서 출발한 기차 100여 대의 향연은 그 자체가 역사이자 인류의 발전 같았다.   



그중 가장 돋보이는 건 철도의 아버지인 조지 스티븐슨의 동상 앞을 지키는 샛노란 기차였다. 세계 최초로 승객을 실어 나른 증기 기관차 로켓호다. 선명한 노란색이 인상적인 로켓호는 리버풀과 맨체스터 사이를 오가며 증기 기관차의 역사를 이끌었다. 스티븐슨의 노고가 담긴 철도 역사의 출발점을 마주하니, 평소 무심하게 오르내렸던 기차들이 남다르게 느껴졌다. 기차 하나가 선로를 달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땀방울이 담겨있을까? 세상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건 없음을 새삼 실감한 순간이었다.      



전시장에는 철도만큼이나 인상적인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추억이었다. 단순히 철도를 전시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그와 맞닿은 모든 것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 옛날 기차표를 팔던 매표소와 중앙역에 서 있던 낡은 시계탑, 그리고 손때 묻은 수레 위에 쌓인 빅토리아 시대의 여행 가방들. 한 시대를 풍미한 기차를 바로 눈앞에서 마주할 뿐 아니라 플랫폼에서 그것을 타고 내리는 감정까지 경험할 수 있도록 구현해 놓은 것이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철도는 단지 인류 문명을 앞당겨준 차가운 기계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일상에 스며들어  약속을 지켰고, 추억까지 실어 나르지 않았던가. 이 박물관이 얼마나 섬세하게 철도의 세계를 완성했는지, 또 철도와 사람과의 교감을 얼마만큼 의미 있게 끌어냈는지,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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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의 세계에 흠뻑 빠지고 나니 모든 것이 그와 연결되었다. 그래서일까? 요크 시내로 향하는 길, 다시금 새로운 기차에 올라탄 기분이 들었다. 그 목적지는 영국의 중세 시대. 요크는 영국에서 중세 시대의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한 도시로 손꼽힌다. 이태리에 피렌체가 있다면, 영국에는 요크가 있다.      


시내 초입에 있는 뮤지엄 가든스에 들어서면 과거를 잊지 않는 요크의 특성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이곳은 여느 공원처럼 초록빛이 가득하지만, 허물어진 역사의 잔해가 어우러져 있어 요크만의 독자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13세기 고딕 양식으로 건축한 세인트 메리 수도원은 한때는 큰 번성을 누렸지만 1539년 헨리 8세의 해산 명령으로 문을 닫았다. 지금은 다 부서지고 벽만 남은 수도원의 흔적은 그 비어있는 공간만큼이나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사라져 가는 것을 잊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을 소중히 간직하려는 요크 사람들의 진심이 그 안에 가득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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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크의 중세 시대를 가장 가깝고 빠르게 만날 수 있는 지름길은 요크 성벽에 오르는 것이다. 4Km 달하는 요크 성벽은 도시 전체를 두 손으로 감싸 안으며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안내한다. 영국에서 가장 긴 중세 시대의 성벽인 데다, 로마 시대 하드리아누스 방벽의 흔적까지 찾아볼 수 있어 역사적인 의미가 큰 곳. 요크의 역사는 서기 71년 로마군이 주둔지를 세우며 시작되었는데, 한때는 바이킹의 수도로, 또 중세시대엔 잉글랜드의 군사적 요충지로 번영을 누렸다. 침략과 파괴, 재건을 반복하면서도 요크가 잊지 않은 것은 하나, 도시의 역사를 온몸에 고스란히 새기는 일이었다.      



성벽은 마치 기차선로처럼 하나의 방향으로 끝없이 이어진다. 스스로 기차가 된 듯 그곳을 따라가 보면 어느새 요크의 중세 시대가 현실이 되어 눈앞에 펼쳐진다. 성벽길은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길이지만, 그곳에서 보이는 요크는 단순한 풍경 그 이상이다. 성벽의 안과 밖으로 펼쳐지는 요크의 거리는 예스러움을 가득 품고 있어 마음을 이끈다. 참 신기한 일이다. 어떤 풍경에 과거의 시간이 듬뿍 담겨 있으면, 그만큼 눈앞이 아득해져 자꾸만 지나온 길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성벽을 따라 요크 한 바퀴를 돌면 2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구간은 요크 민스터가 가까이 보일 때였다. 로마 시대 폐허 위에 화려한 꽃을 피운 성당 요크 민스터는 영국 최대의 고딕 건축물이자 요크의 상징이다. 71m의 높은 첨탑을 자랑하기에 요크 시내 어디서 바라보아도 요크민스터의 존재감을 가득 느낄 수 있다. 그중에서도 성벽 너머로 보이는 요크 민스터가 가장 강렬한 빛을 내는데, 그와 어우러지는 도시의 크고 작은 풍경들마저 오직 요크 민스터를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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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사이에는 중세 시대부터 자리했던 성문들이 요크를 지키고 있다. 그중 가장 높은 성문인 몽크바로 내려와 중세 시대의 거리로 직행했다. 요크의 가장 유명한 골목길인 섐블즈 거리다. ‘도살장’이란 살벌한 뜻을 지닌 섐블즈 거리는 중세 시대부터 이어져 온 푸줏간 골목이다. 지금은 푸줏간이 모두 없어졌지만, 그 시절의 이색적인 풍경은 변함이 없다. 세월의 흔적이 물씬 느껴지는 목조 건물들은 하나같이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1층보다 2층이, 2층보다 3층이 더 튀어나와 있다. 이는 돌출된 건물 윗부분에 고기를 매달기 위함이었다.      


섐블즈 거리에 들어서면 그 기이한 건물 구조 덕분에 마법의 세상으로 빨려온 듯한 착각이 든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중세 시대란 역사적 배경만큼이나 이 거리에 유명세를 더해준 강력한 이름이 하나 더 있기 때문이다. 바로 해리포터! 영화 <해리포터>에서 호그와트로 떠나는 학생들이 마법 지팡이를 사기 위해 찾아온 다이애건 앨리의 모티프가 된 곳이 섐블즈 거리다. 그래서인지 섐블즈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표정은 마법 지팡이를 사러 온 호그와트의 학생들처럼 한껏 들떠 있다. 


그 틈바구니에 뒤섞여 과거의 푸줏간 대신 지금의 거리를 채우고 있는 아기자기한 기념품 가게들을 오갔다. 그리곤 마법의 지팡이는 아니지만 요크의 추억을 오랫동안 간직해줄 물건들을 하나둘 골라보았다. 요크의 오랜 성채의 흔적인 클리포드 타워 모양의 마그넷을 살까? 아니면 요크 민스터의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를 떠올리게 하는 유리컵을 하나 사야 할까?     



그러는 사이 시간은 자꾸만 흘러, 어느덧 기차역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요크에 가득 스며든 중세 시대의 매력에 푹 빠져, 좀처럼 발이 떨어질 생각을 않았다. 아무래도 출발 1분 전까지 요크에서의 시간을 꽉 채울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요크로 출발하는 기차를 탈 때도 그러했듯, 이곳을 떠나는 기차도 있는 힘을 다해 뛰어가면 가장 마지막에 올라 탈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돌아갈 때만큼은 한 번쯤 기차를 놓쳐도 그리 아쉽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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