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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아 Sep 09. 2022

브리스틀, 자유로운 청춘의 분출

BRISTOL in UK - 눈감으면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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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듯 ‘청춘’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된 것은 브리스틀의 공기 때문이었다. 곳곳마다 날 것 그대로의 청춘이 아름답게 흩뿌려져 있었으니까. 그만큼 도시의 첫인상은 강렬했다. 브리스틀에 도착한 순간, 에이번 강변에 삼삼오오 모인 청춘들이 기타를 치며 이름 모를 노래를 목이 터져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청춘의 노래는 브리스틀을 누비는 내내 끊임없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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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스틀은 그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나를 설레게 했다. 그 이유는 바로 영국 드라마 <스킨스> 때문이었다. 영국으로 떠나기 전, 매일 밤 영드를 보며 잠이 들었다. 낯선 나라와 가까워질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드라마 보기가 아닐까? 흥미로운 이야기와 더불어 그 나라의 언어, 일상, 트렌드, 유머 코드 등을 자연스레 마주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영드 속 주인공들이 친구처럼 느껴졌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걸 꼽으라면 단연 <스킨스>. 이 작품을 처음 알게 된 건 대학 시절, 친한 친구가 인생 드라마라며 강력 추천을 했었다. 꼭 봐야지, 봐야지, 다짐했지만 현실에 쫓겨 그냥 흘려보내고 말았다. 그러다 10년도 훌쩍 넘은 다음에야 뒤늦게 이 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시즌1이 2007년에 방영된 꽤 오래전 드라마지만, 지금 봐도 여전히 진한 여운이 전해졌다. 정말 친구 말이 꼭 맞았다. 재생 버튼을 누르는 순간 날 것 그대로의 청춘들에게 푹 빠져버렸다.



이 드라마는 뭔가 달랐다. 보통의 청춘 드라마는 특유의 풋풋함과 생기발랄함이 돋보이는데, <스킨스>는 그 반대였다. 마약, 가정폭력, 거식증 등 각기 다른 문제로 방황하는 청춘들의 단면을 보여주었다. 인상적인 건 매 편마다 등장인물 중 한 명에게 포커스를 맞추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것. 그 때문에 주인공들의 한없이 어둡고 우울한 이면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명 한 명이 소중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이렇듯 청춘은 위태롭고 불안하지만, 모두가 자신의 삶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주인공이었다. 토니, 시드, 미셸, 캐시... 그들이 웃고 울고 방황했던 거리가 브리스틀에 있다니!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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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스틀은 청춘을 가득 품고 있는 도시였다. 그래서일까? 평범함을 거부하고 독특한 지형으로 여행자의 도전 정신을 자극했다. 도시의 입구에서부터 저 멀리 브리스틀의 상징인 클리프턴 브리지까지 걷다 보면, 경사진 길이 끊임없이 나타나 하늘을 올려다보게 만든다. 덕분에 산 하나를 등반하는 기분이랄까. 실제로 이 도시의 제일 낮은 곳과 높은 곳의 고저 차가 107m 정도로, 건물 약 30층의 높이만큼의 차이가 난단다.    


       

브리스틀의 경사진 길을 가장 먼저 체감할 수 있는 곳은 파크 스트리트. 입구에서 바라보면 길게 뻗은 오르막길이 멋진 장면을 선사하는데, 그 끝에는 중세 고딕 양식의 브리스틀 대학이 우뚝 서 있어 더욱 특별하다. 파크 스트리트는 풍경 자체로도 매력 있지만, 그것을 더욱 빛나만드는 이유가 두 가지 더 있다.      

          

하나는 <스킨스> 덕후들의 성지라는 것. 시즌 2의 첫 장면은 프레디가 위험천만하게 경사진 도로에서 스케이트 보드를 타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그곳이 바로 파크 스트리트다. 흥미로운 건, 실제로 그곳에서 프레디를 닮은 남학생이 스케이트 보드를 타며 스릴을 즐기고 있었고, <스킨스>의 주인공처럼 톡톡 튀는 청춘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거리 자체가 한 편의 청춘 드라마 같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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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크 스트리트가 특별한 두 번째 이유는 바로 뱅크시의 그라피티. 얼굴 없는 예술가인 뱅크시는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그라피티 작가다. 그라피티는 낙서에 불과하다는 세간의 편견을 과감히 깨부수고, 이를 통해 관습과 권력, 그리고 자본주의 등을 비판하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브리스틀은 그의 고향인 만큼, 날 것 그대로의 작품들을 마주할 수 있어 더 반갑다.    


            

영국 서부에 있는 항구 도시 브리스틀은 힙스터 문화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는데, 그 핵심에는 뱅크시가 있다. 뱅크시 투어가 따로 있을 만큼, 보물찾기 하듯 오래된 골목마다 그려진 뱅크시의 작품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브리스틀의 멋에 푹 빠지게 된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파크 스트리트에 있는 <Well Hung Lover>다. 불륜을 소재로 뱅크시 특유의 재치와 기지를 표현한 것이 특징인데, 불륜을 들키지 않으려고 가까스로 창밖에 매달려 있는 남자의 모습이 재미있다. 이렇듯 거리 곳곳에 가득한 그라피티가 청춘의 기발한 감각을 고스란히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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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크 스트리트를 오르면 숨을 고를 새도 없이 또 다른 오르막길의 등장이다. 가장 높은 곳에서 브리스틀의 매력을 한눈에 담기 위해 브랜든 힐로 향했다. 넓게 펼쳐진 푸르른 들판과 카봇 타워가 우뚝 솟은 브랜드 힐. 카봇 타워는 15세기 북미대륙을 발견한 카봇을 기념하여 지어진 것으로 브랜든 힐의 꼭대기에 위치해 있다. 타워의 계단을 따라 정상에 오르면 브리스틀 시내를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찬찬히 한 바퀴를 돌며 브리스틀을 내려다보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청아한 풍경을 펼친다.   


브랜드 힐은 청춘들의 아지트로 북적이고 있었다. 동그랗게 둘러앉아 파티를 벌이는 이들, 비트 있는 음악에 맞춰 스트리트 댄스를 추고 있는 이들, 들판에 누워 오후의 햇빛을 한껏 즐기고 있는 이들, 혼자 조용히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이들. 다양한 청춘의 일상이 그곳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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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봇 타워 앞에는 고즈넉한 나무 벤치들이 놓였는데, 이곳에 앉아 브리스틀을 내려다보는 것도 꽤 낭만적이다.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벤치이지만, 이 또한 <스킨스>의 촬영지로 사람들의 발길을 붙드는 곳이다. 마음의 병을 안고 살아가는 캐시는 짝사랑하는 시드에게 바람을 맞고 난 뒤 이곳을 찾는다. 그리고 극단적인 결심을 한 뒤 이 벤치 위에 올라가 빙글빙글 돈다. 그녀가 어지럽게 돌며 휘청거릴 때 브리스틀의 풍경도 아지랑이처럼 흔들렸다. 그때 캐시가 마주했을 풍경들을 직접 눈에 담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한없이 슬펐던 그 순간, 캐시는 브리스틀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만끽하고 싶었던 것일까?               



드라마에서는 캐시가 브리스틀을 내려다보며 고군분투하고 있었지만, 현실에서는 청춘들이 저마다의 벤치에 앉아 고뇌하는 얼굴로 책과 세상을 음미하고 있었다. 어떤 글을 읽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의 머리와 마음속에 뜨거운 생각들이 끊임없이 요동치고 있으리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책장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브리스틀의 풍경을 내려다보는 그들의 뒷모습이 여름의 햇살보다 더 붉어 보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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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힐을 지나 또다시 언덕길. 인생의 구비구비 같은 길을 지나 여행의 종착지가 어느새 반짝 빛나고 있었다. 브리스틀의 랜드마크인 클리프턴 현수교였다.


브리스틀에는 매년 열기구 축제가 열리는데, 클리프턴 현수교를 배경으로 하늘로 오르는 색색깔의 풍선들이 장관을 연출한다. 그림엽서에서 보았던 그 풍경이 늘 궁금했는데, 막상 눈앞에 마주하자 ‘와’ 하고 탄성이 터져 나왔다. 유유히 흐르는 에이번 강 위 75m 높이에 414m 길이로 펼쳐진 다리의 모습이 기대보다 훨씬 더 근사했기 때문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기술자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의 설계로 1864년 완공되었다는 이 현수교는 비현실적인 풍경처럼 절벽 위에 아찔하게 세워져 있었다. 1800년대에 이렇게 특별한 모양의 다리를 만들었다니, 놀라웠다. 평소 고소공포증 때문에 높은 곳에 서 있지 못하지만, 이번엔 용기를 내어 현수교를 건너보기로 했다. 한 발 한 발 내디딜수록 에이번강의 풍경이 더욱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지만,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풍경을 볼 수 있었기에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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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의 끝에 도착하자 하늘 위로 클리프턴 전망대가 있는 언덕이 올려다보였다. 어김없이 그곳에서도 브리스틀의 청춘들이 모여 오후의 한때를 즐기고 있었다. 클리프턴 전망대는 현수교가 가장 아름답게 내려다 보이는 곳. 열정의 청춘들이 그 멋진 풍경을 놓칠 리가 없었다. 한편으론 그들의 눈에 가득 담겨 있는 현수교 안에 내가 서 있다고 생각하니 뭉클했다.


누가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 그에 따라 풍경은 저마다의 마음속에 특별하게 담긴다. 그래서일까? 현수교에서 올려다본 클리프턴 전망대도 아름다웠지만,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청춘들로 인해 그 풍경이 더 짙고 강렬하게 보였다. 그리고 가만히 클리프턴 전망대를 올려다보고 있으니, 마음속에 작은 불꽃 하나가 피어올랐다. 나도 저 청춘의 풍경 속으로 한껏 뛰어들어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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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표를 집어던지고, 순간에 몸을 맡기는 것이 바로 청춘의 매력! 내가 좋아하는 <스킨스>의 대사를 떠올리며, 다시 신발 끈을 질끈 묶었다. 오르고 또 오르고, 또다시 높은 곳을 향해.


"I'll do it my way. And the people that love me will understand why I'm doing it. because they love me."


"난 내 방식대로 할 거야.

그리고 날 사랑하는 사람들은 내가 왜 그걸 하고 있는지 이해할 거야

왜냐하면 그들은 날 사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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