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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아 Aug 30. 2022

리버풀, 하루 종일 비틀스

LIVERPOOL in UK - 눈감으면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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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운이 좋은 편이다. 적어도 여행에서만큼은 그렇다. 맑을 확률은 95퍼센트. 떠나는 날 아침, 어김없이 쨍쨍하게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스스로 뿌듯했던 적이 많았다.      


하지만 오히려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비가 왔던 도시들이었다. 내 날씨 운이 허무맹랑한 주장이었다는 걸 확인하는 동시에 비 오는 날의 여행이 꽤나 낭만적이란 걸 몸소 깨닫기 때문이었다.



리버풀도 그중 하나였다. 하늘에서 온종일 비가 왔다. 항구 도시에 비가 내리니, 세상이 온통 흠뻑 젖은 기분이다.      


보통 영국의 비는 미스트처럼 흩뿌리듯 떨어지는데, 거센 바람까지 함께 불어와 우산을 드는 게 더 번거롭게 느껴진다. 그래서 영국 사람들이 우산 대신 버버리 코트의 옷깃을 세우며 당당히 비에 맞서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리버풀의 빗방울은 제법 굵었다. 추적추적. 비를 피할 곳을 찾아 서둘러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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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로 떠나기 전, 잊지 않고 한 일이 하나 있었다. 비틀스의 노래를 다운받는 것!

비틀스가 탄생한 도시에서 그들의 노래를 들으며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여행이 될 테니까.

      

어떤 노래를 들을까?     


폴더를 뒤적이다 비틀스의 ‘Rain’을 골랐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와 함께 울려 퍼지는 비틀스의 경쾌한 리듬이 발걸음을 가벼이 만들었다.



리버풀을 찾는 여행자 중 9할은 오직 ‘비틀스’를 보기 위해서다. 물론 실존하는 비틀스를 만날 수는 없지만, 그들의 모든 것이 도시 곳곳에 빠짐없이 스며들어 있다. 심지어 공항부터 남다르다. 리버풀 공항은 비틀스의 리더 존 레넌을 기리기 위해, ‘리버풀 존 레넌 공항’으로  2002년 새롭게 이름을 달았다. 공항의 로고도 존 레넌의 자화상이고, 슬로건도 ‘Imagine’의 가사인 ‘Above Us Only Sky’인데, 이렇듯 영국에서 특정 인물의 이름을 따 공항을 칭하는 것은 리버풀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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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거리를 따라 걷다 보니 곧 매튜 스트리트에 도착했다. 비틀스 팬이라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비틀스의 흔적을 하나씩 발견하는 재미로 가득한 곳이다. 입구에서부터 비틀스의 이름이 새겨진 현수막이 비에 젖어 나풀거리고 있었다.

     

거리는 발길 닿는 곳마다 비틀스의 다채로운 모습을 선보였다. 비틀스 노래로 이름을 딴 ‘Hard Days Night’

호텔은 110개 객실이 모두 비틀스와 관련된 테마로 꾸며져 있어 유명한 곳이다. 30년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더 비틀스 숍’은 밴드와 관련된 다양한 기념품으로 가게를 채우고 있었다. 상점 입구에 세워진 비틀스 동상은 리버풀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것이라 더 의미 있다. 또 다른 골목으로 접어들면 뮤지컬 비틀스 뮤지엄이 있는데, 창문마다 다른 색깔로 멤버들의 얼굴을 그려놓아 눈길을 끈다.     



매튜 스트리트의 끝자락에 다다랐을 땐, 생각에 잠긴 듯 비스듬히 서 있는 존 레넌의 동상을 마주할 수 있었다. 비틀스가 처음으로 무대에 올랐다는 캐번 클럽 앞이다. 이곳은 1961년부터 1963년까지 비틀스가 총 292회 공연을 하며, 음악 팬들의 성지가 된 장소다. 1957년 앨런 시트너가 파리의 재즈 클럽에 영감을 얻어 제2차 세계대전 중 방공호로 사용된 지하실을 클럽으로 만들었다.   



당시 17세였던 존 레넌은 자신의 밴드 ‘더쿼리맨’과 함께 무대에 올랐고, 이후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등과 새 그룹을 결성해 5파운드를 받고 목욕일 점심마다 런치 세션 공연을 선보였다. 이때 그들의 공연을 인상 깊게 지켜본 남자가 있었으니, 바로 브라이언 엡스타인. 이후 비틀스의 매니저로 이름을 알린 이다.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그들과 매니지먼트 계약을 체결하고, 드러머 링고스타를 영입해 비틀스를 전폭적으로 지지해주었다. 그런 만큼, 캐번 클럽은 로큰롤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장소였다. 나아가 1999년 12월 14일, 폴 매카트니가 자신의 20세기 마지막 공연 장소로 캐번 클럽을 선정했으니, 이 장소가 비틀스에게 얼마나 큰 상징성을 지니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카메라를 꺼내 캐번 클럽 앞 존 레넌 동상을 앵글에 담았다. 찰칵찰칵. 빗속에서 열심히 셔터를 누르는데, 또 다른 셔터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를 질끈 묶고 큰 배낭을 멘 동양인이었는데, 나처럼 혼자 리버풀을 찾은 여행자로 보였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곳을 찾아온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도 비틀스를 좋아하는 게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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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튜 스트리트를 빠져나와 리버풀의 끝자락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비에 흠뻑 젖어 더 운치 있는 알버트 독이 자태를 드러냈다. 한쪽에 커다란 관람차가 돌아가고 있는 빗속의 알버트독은 리버풀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대영 제국의 해양무역 도시로 명성을 쌓았던 리버풀. 1845년 2월 첫 배를 띄운 알버트독은 80여 년 동안 유럽 최고의 항구도시 리버풀의 부흥을 이끌었다. 그 유명한 비운의 타이타닉호도 리버풀 조선소에서 만들어졌고, 이곳에서 출항을 했다. 비록 화려한 과거는 사라졌지만, 지금의 알버트 독은 머지강을 품으며 유일무이한 경치를 자아내는 문화예술공간으로 제2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알버트독은 ‘ㅁ’자형으로 접안 공간을 완전히 감싸는 형태가 특징인데, 이런 모양을 시도한 최초의 독이라 더 인상적이다. 성처럼 항구를 둘러싸고 있는 옛 항만 창고 건물에는 특색있는 공간들이 차곡차곡 채워져 있어 어느 하나 놓치고 싶지 않았다. 현대미술의 메카인 테이트 리버풀, 1715년부터 지금까지 리버풀 항만의 역사를 담은 머지사이드 해양박물관, 국제노예박물관, 그리고 하이라이트는 리버풀에서 가장 유명한 명소인 비틀스 박물관 ‘비틀스 스토리’를 차례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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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촉이 젖은 알버트독의 정취를 뒤로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비틀스 스토리 뮤지엄으로 들어갔다.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완연한 비틀스의 세계였다. 멤버들의 유년 시절부터 시작해, 밴드를 결성하고, 최고의 밴드로 전설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하나씩 테마로 엮어 이야기처럼 풀어낸 것이 인상적이었다. 시기별로 구성된 이 길을 따라 찬찬히 나아가 보니, 마치 비틀스의 인생 속에 들어와 함께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비틀스 스토리 뮤지엄은 하루 종일 있어도 지루할 틈이 없어 보였다. 비틀스에 관한 진기한 자료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멤버들의 고등학교 졸업 앨범, 음악을 처음 시작할 때 사용했던 악기와 녹음테이프 등 비틀스가 탄생하기 이전의 역사가 한자리에 보물처럼 모여 있었다.      


비틀스의 전신인 더쿼리맨 시절 공연했던 카스바 클럽, 비틀스의 진가를 발견하게 해 준 캐번 클럽, 명반을 녹음했던 애비로드 스튜디오 등 비틀스가 거쳐 온 공간들이 그대로 재현되어 흥미를 더하였다. 그들이 미국 순회공연을 위해 탔던 비행기 좌석이나, 대표곡이자 그들의 상징인 노란 잠수함 모형까지 설치해 비틀스의 완벽한 세상을 꾸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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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상적인 건 1980년 세상을 떠난 존 레넌을 기리는 ‘하얀 방’이었다. 비틀스 스토리 뮤지엄의 맨 마지막 방이자, 1971년 발표된 그의 솔로곡 ‘Imagine'의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하얀 방을 그대로 옮겨놓은 공간이었다. 흘러나오는 그의 음악 소리와 함께 티 없이 맑은 방을 바라보고 있으니, 오직 나와 비틀스만이 세상에 남은 기분이었다. 이렇듯 음악이란 매개체 하나로 영원히 그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비틀스의 세계에 푹 빠져 한참 동안 하얀 방 앞에 머물렀는데, 꼭 나처럼 발길을 떼지 못하는 이를 발견하게 되었다. 옆모습이 낯이 익어 가까이 다가가 보니, 조금 전 캐번 클럽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던 그 여행자였다. 우리는 서로 눈이 마주쳐 미소를 지었다. 하얀 공간 안에서 느껴지는 편안한 분위기 때문인지, 친근하게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그녀는 태국에서 온 대학생이었고, 유럽 배낭여행 중에 비틀스를 보러 리버풀을 찾았다고 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곡이 ‘Imagine’이라 지금 이곳에 있는 게 무척 행복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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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음악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은 때론 그 무엇보다 끈끈한 친밀감을 형성해준다. 비틀스의 노래를 들으며 만난 낯선 여행자와의 만남도 그랬다. 우리는 똑같은 목적으로 이곳을 찾았고, 비틀스의 노래를 따라 같은 여정으로 리버풀을 누볐던 거다. 서로가 어떻게 자라고 어떤 삶을 향해 나아가는지 잘 알지는 못하지만, 하나의 취향을 공유하고 있었기에 평소 알아 온 친구처럼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친구는 음악처럼 서로 통하는 법. 하얀 방을 나선 우리의 다음 일정은 데칼코마니처럼 정확히 일치했다. 알버트 독에 있는 비틀스의 동상을 찾아 인증샷을 찍고, 그 앞에 꽃을 놓아둘 계획이었다. 여전히 리버풀 거리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마음은 더 포근해져 왔다. 비틀스를 향한 즐거운 여정에 동행자가 생겼기 때문일까?



나처럼 비틀스를 좋아하는 그 친구와 함께 알버트 독으로 향하는데, 어디선가 또 음악 소리가 들렸다. 귀를 기울이니, 비틀스의 ‘Yesterday’였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이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 음악을 들으며 서로 다른 추억을 머릿속에 떠올렸을 테지만, 가슴속에 피어오른 설렘은 같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바로 음악의 힘일 테니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언제나 좋아했던 비틀스의 노래들을 따라 부르며, 그들이 걸었을 비 오는 리버풀을 음악처럼 온몸으로 즐겼다.


A dream you dream alone is only a dream

A dream you dream together is reality      


혼자 꾸는 꿈은 단지 꿈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 사람과 함께 꾸는 꿈이 현실입니다.

-존 레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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