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 여행의 묘미는 무궁무진하다. 이국적인 창밖 풍경에 넋을 잃기도 하고, 옆자리 누군가와 친구가 될 수도 있다. 간식도 기차에서 먹으면 더 꿀맛. 칙칙폭폭 소리와 함께 양들이 뛰노는 들판이 펼쳐질 때, 감자칩을 뜯어 한입에 쏙 넣으면 오감의 즐거움 또한 누릴 수 있다. 게다가 그 기차가 바다로 향하는 중이라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헤이스팅스로 가는 길이 유독 설렌 이유도 기차 덕분이었다. 영국의 남쪽 이스트서식스주에 위치한 작은 해안마을 헤이스팅스. 번잡한 대도시의 소음에 지칠 때면 늘 바다를 품고 있는 소도시가 그리웠다. 더욱이 헤이스팅스는 조금은 색다르게 바다를 볼 수 있어 특별한 곳. 푸니쿨라를 타고 푸른 언덕에 오르면 눈앞에 끝없는 바다가 펼쳐진다니! 이 또한 어떤 설명이 더 필요할까?
헤이스팅스의 바다를 상상하며, 서둘러 기차표를 예매했다. 영국의 기차표는 일찍 선점할수록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다. 런던과 헤이스팅스 왕복 기차표를 11파운드에 득템한 뒤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갑자기 훌쩍 떠나는 여행도 낭만적이지만, 미리 정해놓은 여행도 그만의 멋이 있다. 하루하루 헤이스팅스에 더 가까워지는 기분이었으니.
헤이스팅스로 향하는 기차는 영화의 예고편 같았다. 왁자지껄한 도심을 벗어나 고즈넉한 시골길을 따라가더니, 마침내 꾹 참았던 비밀을 터트리듯 단번에 바다를 펼쳐주었다. 창밖으로 넘실대는 바다는 오늘 하루가 얼마나 기억에 남을지 미리 알려주는 속삭임 같았다.
역에 도착하자마자 눈앞에 보이는 인포메이션 센터로 직행했다. 현지인들이 알려 주는 고급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서다. 헤이스팅스에서 태어나 자랐다는 베테랑 직원은 나만 믿으라는 듯 자신감에 꽉 차 있었다. 그리곤 지도 한 장을 펼치더니 능수능란하게 빨간펜을 들고 곳곳에 별표를 그리기 시작했다. 결론은 역에서 나와 보이는 오른쪽 오르막길로 올라간 다음 바다를 앞에 두고 큰 원을 그리고 내려오면 된다는 것. 길을 잃지 않고 가장 현명하게 헤이스팅스를 완주할 수 있는 코스란다.
그녀는 문 앞까지 따라 나와 친절하게 내가 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덧붙인 인사 한 마디.
헤이스팅스와 사랑에 빠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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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스팅스를 여행할 때 필요한 건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튼튼한 두 다리. 마을이 크지 않아 버스를 타지 않아도 웬만한 곳은 걸어갈 수 있었다. 그러니 체력은 필수다.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고 씩씩하게 오르막을 올랐다. 천천히 걸으니 보이는 것도 많았다. 비밀의 숲 같은 오솔길도, 작은 놀이동산도 보였다. 숨이 꽤나 차오르고 제대로 가는 게 맞나 의심될 때쯤 언덕 아래로 바다가 내려다 보였다. 덕분에 의심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오르막길의 목적지는 헤이스팅스 박물관이었다. 빨간 벽돌로 장식된 고풍스러운 2층 건물. 박물관과 아트 갤러리를 겸하고 있는 이곳은 도시의 특징을 꼭 빼닮았다. 규모는 작지만 속이 꽉 차있기 때문이다.
그곳엔 헤이스팅스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옛날 노르만 왕조의 시작을 있게 한 헤이스팅스 전투부터 시작해 1900년대 초 헤이스팅스 피어의 일상, 헤이스팅스 출신 작가의 최근 사진전까지. 한 바퀴를 돌고 나니 어느새 도시의 과거, 현재, 미래를 다 만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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튼튼한 다리로 동네를 거닐다 보면 헤이스팅스 여행에서 두 번째로 필요한 게 무엇인지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바로 바다를 사랑하는 마음이다. 마을의 오르막길을 걷든 내리막길로 향하든 바다는 언제가 그 자리에 머물렀다. 그러니 마음만 먹으면 어디서든 제각각의 풍경과 어우러지는 바다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바다를 사랑하는 만큼 더 다채로운 풍경을 마음에 담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바다로 향하는 내리막길에 들어섰을 땐, 지도를 고이 접어 가방에 넣었다. 이제부터 길은 한 방향이었다. 한없이 펼쳐진 바다를 표지 삼아 걸어가면 될 테니. 금세 내리막길이 끝나고 해변에 도착했을 때 비로소 바다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해변은 자갈로 이루어졌고, 밟을 때마다 바스락 바스락 소리가 났다. 쉽게 부서지고 마는 모래사장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 그래서인지 헤이스팅스의 바다는 강인해 보였다. 신기하게도 해변을 찾은 이들 또한 바다와 많이 닮아 있었다. 누군가는 혼자 낚시를 하고, 또 누군가는 홀로 바닷물에 발을 적시며 자갈길을 걸어 나갔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헤이스팅스 사람들의 ‘잊지 않음’이었다. 해변을 걷다 피셔맨 뮤지엄에 다다랐을 때, 느낄 수 있었다. 검은 외벽의 오두막과 회갈색 벽돌 건물로 이루어진 피셔맨 뮤지엄. 그 안으로 들어가니 커다란 배가 정박해 있고, 그 주위로 어부의 삶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헤이스팅스는 해안 마을인 만큼 곳곳에 수많은 어부들의 숨결이 살아 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의 발자취를 느끼고 경의 할 수 있는 공간을 바다 앞에 만들어 놓았다니! 이 자체가 헤이스팅스의 정체성을 더 돋보이게 만들어 주었다. 바다를 잊지 않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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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스팅스의 바다를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선 꼭 거쳐야 할 관문이 있다. 바로 해변과 멀어질 결심을 해야 하는 것. 물론 해변에서 바라보는 바다도 충분히 아름답지만, 마을 언덕에 올라야 헤이스팅스의 시그니처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이스트힐과 웨스트힐. 두 개의 언덕 중 마음 가는 곳을 따라 오르면, 어느 곳에 서있든 끝없이 바다를 눈에 담을 수 있다.
나는 피셔맨 뮤지엄 앞에 있는 이스트힐을 골랐다. 해변을 걸을 때 저 멀리 이스트힐이 눈에 띄었는데, 푸니쿨라가 오르내리는 모습이 동화처럼 환상적이었다. 1902년부터 오랜 세월 마을을 지켜온 푸니쿨라. 끼이익 둔탁한 기계음을 내며 출발한 푸니쿨라는 이스트힐에 가까워질수록 진가를 발휘했다. 이상하게 바다와 멀어질수록 지금껏 보지 못한 바다의 모습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스트힐에 오르니 바다와 하나가 된 헤이스팅스의 색채가 더욱 두드러졌다. 작은 해안마을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빨간 집, 분홍 집, 노란 집, 그리고 초록 언덕과 파란 바다가 한 편의 이야기로 어우러졌다. 파도를 견디며 꿋꿋이 오늘을 쌓아 올린 헤이스팅스의 지난날이 그 안에 가득 담겨 있는 듯.
하루 종일 봐도 질리지 않을 풍경에 한 번 푸니쿨라를 타고 언덕에 오른 이들은 좀체 내려갈 생각을 않았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언덕의 어귀마다 바다의 풍경이 변모하니 좀처럼 그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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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기차역으로 향하는 길, 나를 배웅해 준 곳은 올드타운이었다. 이름처럼 마을의 옛 정취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곳. 16세기부터 자리를 지킨 가장 오래된 펍부터 보물찾기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골동품점과 헌책방까지, 다채로운 상점들이 즐비해 눈을 즐겁게 만들었다. 또한 올드타운 중간엔 웨스트힐로 가는 푸니쿨라가 있어 다시 한번 바다로 향하고 싶은 여행자의 마음을 흔들었다. 정말인지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칠 수 없는 마을이었다.
큰 원을 그리며 헤이스팅스 한 바퀴를 돌고 나니, 약속처럼 기차역이 나타났다. 떠나야 할 시간이지만, 아직 여행이 완연히 끝난 것은 아니다. 잊지 말아야 기차 여행의 묘미. 아직 한 번 더 바다를 볼 기회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도착하기 전 그러했듯 떠난 뒤에도 창밖으로 헤이스팅스의 바다가 펼쳐질 것이다. 그 순간을 기다리니, 떠나는 아쉬움보다는 다시 만날 반가움이 더 커졌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떠날 때의 풍경은 처음보다 더 푸른빛을 낼 것이다. 창밖으로 펼쳐질 바다는 오늘의 추억을 가득 담고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