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NDSOR in UK - 눈감으면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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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하루를 변화시키는 방법은 새로운 길을 따라 산책에 나서는 것.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시간의 온도가 딱 좋다. 매일 달라지는 하늘의 색과 노을빛에 반사되는 낯선 동네 풍경, 활기차게 조깅을 하는 사람들과 덩달아 신이 난 강아지들, 그 사이를 걷다 보면 어느새 오늘 하루도 괜찮았다는 작은 위안을 얻곤 한다.
윈저를 걸을 때도 그랬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산책로처럼 잘 꾸며진 윈저. 어느 길을 택해도 흥미진진해 걷는 즐거움이 유독 컸다. 온종일 걸었지만 다리 아픈 줄도 몰랐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건 푸른 들판 사이로 한없이 펼쳐진 산책길 롱워크. 이렇게 말하면 도시의 트레이드마크인 윈저성이 서운할 테지만, 자연이 전하는 에너지를 무엇이 이길 수 있을까? 윈저성을 빠져나와 더그레이트파크로 향하는 길, 롱워크는 마치 내 앞에 놓인 인생길처럼 끝을 알 수 없어 더욱 발길을 끌었다. 로열패밀리의 산책길다운 웅장한 아우라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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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저역에 도착하자 여왕의 흔적들이 나를 반겼다. 작은 플랫폼 앞에 자리하고 있는 검은색 기관차. 기품 있는 왕실 문양이 새겨진 열차의 이름은 바로 ‘여왕호’였다. 그레이트 웨스턴 철도 클래스 증기 기관차 3041을 그대로 본뜬 모형이었다. 18세기 영국의 산업혁명을 이끈 원동력은 증기 기관차. 빅토리아 여왕은 윈저와 런던을 오갈 때 이 열차를 탔다. 그로 인해 1842년 최초로 기차를 이용한 영국의 군주로 기록됐다.
윈저는 영국 왕실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품고 있는 곳이다. 그 대표적인 상징은 도시의 한가운데 굳건히 자리하고 있는 윈저성. 런던의 버킹엄 궁전, 에든버러의 홀리루드 하우스 궁과 함께 영국 왕실의 공식 거주지 중 하나다. 실제 사용되고 있는 성채 중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되었다. 윈저성의 위엄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건 그 앞에 서 있는 빅토리아 여왕의 동상. 대영제국의 기틀을 다지며 빅토리아 시대를 열었던 불멸의 여제. 그 업적만큼이나 고귀한 자태로 오늘날에도 윈저를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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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저는 활기로 가득 찬 도시였다. 고향의 역사에 남다른 자부심을 지닌 현지인들은 위풍당당하고, 윈저성을 보기 위해 한걸음에 달려온 여행자들의 눈은 반짝거린다. 이들의 어우러짐이 윈저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는데, 그 덕에 골목마다 고풍스러운 생기가 넘쳐났다.
거리의 활력은 언제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그 까닭에 단숨에 성문을 넘는 뻔한 코스보다는 먼저 성 밖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여행자가 아닌 산책자로 변모해 윈저만의 분위기를 음미하고 싶어서다. 두 발로 도시의 이모저모를 알아가다 보면 드디어 윈저성으로 들어가는 감흥 또한 배가 될 테니.
윈저성을 끼고 곡선으로 이어진 내리막길을 걸었다. 길을 따라 관광객들을 손짓하는 기념품 가게와 레스토랑들이 연이어 등장했다. 묘한 길이었다. 윈저성의 높은 성벽을 올려다보며 내리막길을 걸으니, 윈저성은 더욱 웅장해지고 나는 점점 작아졌다. 그 자리에 흐르는 세월의 깊이를 생각하니 더욱 그러했다.
윈저성의 시작은 무려 107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윌리엄 1세가 템스강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언덕에 성을 쌓아 올린 것. 이후 1165년 헨리 2세가 석조로 개축, 1820년 조지 4세가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탑을 높이 쌓아 지금의 모습으로 개조했다. 900여 년의 역사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동안 40여 명의 왕이 바뀌었고, 백년전쟁과 워털루 전쟁, 그리고 1,2차 세계 대전의 혼란을 꿋꿋이 견디면서도 윈저성의 위엄은 건재했다. 그만큼 단단한 시간의 뿌리가 내리워진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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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막길이 끝나면 이내 템스강 위를 떠다니는 순백의 백조들이 나타난다. 푸른 강을 하얗게 적시는 백조 무리가 남다르게 느껴지는 건 이들이 왕실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 12세기부터 영국 군주가 소유하기 시작했다는 백조. 지금도 특별한 소유권 표시가 없는 백조는 모두 왕실의 자산이다. 그에 따라 영국 왕실은 매해 백조의 개체수를 관리하는 스완 어핑 조사를 한다. 붉은 재킷을 입고 백조 깃털을 단 조사 요원들이 매년 템스강이 흐르는 지역에서 백조를 한 마리씩 들어 올리며 개체수를 파악한다. 영국에서만 볼 수 있는 이색적인 풍경이다.
백조가 흐르는 템스강의 경치를 따라 윈저 브리지를 건너면, 영국적인 색채로 뒤덮인 작은 마을 이튼에 도착한다. 영국 깃발이 휘날리는 고풍스러운 거리. 그 클래식함에 끌려 마을 깊숙이 들어가 보면 생경한 광경과 마주하게 된다. 골목 어귀마다 하얀 남방에 뒷부분이 길게 늘어진 검은색 연미복을 차려입은 남학생들이 하나 둘 등장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연미복을 휘날리며 자전거를 타고 또 누군가는 한쪽 팔에 두꺼운 책을 잔뜩 끼고 걸어간다. 모두가 굳은 약속을 한 듯 연미복을 입은 남학생들이 거리를 채우고 있으니, 스스로가 더욱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마치 해리포터의 호그와트 속으로 빨려 들어온 기분이랄까.
때마침 눈앞에 사진관 하나가 보였는데, 창가에 연미복을 입은 학생들의 졸업사진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국적을 불문하고 졸업을 앞둔 학생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들뜨고 상기되어 있어 더 환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액자 속에 ‘이튼 칼리지’란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제야 연미복 군단의 정체가 드러났다. 말로만 듣던 600년 전통의 명문 이튼 칼리지의 학생들이었다.
1440년 헨리 6세가 설립한 이튼 칼리지는 지금까지 19명의 영국 총리를 배출한 유서 깊은 학교다. 로열패밀리인 윌리엄 왕세손과 해리 왕자도 다이애나비의 손을 잡고 이곳을 입학해 학창 시절을 보냈다. 교정 안으로 들어갈 순 없지만, 먼발치에서나마 명문의 분위기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역사가 고스란히 묻어있는 건물들도 아름다웠지만 더 눈길이 가는 건 따로 있었다. 13세부터 18세까지 청운의 꿈을 품고 있는 학생들. 그들의 맑은 미소와 초롱초롱한 눈빛은 한 번만 봐도 쉬 잊히지 않는 인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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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저 산책의 절정을 누리기 위해 윈저성에 다다랐다. 영국 왕실의 살아있는 역사 그 자체인 윈저성. 지금의 왕실이 '윈저 가문'인 것 또한 이 성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그만큼 가장 영국적인 아이덴티티를 보여주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성 내부는 크게 어퍼 워드, 미들 워드, 로어 워드로 나뉜다. 성의 가장 깊숙한 부분에 있는 어퍼 워드는 영국 왕실의 거처가 있는 곳. 성에서 가장 볼거리가 많은 스테이트 아파트먼트에는 퀸 메리의 인형관이 인기다. 건축가 에드윈 루티엔스가 당대 최고의 예술가와 장인을 동원해 3년에 걸쳐 만든 미니어처의 천국. 전기로 켜지는 조명과 실제로 작동되는 엘리베이터. 작은 세상은 현실보다 더 실감 난다. 또한 작은 도서실에 있는 200여 권의 장서는 서머셋 모옴, 코난 도일 등 당대 유명 작가들에게 요청해 그들의 자필로 쓰인 것. 단순한 인형의 집이 아니라 섬세한 예술 작품의 집합소처럼 보였다.
미들 워드는 성의 상징인 둥근 탑이 있는 곳. 평상시에는 영국 국기가 게양되지만, 국왕이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왕실기로 바뀐다.
로어 워드에는 왕실 예배당인 세인트 조지 교회가 자리한다. 영국 고딕 양식을 대표하는 건축물로, 아름다운 외관을 자랑하는 성공회 왕실 교회다. 세인트 조지 성당을 마주하면 자연스레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떠오른다. 여왕은 대부분 주말과 여름휴가를 윈저성에서 보냈고,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에도 이곳 성당 예배에 참석해 뜻깊은 날을 기념했다. 윈저성에 깊은 애정을 보인 여왕은 마지막 길 또한 이곳을 택해, 조지 6세 기념 예배당 지하에 영원히 잠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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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저 산책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에 등장했다. 첫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탄성이 나오는 롱워크다. 윈저성과 더그레이트파크를 이어주는 산책로인 롱워크는 이름 그대로 기다란 길이다. 자그마치 5km에 달하는 거리로, 끝에서 끝까지 걸어가는데 1시간 반이 넘게 걸린다.
길 양쪽에는 초록빛의 잔디밭과 나무들이 펼쳐져있고, 한중간에는 직선으로 곧게 뻗은 길이 끝없이 이어졌다. 화려한 장식이 없음에도 길은 정말 아름다웠다. 그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특별한 장관이었다. 궁금했다. 과연 이 길 끝으로 가면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그때 마침 저 멀리 반환점을 돌아 나를 향해 다가오는 산책자가 보였다. 호기심을 참을 수 없어 용기를 내 물었다.
“저 끝으로 가면 뭐가 있어요?”
“음... 특별한 건 없는데... 한번 가보세요.”
역시 쉽게 얻어지는 것은 없었다. 신비주의를 고수하는 듯한 산책자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내 곁을 스쳐갔다. 나는 다시 한없는 길의 끝을 바라보았다. 인생처럼 아득하게 느껴지는 길이기에, 더욱 끌렸다. 한번 가보기로 했다. 산책자의 현명한 대답에 왠지 힘이 생겼다. 그 말은 곧, 내 앞에 펼쳐진 길이니 그 끝 역시 내가 마주할 몫이라는 의미처럼 느껴졌으니.
나는 길의 끝에 도달하기 위해 부지런히 걸었고, 숨이 차오르면 잔디밭에 털썩 앉아 잠시 쉬어 갔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노을빛에 번져가는 롱워크의 특별함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그리고 끝내, 윈저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산책길을 하나도 빠짐없이 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 역시 신비주의를 고수하는 다른 산책자처럼,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비밀로 부쳐두기로 했다. 그래야 당신이 그곳으로 떠날 수 있을 테니까.
다만 중요한 건 인생처럼 아득하게 느껴지는 길도 결국은 끝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끝에 서면 내가 걸어온 길을 선명하게 다시 돌아볼 수 있으리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