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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아 Aug 27. 2022

바스, 반짝반짝 크리스마스의 온기

 BATH in UK - 눈감으면 영국

*

“크리스마스에 바스로 올래?”

    

뜻밖의 초대였다. 무슨 일이든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습성이 있었는데, 이번만큼은 1초도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래, 좋아!”     



사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올수록 외로움이 커져갔다. 영국은 크리스마스가 되면 모든 것이 멈추기 때문이었다. 버스도, 튜브도, 기차도 운행하지 않고, 상점도 마트도 모두 문을 닫는다. 이날만큼은 누구나 공평하게 가족들과 따뜻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까닭이다. 하지만 이방인인 나는 꼼짝없이 집에서 홀로 크리스마스를 보내야 하는 처지였다. 플랏메이트도 모두 고향으로 떠나고, 텅 빈 집에 혼자 남아 처량하게 캐럴을 듣고 있었다. 그러니 친구의 전화가 얼마나 반가웠는지.  



12월 24일 아침, 전화를 끊자마자 바스행 티켓을 끊고 곧장 빅토리아 코치역으로 달려갔다. 빅토리아 코치역은 런던에서 각 도시로 향하는 버스를 탈 수 있는 터미널이다. 영국 도시 곳곳을 여행할 때 내셔널 익스프레스 코치나 메가 버스 등의 고속 버스를 자주 이용했다. 물론 요금이 저렴했던 이유도 있지만, 2층 버스에 대한 애정도 컸다. 2층 버스 앞좌석에 앉아있으면 영국 곳곳의 풍경을 파노라마로 눈에 담을 수 있어 좋았.


버스에 앉아 출발을 기다리니 산타를 닮은 흰 수염의 인상좋은 할아버지가 내 옆에 앉았다. 그는 내게 바스에 처음 가보는 것이냐고 말을 걸었다. 그렇다고 하자, 크리스마스에 바스를 여행하는 건 정말 큰 행운이라고 말해 주었다.


*

12월은 영국이 가장 반짝이는 시간이다. 일 년 중 최고의 축제인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도시 전체가 황금빛 장식으로 물들기 때문이다. 물론 바스의 겨울도 아름다웠다. 시내로 들어서자 화려하게 돌아가는 회전목마가 ‘짠’ 하고 마법처럼 나타났다. 겨울이 되면 영국 곳곳에 각종 기념품과 먹거리를 파는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리고, 재밌는 놀이기구들이 설치된다. 이 회전목마도 크리스마스 시즌에만 볼 수 있는 한정판 풍경이니, 더욱 특별해 보였다.      



바스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어, 걸을수록 그 고유한 정취에 흠뻑 빠질 수 있었다. 엠마의 집으로 가는 길, 바스의 명소들이 하나씩 나타나 보물찾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로마 시대의 공중목욕탕이었던 로만 바스, 973년 잉글랜드 최초의 왕 에드거의 대관식이 치러진 바스 수도원 등. 그중 인상적이었던 건 펄트니 다리였다. 20여 년의 건축 기간을 거쳐 1774년에 완공된 팔라디안 스타일의 다리로, 그 아래 흐르는 에이번강의 독특한 물살이 절경을 이루었다. 영화 <레 미제라블>에서 자베르 경감이 자살을 할 때 배경이 된 곳 인 만큼, 어느 강에서도 볼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을 전해주었다.           


*

영국의 겨울은 꽤나 밤이 길었다. 오후 4시가 되자 벌써 해가 저물기 시작했고, 도시의 빛은 점차 절정으로 향해갔다. 형형색색의 크리스마스 전등이 깜빡거리고, 사람들은 양손 가득 선물 꾸러미를 들고 집으로 향했다. 내가 좋아하는 이들에게 어떤 선물이 어울릴까? 특별한 물건을 고르고, 계산하고, 포장하는 순간마다 사람들의 눈이 별처럼 반짝거렸다. 나도 막스앤스펜서로 들어가 엠마에게 줄 선물을 골랐다. 모자를 좋아하는 엠마를 위해 분홍색 털모자를 샀고, 엠마 가족들을 위해 크리스마스 푸딩도 예쁘게 포장했다.    



엠마의 집으로 가는 길, 바스의 또 하나의 상징인 로열 크레센트가 내 발길을 붙들었다. 초승달을 닮은듯한 이 특별한 건축물은 사진 프레임에 한번에 다 담기 힘들 정도로 기다랗고 웅장했다. 조지 시대의 상징적인 건축물인 만큼, 테라스하우스와 석조기둥이 차례로 이어지며 유일무이한 거대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로열 크레센트가 남다르게 느껴졌던 건, 두 팔을 벌린듯 초록의 로열 빅토리아 파크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있는 모습이 참 따뜻해 보여서였다.


*

로열 크레센트의 따뜻함이 채 가시기 전 언덕길을 올라 엠마의 집에 도착했다. 지구 반대편에서 온 새로운 얼굴이 낯설 법도 했지만, 엠마의 가족들은 두 팔을 벌려 나를 꼭 안아주었다. 영국 사람들은 누군가를 만나면 항상 두 팔을 벌려 허그로 인사를 나눴다. 한국인에게는 낯선 문화라 때론 어색하고 쑥스러웠지만, 돌아보면 매순간 따뜻하고 고마웠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 엠마의 가족들은 잠들기 전 서로를 보며 눈을 찡긋거렸다. 시간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모두 각자의 방에서 선물 꾸러미를 들고 와 트리 앞에 내려놓았다. 누가 어떤 선물을 받게 될까? 내일 아침이 될 때까지, 모든 것이 비밀이라고 했다.      



크리스마스 아침, 엠마가 똑똑 방문을 두드렸다.      


"얼른 일어나. 선물 풀 시간이야!"      


엠마는 헝클어진 머리에 잠옷 바람으로 나에게 손짓을 했다. 허겁지겁 밖으로 나갔더니, 모두가 잠옷을 입은 채로 트리 앞에 앉아 있었다. 그리곤 한 명씩 자신의 이름이 적힌 선물상자를 풀어보기 시작했다. 보물선 레고, 해리포터 양말, 산타 머그컵, 승마 부츠 등 다양한 선물들이 공개될 때마다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

내 이름이 적힌 선물상자도 두 개나 있었다. 먼저 초록색 체크 무늬 포장을 뜯었더니, 책 한 권이 나왔다. 제인 오스틴의 <노생거 사원>이었다. 바스를 대표하는 작가 제인 오스틴이 이 도시를 배경으로 쓴 소설이란다. 내가 바스를 오래 기억했으면 하는 마음에, 엠마 가족들이 특별히 준비한 선물이라고 했다.


두 번째 선물은 반짝이는 조명이 달린 빨간 크리스마스 스웨터였다. 꺼내자마자 포근한 감촉이 느껴졌다. 왠지 이걸 입으면 트리보다 더 빛날 것만 같았다.      



“고마워! 엠마”

“크리스마스 점퍼야. 크리스마스 때 입는 특별한 옷. 이따 꼭 갈아입고 나와. 누가 제일 재밌는 크리스마스 점퍼를 입었는지 내기할 거니까.”      


내기의 승자는 엠마의 삼촌이었다. 그의 크리스마스 점퍼에는 작은 종이 수십 개 달려 있어서, 움직일 때마다 딸랑딸랑 소리가 났다. 종소리가 날 때마다 가족들은 우습다며 좋아했다. 간발의 차로 나는 2등을 했다. 끊임없이 반짝이는 형광 조명을 보며 엠마의 조카들이 까르르 웃었다. 그리고 조명을 하나씩 만져보기도 했다.



어느새 저녁이 되고, 칠면조와 요크셔 푸딩, 민스 파이 등으로 풍성한 크리스마스 디너가 준비되었다. 맛있는 요리와 즐거운 대화가 어우러지는 사이, 창밖으로 눈이 펄펄 내리기 시작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그런데 신기했다. 눈이 쌓일수록 엠마의 집이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게 아닌가. 거실에 활활 타오르고 있는 벽난로 때문인지, 아니면 내 크리스마스 점퍼에 달린 조명 때문인지,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어느 때보다 따스한 크리스마스 밤이란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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