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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아 Aug 25. 2022

런던, 템즈강으로 가는 길  

LONDON in UK - 눈감으면 영국

*

11시간을 건너 새로운 세상에 도착했다.      


런던의 워털루역.      


낯선 도시의 첫인상은 아지랑이 같았다. 플랫폼에는 저마다 다른 행선지의 기차들이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고,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도착하는 사람과 떠나는 사람들, 그리고 만나고 이별하는 순간들. 그 분주함 속에서 나는 덩그러니 홀로 놓였지만, 외롭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그곳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역 밖으로 나가자 빅토리아 양식의 고풍스러운 건물들, 그리고 키치한 그라피티로 뒤덮인 터널이 눈앞에 펼쳐졌다. 거리에는 빨간 이층 버스인 더블데카와 클래식한 검은 택시 블랙캡이 뒤섞여 있었다. 그 풍경을 보자 정말 런던에 온 것이 실감 났다.      


나는 양손에 캐리어 가방 두 개를 꼭 쥐고 한참을 서 있었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일상일 테지만, 나로선 10년 넘게 그려오던 풍경이었다. 막상 저지르고 나니 그리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는데, 떠나기까지 왜 그리도 긴 시간이 걸렸던 것일까?      


오랜 기다림 끝에 찾아온 시작을 최대한 천천히 음미하고 싶었다.     


*

워털루역에서 걸어서 5분쯤, 큰길을 건너 뒷골목으로 들어서자 우튼 스트리트가 보였다. 잿빛의 허름한 연립 아파트 단지들이 늘어서 있는 정감 가는 동네. 베란다마다 널브러진 잡동사니들이 나를 반겨주었다. 오래된 화분, 낡은 의자, 곰 인형, 훌라후프, 축구공...     


나의 집은 어디에 있을까?      



똑같은 아파트들 사이에서 머뭇거리다, 다시 주소를 꺼내들었다. 내가 살 곳은 크로이든 하우스. 신기하게도 아파트 건물마다 이름이 달랐다. 우리나라는 가동, 나동 혹은 101동, 102동처럼 단순한 나열로 건물을 분류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영국은 키츠 하우스, 포토벨로 하우스 등 각각의 고유한 이름을 하나씩 달아놓았다. 같은 모양의 건물이지만, 저마다 특별한 이름을 붙여준다는 것. 이런 세심한 차이가 하나둘 마음을 두드렸다.   


*

스무 살, 처음 상경해 집을 구할 때 몇 날 며칠 발품을 팔았다. 햇빛이 잘 드는지, 온수가 잘 나오는지, 확인할 것이 퍽도 많았다. 집은 곧 나와 같은 곳이니 말이다.  그런데 이번엔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 미리 인터넷을 뒤져 집을 구해버렸다. 미지의 환경에 나를 던져보는 시도도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는 관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원하는 조건은 딱 2가지였다. 렌트비가 600파운드를 넘지 않을 것. 템스강을 도보로 갈 수 있는 거리일 것. 마침 ‘영국사랑’(영국에서 생활하는 한국인들을 위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그 조건에 딱 맞는 집이 나타났다. 개인 방, 공용 주방과 화장실, 딱 3장의 사진만 보고 바로 계약을 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위치였다. 워털루는 1존의 끄트머리로, 체력만 따른다면 걸어서 웬만한 런던 중심지를 오갈 수 있었다. 계속 방 사진을 보며, 어떤 집일까 상상해보았다. 낯선 도시에 도착했을 때, 집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따뜻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

크로이든 하우스는 5층짜리 연립 아파트였고, 내가 갈 곳은 꼭대기 층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설레는 마음으로 1층 현관문을 열었는데, 예상치 못한 위기가 찾아왔다. 어디에도 엘리베이터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가파르고 끝없는 계단이 내 앞에 놓여있을 뿐이었다.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차마 두고 오지 못한 물건들로 꽉꽉 채워진 25kg의 캐리어 가방 2개. 순식간에 끝없이 돌을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가 된 기분이었다. 역시 좋은 위치에 비해 렌트비가 저렴했던 건 다 이유가 있었던 걸까?     



심호흡을 크게 하고 첫 번째 계단을 올라가 보기로 했다. 겨우 반 층을 올랐는데, 녹초가 되었다. 힘이 들어 캐리어 가방을 털썩 바닥에 내려놓자, 중심을 잃고 드르르륵 아래로 미끄러졌다. 그 소리가 복도를 울리고, 나도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다시 원점.      


하지만 다시 털고 일어나 가방 손잡이를 꼭 쥐었다. 분명한 것은 이 많은 계단도 언젠가 끝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끝에 우리 집이 날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한 계단, 한 계단씩 천천히 그곳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었다.      

    


“웰컴 투 런던!”      


명랑한 목소리로 나를 환영해준 이는 집주인 제시카였다. 그녀는 나같은 이방인이 익숙한듯 자연스레 나를 이끌며 집 구석구석을 소개했다. 아담하고 햇살이 잘 들어오는 포근한 집이었다. 영국 집 특유의 회색 카펫 바닥에 먼지 묻은 운동화를 신고 서 있는 게 낯설게 느껴졌지만, 곧 그 감촉은 익숙해졌다.      



그런데 내 방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았다. 몸 하나 겨우 누울 수 있는 싱글 침대, 작은 책상과 서랍장으로 이미 방이 가득 찼다. 방문을 열자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다섯 걸음 정도. 단번에 런던의 살인적인 집값을 몸소 체감할 수 있었다.      


나를 포함해 플랏메이트는 총 4명. 한 달에 600파운드면 서울의 넓은 원룸에 혼자 편하게 살 수 있지만, 런던에서는 작은 방 하나가 전부였다. 비싼 집세 때문에 런던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청춘들이 플랏메이트와 집을 쉐어하고 있었다. 10년 넘게 혼자 살았는데, 누군가와 부엌, 화장실을 함께 써야 한다는 현실이 불편하긴 했다. 하지만 런더너들에게 익숙한 생활이라니. 그냥 새로운 일상에 몸을 던져보기로 했다.    


*

내 작은 방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하얀 책상이었다. 그곳에 앉으면 창밖으로 런던의 생경한 풍경이 내려다보였기 때문이다. 회색 벽돌집과 붉은 지붕, 우뚝 솟은 굴뚝들. 고층 빌딩과 아파트가 즐비한 서울의 풍경이 벌써 아득하게 느껴졌다.      


짐을 풀다 말고 책상에 한참을 앉아 있는데, 창밖으로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나는 번뜩 정신이 들어 목도리를 두르고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다. 런던에서의 첫날, 꼭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템스강변을 걷는 것이었다. 



다시 거리로 나와 워털루 역 앞에 섰다. 불과 몇 시간도 되지 않아 나는 낯선 여행자에서, 무거운 캐리어를 벗어던진 자유인이 되었다. 이젠 길을 잃지 않기 위해 해야 할 일은 하나. 바로 런던아이가 보이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조금씩 템스강 불빛이 반짝이기 시작했고, 내 걸음은 더욱더 빨라졌다. 이상했다. 강바람이 불었지만, 전혀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후, 눈앞에 템스강이 일렁였고, 강아지를 데리고 강변을 산책하는 사람들이 나를 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그 장면을 따라 홀린 듯 걷다 보니, 강을 따라 아름다운 다리들이 나를 반겨주었다. 세어보면 런던의 템스강에는 34개의 다리가 있다고 한다. 저마다의 매력으로 템스강을 튼튼히 지탱하고 있다는 멋진 다리들. 영국에 머무는 동안 그곳을 모두 찾아 템스강 위로 더욱 반짝이는 런던의 모양들을 하나씩 눈에 담아보려 한다.  



오늘은 그 시작을 알리는 첫 날이니 오랫동안 꿈꾸었던 곳으로 갈 계획이다. 런던 아이의 풍경을 품고 있는 워털루 브리지를 시작으로 세계 최대 태양광 다리인 블랙프라이어스 브리지... 이들을 따라 템스강도 쉴 새없이 흐르며 변화무쌍한 풍경을 선보였다. 그리고 어느새 강물에 달빛이 내려앉을 무렵, 드디어 '밀레니엄 브리지에' 다다랐다. 웅장한 세인트폴 대성당과 날 것의 테이트 모던을 이어주는 나선형의 특별한 다리. 어느 곳에 서 있어도 잊지 못할 풍경을 선사해주는 마법의 다리. 늘 와보고 싶었던, 꿈과도 같았던, 밀레니엄 브리지에 오르니 비로소 모든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떠나지 않았다면 결코 볼 수 없던 풍경들. 

이제 더 이상 꿈에서만 그리던 순간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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