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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아 Sep 23. 2022

코츠월드, 오후 3시엔 홍차 한 잔을!

COTSWOLD in UK - 눈감으면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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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가 되면 습관적으로 하는 일이 있다. 찬장에서 하얀색 틴케이스를 꺼내 오늘 마실 차를 고르는 것. 얼그레이, 다즐링, 아쌈 등 빼곡히 담겨 있는 티백들 중 그날의 기분에 딱 맞는 차를 하나 선택한다. 그리고 꽃무늬 찻잔 속에 티백을 넣고 따뜻한 물을 천천히 붓는다. 그 순간 작은 변화가 일어난다. 바로 나른했던 오후가 제법 산뜻해진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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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마시는 습관이 생긴 건 코츠월드를 다녀온 뒤였다. '영국'을 떠올릴 때 빼놓을 수 없는 건 티타임. 정말로 영국 사람들은 차를 사랑한다. 가까운 동네 슈퍼마켓만 가도 이를 느낄 수 있다. 이토록 많은 차 브랜드와 홍차 종류가 있다는 것에 한 번, 티백 250개가 담긴 제품이 가장 인기라는 것에 두 번 놀란다. 영국인들이 얼마나 차를 일상적으로 마시는지 짐작할 수 있으니까.


차 마시는 장면은 영국 작품에도 빼놓지 않고 등장한다. <오만과 편견>의 주인공들은 우아한 찻잔에 차를 따르며 오후의 시간을 즐기고, <맨스필드 파크>의 토마스 경은 인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차 말곤 아무것도 먹지 않겠어”라고 했다. 이는 영국의 대표 작가 제인 오스틴이 차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대변해주는 대사이기도 하다. 그녀는 티타임을 할 때도 늘 차를 준비하는 역할을 맡았고, 직접 열쇠를 관리하며 차를 금고에 넣어 보관할 만큼 남다른 애정을 보여주었다.



차를 향한 영국인들의 각별한 사랑을 보며, 나도 그런 순간을 꿈꿨다. 따뜻한 차와 삼단 트레이 위 다채로운 디저트를 함께 곁들이는 오후의 시간, 그 여유가 퍽 부러워 보였다. 그래서 영국 여행을 하는 동안 티룸에 들러 차를 마시곤 했다. 신기하게도 그 시간은 바쁜 하루의 숨을 편안히 돌려주는 신비한 힘을 갖고 있었다. 그중 영국의 전원 풍경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는 코츠월드는 한낮의 티타임을 즐기기에 완벽한 곳이었다. 덕분에 여행의 잔향도 홍차처럼 깊고 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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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8시, 코츠월드로 향하는 투어 버스에 몸을 실었다. 발길 닿는 대로 떠나는 자유여행을 선호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코츠월드의 지리적 특성 때문이었다. 코츠월드는 영국 남서부에 위치한 아름다운 전원 마을. 단순히 하나의 도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구릉 지대에 있는 200여 개의 마을을 통틀어 코츠월드라 부른다. 마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좁은 골목길이 많다 보니,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그러니 뚜벅이 여행자는 이동이 편리한 투어 버스를 활용하는 것이 더 좋은 선택지였다.



현지 여행사의 일일 투어를 신청한 건 처음이라, 설렘 반 호기심 반으로 출발을 기다렸다. 가이드는 멋진 중년의 영국 신사였다. 그의 이름은 조엘, 자신의 소개를 마치고 코츠월드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코츠월드는 옛 영어로 ‘언덕에 있는 양들의 울타리’라는 뜻인데, 그만큼 드넓은 초원에 펼쳐진 영국의 전형적인 시골 풍경이 가득하단다. 우아한 영국식 억양으로 설명하는 영국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한층 이국적인 분위기가 더해졌다. 더불어 함께 투어에 참여한 다른 현지인들과 대화를 나누고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점도 이 보너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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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츠월드로 들어서자 초원 사이로 좁다란 길이 구불구불 이어지기 시작했다. 가이드 조엘의 말이 맞았다. 창밖의 풍경은 어느 곳을 보아도 금방 물감을 풀어 그린 듯 생생했다.


투어는 코츠월드의 대표적인 마을 세 곳에 들러 천천히 시간을 갖는 코스로 구성되었다. 버포드, 바이어리, 그리고 버튼온더워터다.



가장 먼저 도착한 버포드는 코츠월드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작은 마을이다. 코츠월드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로 천여 명의 주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다. 오래된 석회석 건물과 자연풍경이 어우러져 아기자기한 정취를 자아내는 버포드. 마을의 중심부인 하이스트리트로 향하면, 경사진 길을 따라 이어진 꿀벌색 벽돌집의 향연이 마치 중세 시대로 시간 여행을 온 듯 고풍스럽다. 또한 아기자기한 골동품점과 핸드메이드샵들이 줄지어 있어 보물 찾기를 하듯 가게들을 오가는 재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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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코스는 바이어리. 14세기에 지어진 옛 모습을 그대로 품고 있는 곳이다. 알링턴 거리에는 600여 년 전 돌을 쌓아 만든 영국 전통 가옥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 목가적인 정취를 전해준다. 그중 바이어리의 상징인 알링턴 로우는 단연 돋보이는 풍경이다. 영국 최초의 연립주택으로 알려진 알링턴 로우는 영국 여권 표지 안쪽에 새겨져 있을 만큼 영국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곳. 이 풍경 하나만으로도, 시인 윌리엄 모리스가 영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이곳을 꼽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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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여행지인 버튼온더워터는 이름처럼 물의 풍경으로 인상적인 곳이었다. 마을을 따라 윈드러쉬 강이 평화롭게 흐르는 마을로, 코츠월드의 베네치아라고 불린다. 작은 강 위로 다섯 개의 다리가 있었는데, 그중 가장 오래된 것이 1654년에 지어졌다고. 오랜 세월 동안 이 다리를 건넜을 사람들을 떠올리니, 강변의 운치가 애틋하게 다가온다.


강을 건너 골목길을 들어서면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돌담 집들이 여행객을 반긴다. 돌담 집 앞에 장식된 제라늄과 장미는 동화 같은 풍경을 더 다채롭게 만들어 주었는데, 그 향기를 따라가다 보니 골목길의 재미는 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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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튼온더워터의 골목길을 걷다 보니 어느덧 오후 3시. 아침부터 온종일 걸은 탓에 피로가 몰려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작은 티룸이 눈에 띄었다. 화려한 장식은 없더라도, 소박한 돌담 건물이 전원 풍경과 어우러져 특별한 분위기를 품어 내고 있었다. 창문 너머에는 이미 애프터눈티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 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은은한 홍차 향기가 퍼져 나왔다. 그곳은 작은 홍차 왕국이었다. 딸기 홍차, 장미 홍차, 사과 홍차, 세상의 모든 홍차들이 한쪽 벽면에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다. 따뜻한 미소로 나를 반겨준 티룸의 주인 아저씨는 홍차를 마시는 팁을 알려주었다. 그날의 기분에 따라 어울리는 홍차를 골라 따뜻하게 마시는 것, 평범한 하루를 다채롭게 만드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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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뉴판을 살펴본 뒤 크림티 하나를 주문했다. 크림티는 홍차, 스콘, 과일잼, 클로티드 크림으로 구성된 가벼운 오후의 간식이다. 영국을 찾은 여행자들은 애프터눈티 세트에 대한 로망을 갖고 있지만, 실제로 영국인들이 흔히 먹는 것은 이 크림티다. 3단 트레이에 층층이 채워진 스콘, 빅토리아 스펀지, 샌드위치, 쿠키 등을 매일 차와 곁들여 먹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테니까. 대신 갓 구운 스콘에 딸기잼과 클로티드 크림을 올리고 차 한 잔을 마시면, 그보다 완벽한 조합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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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꽃문양 티포트에 담긴 얼그레이가 도착했다. 홍차 중 얼그레이를 가장 좋아하는데, 마음을 어루만지는 베르가모트향 때문이었다. 찻잔에 차를 따르자, 그윽한 향기가 퍼져 나왔다. 차를 식히기 위해  가만히 창밖을 보고 있었는데, 누군가 내게 말을 걸었다.


“영국 사람들은 힘든 일이 있으면 꼭 차를 마셔요. 차 한 잔이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고 믿거든.”


돌아보니 티룸의 주인 아저씨가 갓 구운 스콘을 내밀며 웃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차 한 잔 마실 여유 정도는 남겨 놓으라는 거지.”        

                                                   

차 전도사 같은 말을 남긴 그는 나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한 뒤 유유히 사라졌다.


정말 이 차 한 잔이 머리 아픈 문제들을 해결해줄 수 있을까? 찻잔을 내려다보니 그 안에 내 얼굴이 비쳐 있었다. 머릿속에 있는 모든 문제들을 이 작은 찻잔에 쏟아붓고 전부 마셔버리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심 그 바람이 실제로 이뤄지길 바라며 차를 한 모금씩 마셔보았다. 정말 그 문제들이 다 사라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몸이 한결 따스해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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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티포트를 들어 빈 찻잔에 얼그레이를 부었다. 아직도 차는 식지 않아 따스한 김이 올라왔다. 그 사이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창밖의 고즈넉한 풍경을 바라보니, 어느덧 여행의 피로가 차츰 사라져 갔다.


차가 식기 전에 얼른 스콘을 손에 들고 딸기잼과 클로티드 크림을 듬뿍 발라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순간 기분 좋은 달콤함이 밀려왔다. 그 달콤함은 따뜻한 차와 어우러지며 코츠월드의 오후 속으로 찬찬히 녹아들었다.


당신이 추울 때는 차가 따뜻하게 해 주며

더울 때는 시원하게 해 줄 것이다.

우울할 때는 힘을 주고

기쁠 때는 차분하게 해 줄 것이다.


If you are cold, tea will warm you

If you are too heated, it will cool you

If you are depressed, it will cheer you

If you are excited, it will calm you.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전 영국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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