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을 잃고 파리에 갔다. 다시 낭만을 찾자 나는 파리지엥이 되어있었다.
그늘이 흔들렸다. 그림자가 춤을 췄다. 햇빛은 노란색이었고, 사람들의 머리위로 노란빛이 떨어졌다. 하얀 얼굴이 금색으로 빛난다. 금색 얼굴을 가득 채운 이층버스가 지나갔다. 담배가 다 타들어가기를 기다리며, 그늘에 숨어있었다. 옆에는 체 게바라의 얼굴이 크게 인쇄되어 있었다. 체는 시가를 태우고, 나는 슬림형 1mm 담배를 태웠다. 우리는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쿠바의 혁명가가 왜 가을날 볕 좋은 센강변에 있는지 의아했다. 체도 왜 한국인이 자기 옆에서 담배를 피우는지 몰랐을 것이다. 우리가 서로 답을 못 내놓자, 노점상이 담뱃불을 빌려달라고 다가왔다. 그에게 불을 붙여주고, 다시 걷기로 했다.
파리에 온 건 우연이었다. 불시착이었고, 다시 비행기를 타려면 9시간 정도가 남았었다. 지루해서 공항을 빠져나와 시내로 나왔다. 방향도 없었고, 약속도 없었다. 만날 사람도 없고, 아는 곳도 없었다. 불어도 할 줄 모르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누군가 내게 말을 걸어준다면, 나는 차근차근 내가 어디서 어쩌다가 태어나서, 30여년을 어떻게 살아왔고, 오늘 왜 이곳에 있게 되었는지 전부 말해 줄 수 있었는데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건 내가 귀를 가득 덮는 헤드폰을 쓰고 있고, 오래된 필름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낯선 곳을 걷고 있었다. 파리의 건물들은 비슷하고, 타일이 깔린 도로위로 푸조 자동차들이 다니고, 검은 헬맷을 쓴 스쿠터쟁이들과 관광객들이 있었다. 터키 사람, 북아프리카에서 온 이민자들, 아시아인들과 한국사람들이 있었다. 촬영에 여념 없었다. 그들이 너무 열심히 사진을 찍어서 카메라를 가방에 넣었다. 관광객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찍고 싶은 것도 없었다. 파리를 기대해 본 적 없으니까. 땅만 보고 걸었다. 주변을 둘러보지도 않았고, 급하지도 않았다. 천천히 익숙한 길을 걷는 방과후 학생처럼 걸었다. 누군가 내게 길을 물어봤다. 영어는 잘 하지만, 불어는 못 하는 나는 미안하다고 답했다. 센강변에 내려갔다. 강둑에 걸터앉은 여자들 옆에 앉았다. 십대 연인들이 서로 껴안고, 비둘기에 모이를 던저주다가 다시 키스를 했다. 강둑에 걸터앉은 여자들을 쳐다봤다. 안예뻤다. 그래서 아이폰을 꺼냈다. 3G가 안되서 게임도 안됐다. 허망했다. 다시 담배를 태웠다. 파리는 심심했다. 시내에 도착한 지 한 시간 정도가 지나자, 모든 것이 지겨워졌다. 다리 넘어 에펠탑이 외로이 솟아있었다.
허기졌다. 노천카페에서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었다. 공항에 가려면 7시간 정도가 남았다. 해는 중천이었다. 읽을 책도 없고, 휴대폰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커피를 조금씩 마시면서 아무것도 안했다. 강 건너 에펠탑의 그림자가 기우는 걸 우두커니 바라보기만 했다. 가로수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그럼 서울이 그리웠을까? 전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 아무런 고민도 갖지 않는 삶. 말을 하지 않고, 인간관계 따위가 필요 없는 삶. 성공과 미래에 관심이 없는 삶. 가로수처럼 사는 삶이 편했다. 그럼, 급할 이유가 없는 삶은 어떨까? 파리는 적의를 두고 살던 서울과는 많이 달랐다. 너무 뻔한 얘기지만, 파리에서 나는 잠시 뫼르소가 되었다. 눈이 부셔서 총을 쏘고 싶었다. 극단적이지만, 정말이다. 추상적인 문제에 대해 관념적인 언어들로 몇 시간이고 수다를 떠는 일 따위가 하고 싶었다. 남이야 어떻게 살던 내 길만 가고, 친척의 소란에 대해 무심할 수 있는 생활을 하고 싶었다. 거리의 뮤지션과 담소를 나누고,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도 제작하지 않는 영화인들과 영화와 철학에 대해 논하고 싶었다. 이방인이라면 가능한 일이다. 노천카페를 나와 목적이 없는 산책을 계속 했다. 발이 에펠탑 쪽으로 향했다.
계속 걸었다. 파리의 자랑 공용 자전거도 타지 않았다. 걷다보니 문득 미래는 깜깜해서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미래는 햇볕이 에펠탑 앞 잔디위에 내려앉는 것처럼 느리고 아늑하게 다가올 것 같았다. 불과 하루 전만 해도, 나는 이십대의 마지막을 보내며, 서른살 이후의 삶에 대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연봉과 주식, 애인과 결혼, 부모님의 노후로 이어지는 애증의 삼각편대로부터 공격받고 있었다. 그건 도망칠 수 없는 현실이자 미래이며, 그것이 곧 일생이라는 대한민국 남아의 존재 양태에 갇혀 있었다. 서울은 매력적이지만, 가난을 탈피할 때만 가능하다. 한국을 벗어나 사는 건 서글픈 이민자 생활의 시발점밖에 되지 않는다고 믿었다. 싸구려 대중문화에 감탄하는 작자들과 함께 영화를 보러가는 것도 지겨웠다. 문화를 경제적 논리로 접근하는 내가 싫어졌다. 모두들 그러지 않았는데, 언제 부터인가 함께 글을 쓰던 사람들이 변했다. 취직과 얼마를 버냐가 이야기의 중심이 됐다. 내가 제일 먼저 변했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생각 없이 즐길 수 있는 것들이 좋아졌다. 예술영화를 돈 주고 보지 않았으며, 어려운 소설대신 웃긴 사진을 찾았다. 마음에는 여유가 사라졌고, 머릿속은 비즈니스로 가득 차 용량을 늘릴 수 없었다. 포맷하고 싶었다. 드라이브를 나눠놓고,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사람이니까. 서울이 싫고, 어른이 되는 게 어려웠다. 나는 그저 결혼 하지 않고, 식사 중에 담배를 태우며, 돈도 안되는 예술에 대해 논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노천카페에서 가로수가 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불시착한 낯선 도시에서 뫼르소의 삶을 떠올렸고, 그것 또한 답이 되지 않는 다는 것도 깨달았다. 다만, 파리지엥이 된 그날 오후에는 풍경이 천천히 흘러가는 게 좋았다. 그냥 좋았다.
에펠탑을 앞에 두고 의심했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게 정말 아름다운 걸까?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성공이라고 확신하는 것, 좋은 것, 손을 치켜드는 것들에 대해 의심했다. 왜 나의 기준이 남들의 기준에 일치해야 되는 지. 정말 모르겠다. 삶은 스포츠가 아니다. 숫자로 정리될 수 없다. 경쟁될 수도 없는 일이다. 나는 나처럼 살면 되는 것인데, 왜 그게 어려운 걸까?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서울로 돌아가면 눈치보며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메마른 가로수는 반쯤 타버린 잎새들을 흔들고 있었다. 신호가 바뀌고, 길을 건넜다.
#아레나옴므플러스_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