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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진혁 Apr 25. 2017

빌바오에서 잃은 것

그리고 구겐하임뮤지엄에서 찾은 것

빌바오 구겐하임 뮤지엄. 프랭크 게리가 마을 하나 살렸다.


소매치기다! 지갑이 사라졌다. 분명 소매치기다. 스페인에 도착하기 전 부터 유럽에서 벌어진 사건들에 촉을 세우고 있었다. 유럽여행에서 카메라나 가방, 지갑을 도둑맞은 사례는 예전부터 수 없이 들어왔다. 칠칠맞지 못한 남의 일이 내게 벌어졌다. 언제 누구와 부딪혔는지를 기억해야 했다. 호텔 책상에 앉아, 첫날부터의 과정을 기록했다.


빌바오 공항에 도착한 건 밤 10시였다. 서머 타임 때문에 밤 10시가 되어서야 해가 졌다. 빠르게 어두워졌고, 이내 찬바람이 불다. 아스팔트에는 물이 고여 있었다. 5월 말. 지중해풍의 온화한 스페인 기후를 상상했던 나는 해변으로 향하는 하루키처럼 플립플랍에 레이밴 선글라스를 쓰고, 반바지에 푸른색 스트라이프 셔츠를 입은 채 빌바오 공항에 도착했다. 빌바오 사람들은 가죽재킷에 스카프를 두르거나, 두꺼운 블레이저를 입고 있었다. 이른 봄이었다. 공항 밖의 차가운 바람은 서울의 4월초를 연상케 했다. 나는 가출한 소년처럼 몸을 웅크린 채 호텔로 가방을 끌고 갔다. 공항버스를 탈 때까지만 해도 지갑이 있었다.

예약해둔 호텔은 구겐하임 미술관 건너편이었다. 호텔 프론트에서 여권을 꺼내고, 신용카드를 꺼내 결제했다. 그리고 지갑과 여권을 함께 가방에 넣었다. 호텔 직원이 내 짐을 옮겼고, 지갑이 든 가방은 내가 들고 방으로 올랐다. 다음날. 시차 때문에 일찍 눈이 떠졌다. 샤워를 하고, 조식을 먹기로 했다. 조식은 호텔 옥상 레스토랑에서 먹을 수 있었다. 빌바오 시내와 구겐하임 미술관, 발렌시아의 조각가 산티아고 칼라트라바가 디자인한 주비주리 다리가 한 눈에 보였다. 낮고, 작은 스페인 건물들과 그 건물들을 반영한 네오비온 강이 아름답게 흘렀다. 식당 앞에서 객실번호를 말했다. 그때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 담배가 있었고, 지갑은?

왼쪽 주머니에는 객실 도어카드만 있었다. 주머니가 작은 바지를 입어서 지갑을 손에 들고 다녔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식사할 때 테이블에 지갑을 올려뒀을 것이 분명한데, 내가 식사할 때는 사람들이 없었다. 지갑을 잃어버릴 가능성은 없다. 다시 생각해보니, 계산할 일이 없으니 지갑을 챙기지 않았을 것이다. 테라스에서 조식을 마칠 때는 네오비온 강 너머로 해가 떠올랐다. 일출을 보며 담배 태웠던가?

방에 들어와 옷을 갈아입고, 구겐하임 미술관 원정을 나섰다.


본래 이 여행의 목적은 구겐하임 미술관 관람이었다. 프랭크 게리가 건축한 구겐하임 미술관 건물은 지난 30년 건축사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물로 뽑힌다. 그 위엄을 느껴보고 싶었고, 무엇보다 제프 쿤스의 작품들을 만져보고 싶었다. 미술관에 갈 때 선글라스 대신 안경을 썼고, 셔츠 앞주머니에 담배를 넣었으며, 바지 주머니에 객실 도어키를 넣고 지갑을 들고 나섰다.

미술관 앞에는 제프 쿤스의 12.4m짜리 퍼피(Puppy)상이 있었다. 작은 것을 거대하게 만드는 그의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것이다. 그건 내가 강아지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이 꽃강아지는 미술관 개장을 축하하며 설치된 작품이라는 스토리 때문이다. 철거예정이었지만, 빌바오 시민들의 반대로 영원히 이 자리를 지키게 됐다는 후문을 들었다.

강아지를 지나 세 물고기가 입을 벌리고 강에서 솟아오르는 모습을 형상화한 구겐하임 미술관으로 입장했다. 티타늄 패널, 유리, 석회암으로만 만들어진 건물이다. 티타늄이 물고기의 비늘이라면, 석회암은 뼈대를 유리는 살이었다.

제푸 쿤스의 Puppy. 압도적 크기에 놀라 지갑 잃어기 쉽다.

입장료를 계산할 때 지갑을 꺼냈다. 아마 내가 지갑을 놓고 갔으면, 직원이 나를 불렀을 것이다. 그리고 한 손에는 긴 바나나처럼 생긴 해설 스피커를 들고 다녔다. 다른 손에는 지갑을 들고 다녔다. 여기 까지는 분명하다. 나는 빈손이 없어 꽤 불편했던 기억이 있으니까. 그리고 미술관에서 기념품을 사려다가 여권이 없어서 구매를 못 했다. 그때 다시 지갑을 들고 왔던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시 미술관으로 갔다. 미술관은 오전 10시부터 문을 열었다. 나는 개장한 미술관으로 다시 들어갔다. 아직 철거하지 않은 지난 전시품인 천정의 조각들이 나를 내려 뭉갤 듯 늘어져있었다. 나는 한 층씩 다시 둘러봤다. 유리로 만들어진 엘리베이터를 타고 삼층에 올랐다. 오노 요코의 전시가 진행 중이었다. 여기서 지갑을 잃어버릴 가능성은 없었다. 그 어디에도 앉을만한 자리는 없었으니까. 아래층에는 상설전시 중인 조형작품들이 있었다. 거대한 작품들이었다. 독일에서 제작된 철판 조형물은 구겐하임의 4m가 넘는 거대한 높이의 뒷문을 통해 들어왔다고 했다. 너무 커서 그 조형물 안을 걸어 다니기도 했다. 그러다 관람객들이 들이닥쳤고, 나는 시끄러운 게 싫어서 전시실을 빠져나갔다. 그때 아트 숍을 발견했다. 아트숍 직원은 어제 그 여자였다. 나는 다가가 인사를 했다. 나를 못 알아봤다. 영어로 어제 여기서 엽서와 찻잔을 구입하려다 여권이 없어서 못 산 사람이고 나를 설명했다. 그리고 여기 지갑을 놓고 갔다고 얘기했다. 직원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내 발음을 못 알아들었나 싶어 재차 얘기했다. 그녀는 없다고 말했다. 두 번이나. 내 태도가 너무 거만했나?


다시 호텔로 돌아와 어제의 행적을 쫓아봤다. 미술관을 나와서 미술관 밖의 살베다리를 건넜다. 이 다리에는 구겐하임 거대 조형물 중의 하나인 붉은 문이 설치되어있었다. 구겐하임과 어우러진 거대 조형들이 아름다워 다리위에서 사진을 찍었다. 사진은 스마트폰 안에 들어있으니, 이 동선은 분명하다. 다리를 내려와 네오비온 강을 따라 걸었고, 빌바오 시내로 들어가 쇼핑을 했다. 지갑은 바지 뒷주머니에 넣고다녔다. 누가 나를 밀쳤던가? 사람들과 부딪혔던가? 백화점에 들어갔던 게 기억났다. 대부분 한국에서 살 수 있는 것들만 있어서, 돌아 나왔다. 백화점 앞의 자라 매장을 발견했다. 서울의 반값이라는 소문을 들었기에 재킷을 하나 샀다. 결제를 했으니 이때 까지는 지갑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저녁을 먹었다.

서머타임 때문에 밤 8시가 되서야 레스토랑들이 저녁 장사를 시작했다. 인터넷에서 빌바오 맛집을 검색했다. 구글 지도를 따라 골목들을 돌아다녔다. 겨우 발견한 맛집에서 스페인 전통 맥주와 하몽을 시켰다. 때마침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TV에서 중계되고 있었다. 올해 최고의 명승부로 평가된 경기였다. 넋을 잃고 TV를 봤다. 나뿐만 아니라 그 카페의 모든 손님들이 TV에 시선을 꽂고 있었다. 20대 청년들은 상기되어 있었다. 수염을 기른 남자들, 담배를 태우며 소리를 지르는 여자들, 한 명의 아시안을 빼놓고는 전부다 웃고 떠들며 경기를 봤다. 하지만 응원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마드리드를 연고로 하는 두 팀의 경기였기에, 빌바오 사람들이 응원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서빙 하는 남자들이 내 테이블로 와서 맥주를 더 마실 거냐고 물어봤고, 나는 두 세병을 더 마신 듯 한 기억이 난다. 좁은 카페에서 내 테이블을 스쳐 지나간 사람들은 꽤 있었다. 아마 20대 청년들이 소란스럽게 내 테이블을 치고 갔던 것 같다. 맥주잔이 엎어질 정도는 아니었다. 스페인 맥주는 달콤하지만, 금세 취기가 오른다. 나는 붉어진 얼굴로 중계를 봤다. 역전골이 터졌을 때 모두들 소리를 질렀다. 경기는 밤 10시 반이 넘어서야 끝났고, 그제야 호텔로 돌아왔다. 다른 카페에는 승리팀의 세레모니가 중계되고 있었고, 다들 여전히 TV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객실로 돌아왔다. 여기서 내 지갑의 행방이 묘연하다. 카페를 나설 때 지갑을 챙겼던가? 분명히 결제는 했는데, 카운터에 지갑을 놓고 왔던가? 수염 난 청년들인가? 카페 위치가 근처였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챔스 2014 결승. 라모스가 헤딩골을 넣자 함성이 펍밖 골목으로 흘러넘쳤다.

 


#나일론 #20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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