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진혁 May 07. 2017

잘츠부르크행 버스

신호가 보일 때 마다 우리는 울컥했다.

잘츠부르크 공항은 버스 터미널처럼 생겼다. 작고, 조용하고, 지루하다.

Salzburg를 발음해본다. 서울 보다 작은 도시의 그 보다 더 작은 공항이었다. 동행한 선배는 시내버스티켓 자판기 사용법을 읽고 있었고, 나는 그런 선배의 뒷모습을 익혀두고 있었다. 독일어를 천천히 발음하며, 그것의 영어 의미를 유추하는 표정. 미간을 찌푸리고, 영어단어들을 떠올리는 선배의 표정. 앞으로 며칠간 보게 될 새로운 것을 배워가는 선배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것은 선배가 아닌 새로운 세상에 놓인 무지한 동료의 모습이었다. 나는 그런 무지한 선배가 더 좋았다. 선배는 어렵사리 티켓을 두 장 발권했다. 아니 처음에는 한 장을 뽑았고, 동전들을 모아서 다시 한 장을 더 뽑았다. 그런 우리 뒤에서 한 참을 기다리던 할머니는 짜증을 냈다. 그녀는 우리가 모르는, 앞으로도 모를 말을 우리에게 내뱉었고, 무지한 우리는 어쩔도리가 없이 캐리어를 끌고 자리를 옮겼다. 미안하다는 말과 초행이라서 그렇다고, 이해해달라고, 유권자를 붙잡는 대선후보의 태도 같은 것을 떠올렸어야 했으나. 우리는 그런 상상력을 끄집어 낼 능력도 없었다. 무지한 두 남자를 향한 할머니의 말들은 비행기 소리조차 없는 잘츠부르크 공항 주차장을 채웠다. 그것은 뜨거운 오후의 풍경이었고,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체로 그 풍경을 기억하기로 했다. 너무 맑은 하늘이 바랗게 만든 노란색 페인트들과 은색의 자판기, 감색의 캐리어, 검은 머리의 여행객, 흰 머리의 노인, 노인의 벌어진 입 같은 것들.


잘츠부르크 시내 버스는 이렇게 생겼다. 출입구가 3개나 된다.

버스의 고요함은 어느 나라나 비슷하다. 버스안의 공기, 버스 밖의 말없는 풍경도 비슷하다. 사람들이 사는 곳은 어디나 대게 비슷한 모습을 연출하는 법이다. 그것이 700km/h로 10시간을 날아간다고 해도 다르지 않다. 하늘이 맑고, 공기가 깨끗해서 어색하다 하여도 사람들의 행동양식은 다르지 않다. 우리는 20리터짜리 캐리어를 하나씩 끌고, 버스 뒤편에 자리했다. 잘츠부르크의 버스는 뒷편이 비어있었다. 여행자들을 위한 공간 혹은 휠체어를 탄 사람을 위한 여백이었다. 우리는 이 버스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를 의심했고, 약간의 긴장을 주고 받았다. 하지만 더 이상의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다. 버스를 우리만의 언어로 채우기에는 너무 고요했다. 다른 승객들이 무슨생각을 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표정은 어두웠고, 그들의 머릿속을 이국의 언어를 주입하고 싶지 않았다.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다. 버스나 지하철은 사람이 많아질수록 조용해진다. 밀쳐지고 그러다 밀착된 출근길의 우리는 자신만의 공간을 잃는다. 내 공간이란 없고, 그러니 우리는 나를 보호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다. 너무 가까운 사이가 되면 그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 한다. 판단력을 상실한다. 출근 지하철의 사람들은 목소리를 내세우지 않는다. 객실이 시끄러울 때는 한 두사람만 남았을 때다. 미친사람의 미친소리가 그리울 때가 있다. 내 공간 너머에서 들여오는 소란스러움과 그 소란을 방관하는 즐거움이 묘한 안정감을 주니까. 그래서 막차를 자주 탔던가?

중세 건축물들이 잘 유지된 구도심. 앞에 작은 강이흐른다. 구도심은 매우 작아서 도보로 반나절이면 모두 둘러볼 수 있다.

잘츠부르크 시내로 향하는 동안 창밖으로는 마을의 풍경이 펼쳐졌다. 하늘이 파랗고, 공기가 맑고, 중세 독일양식의 집들이 있고, 지붕들이 모두 오렌지 빛이라 하여도, 사람들의 표정은 서울과 비슷했다. 노을을 향해 미간을 찌푸렸거나, 이어폰을 귀에 꼽고 있거나, 지루함을 견디기 위한 노력이라든지 그런것들이 비슷했다. 버스안의 모습도 그렇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온 히잡을 쓴 여자는 비닐 봉지를 안고 있었다. 안경을 쓴 노인들은 탑승과 동시에 뒷문근처로 걸어갔다. 노인의 걸음걸이에 승객들의 시선이 집중되었고, 노인이 걸음을 멈추면 그 자리의 승객은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다. 노인은 몇 차례 손사례를 치다가 자리를 이어 받았다. 애들은 엄마 소매자락을 붙잡고 질문을 잇고, 엄마는 아이를 조용히 시킨다. 뒷 좌석에 앉은 여학생들은 웃음을 터뜨렸고, 그 웃음 소리를 향해 이어폰을 낀 남학생은 슬며시 따라 웃었다. 그리고 선배와 나는 그 웃음을 경계했다. 낯선 곳은 우리를 예민하게 만든다.

사운드오브뮤직의 대령님댁이 구도심에 있다.

잘츠부르크는 작은 도시이다. 모짜르트가 살던 도시이기도 하고, 현재도 유명한 음대가 자리한 음악의 도시이기도 하다. 사운드 오브 뮤직의 대령의 집이 시내에 있으며, 장미가 도시의 중심을 이루고, 구도심은 과거의 영광을 보전하고 있다. 그리고 시내의 버스는 다른 유럽 도시들의 버스와 마찬가지도 이주민들의 색으로 채워져있다. 동북아시아인, 동남아시아인, 중동아시아인 그리고 백인들과 흑인이 가끔씩 있다. 유학생이거나, 직업이 없거나, 일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 이 버스가 어디로 가는지는 알지만, 이민자의 삶이 어떻게 지속되는 지는 알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은 저마다의 기대를 가진채 버스에 오르지만, 느려터진 엔진이 굉음을 쏟아낼 때 마다 현실은 온몸을 뒤흔든다.

버스가 울컥거리면 상념에 쉼표가 걸린다.

교향곡의 도시에서 탄 버스는 음악 대신 정류장 이름만 알렸다. 선배와 나는 창밖의 오래된 성당을 보고, 시내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속삭였다. 시내가 가까워질 수록 거리의 사람들은 많아졌고, 그들의 표정을 관찰하기 어려웠다. 띄엄띄엄 늘어선 상점들, 곳곳에 피어진 장미들, 좁은 도로와 맑은 하늘, 여행책에서 보던 중세풍의 건물들이 보였다. 여기서 살면 행복할까? 여유로울 수 있을까? 정의로운 사회를 꿈꾼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내가? 그래서 정의로운 사회가 되면 나는 만족할 수 있을까? 나는 좋은 사람인가? 내가 뭐라고 남들을 동정하는 걸까? 믿고 싶지만 믿을 수 없는 내 나라에 돌아간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할까? 돈이 전부는 아닌데, 남의 연봉 앞에서 나는 왜 작아질까. 여기는 정말 음악의 도시일까? 이번 여행은 교향곡 습작처럼 잊혀지는건 아닐까? 창밖을 보는 선배는 도로의 이정표를 느리게 읽었고, 버스가 정류장에 멈출 때 마다 승객들은 울컥거렸다.

매거진의 이전글 가버린 날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