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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는 이기적인 존재들

by 조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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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이 됐을 때 고등학교 미술 선생님은 소주잔을 채우며 말했다. 행간의 의미를 아는 남자가 좋다고. 그 말이 참 멋있다고 생각했다. 무슨 뜻인지는 몰랐지만 어디 가서 써먹을 멋진 문장 하나를 얻었다는 게 정말 좋았다. 선생님과 전시를 볼 때는 이것저것 아는 척했는데, 감상을 말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건 감상보다는 해체이고 분석에 가까웠다. 정규교육의 폐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교육부 탓은 아니다. 미술을 감상하기에는 그때의 나는 너무 산만했다. 미술작품을 보고 충격을 받거나 오감이 짜릿하다는 경험은 전무했다. 시와 소설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래서 행간의 의미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대신 영화와 음악에 빠져 있었다. 텍스트에 숨겨진 의미를 찾기도 전에 눈과 귀에 쏟아지는 자극들에 정신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시청각을 자극하는 것들은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다. 특히 영화는 90분을 몰입한 다음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야 느낀 감정들을 복기하는 것이 여운을 즐기는 방식이었고, 음악은 들으면서 상상하고 멜로디를 느끼는 것이었다. 1차원적인 감각 행위라는 점에서 단순한 나와 잘 맞았다고 본다. 글을 읽기 시작한 건 유흥이 독서뿐이던 수감 아니 군 복무 시절부터다. 그때 처음 남의 생각을 읽었다.


문학은 빨리 넘길 수 없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글로 쓰지 못한 흐름을 놓쳐선 작가의 생각을 알 수 없다. 도스토옙스키처럼 길고 비슷한 러시아 이름을 반복적으로 쓰는 작가라면, 얘기가 다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문학은 서사만 알고 넘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시는 행간을 직접 사용하고, 1인칭 관점의 소설은 작가의 생각이 멜로디처럼 펼쳐진다. 그러니 문학을 읽는 것은 화자에 빙의되어 작가의 생각을 답습하는 행위이며, 그렇기에 보고 듣는 다른 장르로는 치환할 수 없는 것이다. 남의 머릿속에 들어가 뇌의 시냅스들을 코딩한다는 건 불가능하니까. 어쨌든 지금 기술로는 안되니까. 그러니 소설을 읽는 건 인내심이 필요하다. 예외도 있는데, 화자가 흥미롭지 않은 인간일 경우, 혹은 화자가 처한 상황이 자극적이지 않다면 그때는 책을 덮어도 무죄다. 300페이지 분량의 소설 한 권을 정독하려면 적어도 4시간은 필요하다. 긴 시간 작가의 생각이 내 안에서 부딪히며 공감과 비판을 일으킨다. 내적 충돌은 예술작품 그러니까 이야기나 이미지 등 누군가의 발언을 이해할 능력을 키워준다. 여기서 반론, 속독하는 사람은 소설을 빨리 읽지 않냐고? 30분 만에 한 권 읽는 사람도 있다는데, 그들이 얼마나 글을 이해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속독의 기준이 내용 파악에 있으니 ‘내용만’ 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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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만 인식하는 감상 방식은 영상 콘텐츠에서 두드러진다. 영화에서 지루한 장면이 나오면 ‘앞으로 가기’를 누르고, 재생속도 1.5배속은 이제 ‘국룰’이다. 이보다 더 간편한 건 유튜브에서 마법의 단어 ‘결말포함’을 영화 제목과 함께 검색하는 것이다. 지루한 작품이라 할지라도 15분 내외로 압축하면 볼만하다. 한 시간에 영화 3편은 거뜬히 본다. 짧은 시간 동안 더 많은 작품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압축된 유튜브 영상도 ‘앞으로 가기’를 눌러서 보니 실제 시청시간은 10분 이내였다. 굳이 ‘빨리감기’습관의 기원을 찾자면 야동일 것이다. 2시간 반짜리 AV를 풀타임으로 보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 자괴감을 견디기 힘들기도 하고, 욕구를 즉각적으로 채우기엔 비효율적이다. 야동은 필요한 맞는 부분만 선택해 보는 1인용 영상 콘텐츠다. 건너뛰기는 기본이고, 요즘은 많이 본 구간이 표시되어 효율성도 향상됐다. 홀로 영상 콘텐츠 시청 시 빨리 넘겨 보는 사용자는 야동을 본 인구만큼이나 많을 것이다. 그들에게 1인용 영상 콘텐츠를 제공했을 때, 제아무리 잘 만든 예능이나 영화, 드라마라 할지라도, 이미 손가락은 방향키에 올라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사용자가 홀로 OTT를 볼 때 ‘앞으로 가기’를 누르는 건 영상을 효율적으로 보아온 습관이라 할 수 있다. 나는 평균 1시간에 5편 정도 본다. 기승전결만 이해하기에 작품의 아이디어만 보는 행위라 하겠다. 이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우린 봐야 할 게 너무 많고,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남의 노력과 고민을 온전히 고찰하는 데 시간을 쓸 만큼 마음에 여유가 없다.


시간이 없는 건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게 너무 많아서다. 정보의 포화 상태에서 살아가는 건 해로운 정보에 휩쓸릴 수 있다는 뜻이다. 편견이나 그릇된 사상도 해당하지만 여기서 다루는 건 자기 존재를 약화하는 기제들이다. 소셜미디어를 안 한다는 소리는 자랑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특히 인스타그램이 그렇다. 소소한 일상이라지만 실상은 이 시대에 실현하기 어렵다는 여유로운 삶을 보여주는 포스팅인 경우가 많다. 화려한 외모와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주는 포스팅은 말할 것도 없고, 문화 이슈에 대한 지식을 자랑하듯 늘어놓는 것도 그런 삶과 동떨어진 사람들에게는 이뤄야 할 ‘미션’이 된다. 인스타그램에선 자신의 매력을 알리고 받은 사랑과 관심이 수치화되어 비교 가능해진다. 하지만 게으른 우리는 미션을 수행하기엔 책무에 지쳤다. 왜 월급에는 관심과 사랑이 포함되지 않는가? 사회에서 관심과 사랑을 얻으려면 남 못지않은 존재감을 보여줘야 하는데, 그 과정에 요구되는 것들이 너무 많다. 외모를 가꾸는 것도 맛집을 찾는 것도, 예능을 보고 감상평을 남기는 것도 자기 존재를 알리기 위한 일이 됐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같은 익명의 공간은 자신의 존재를 더 억압한다. 전문직, 대기업, 고학력, 서울 아파트 소유 같은 게 평균처럼 묘사되고, 이에 해당하지 않는 지잡대, 3백충, 무주택자 등은 실패한 인생처럼 인식된다. 물론 인생은 절대로 몇 가지 요소로 평가하고 순위를 매길 수 없다. 그러나 소셜미디어와 커뮤니티에서 얻은 경험은 자기 존재에 대한 불확실성과 위기로 이어지며, 이는 자유로움보다는 노력하고 발전해야 한다는 억압이 된다.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면 자격증이든, 실적이든, 기술이든 개발해야 한다. 그런데 물가는 오르고, 수익은 제자리다. 자기 계발과 생존 사이에서 존재를 인정받기 위한 생활에는 여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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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일상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은 숏폼과 같은 짧은 콘텐츠다. 과거 ‘유머콘텐츠(밈)’에서 얻는 즐거움을 숏폼이 대체하고 있다. 유머콘텐츠는 짧고 간단한 내용이라 게임처럼 긴 시간이 요구되지 않는다. 언제든 창을 닫고 나올 수 있는 단편물이란 점에서 바쁜 현대인이 해야 할 일을 미루고 양심적으로 즐길 수 있는 쓸데없는 딴짓이 됐다. 하지만 유머콘텐츠가 그렇듯 숏폼 역시 짧지만 연속되어 빠져나오기 쉽지 않다. 보다 보면 더 웃긴 게 나올 것 같으니 슬롯머신 레버 당기는 마음으로 계속 스크롤을 내리게 된다. 그러니 결코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건 아닌 셈이다. 바쁜 사람들을 개미지옥처럼 끌어들이고 있다.


숏폼이 바꾼 대표적인 콘텐츠는 음악이다. 유행가 척도가 틱톡 스트리밍 횟수로 평가된 이후, 음악도 틱톡의 빠른 영상에 적합한 형태로 변하고 있다. 팝적인 요소를 강조하거나, 빨리감기를 하는 것이다. 곡 전체를 듣지 않고 절정 부분만 듣는 것도 숏폼 시대의 음악 청취법이라 할 수 있다. 이외에도 효율성은 현대사회의 미덕처럼 여겨지고 있다. 이젠 검색도 비효율적이다. ChatGPT한테 물어보면 되는데, 검색해서 자료 찾는 것도 번거롭다. 남는 시간에 다른 일을 한다. 예를 들면 숏폼을 보면서, 유튜브에서 결말포함을 검색하며 당장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기를 미룬다.


하지만 콘텐츠를 빨리감기로 요약하길 원하는 건 수용자일 뿐이다. 콘텐츠는 더 길어질 가능성도 있다. 이유는 생산자는 압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 영화는 90분도 모자라 2시간 가까운 시간 상영한다. 2시간으로도 다 할 수 없어 10부작 드라마로 만들기도 한다. OTT에서 드라마가 늘어나는 것은 사용자를 오래 붙잡아 두길 원하는 플랫폼의 의도와 더 많은 이야기를 심도 있고 폭넓게 다루고자 하는 생산자의 바람이 섞인 것일 테다. 음악도 그렇다. 음악방송용 3분짜리 음악 트렌드에서 5분이 넘는 윤하의 ‘사건의 지평선’이 역주행했다. 윤하는 5분 이내로 곡을 줄일 수 없었을 것이다. 글도 그렇다. 글쓴이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쓴다. 아무리 정리해도 설명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행간에 모든 의미를 담을 순 없다. 마지막에 3줄 요약을 남긴다고 하여도 전체 분량은 글쓴이의 절실함과 비례해 길어진다. 생산자는 줄이고 싶지 않고, 자신의 창작물이 효율적으로 다뤄지길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무리 상업적이라 하여도 작품에는 창작자의 어떤 영혼 같은 게 깃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관심과 사랑을 요구하는 존재들이다. 인스타그램을 안 한다 해도, 빨리감기로 영화를 보아도 내 얘기만은 진지하게 들어주길 원하는 이기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모터스라인> 2023 vol.1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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