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칼럼 백업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진혁 Mar 18. 2024

피터팬 말고 네버랜드

네버랜드 신드롬

<드래곤볼> 피겨를 사는 건 이상한 게 아니잖아? 하지만 야무치 피겨를 웃돈 주고 구입한 건 조금 과했다. 나이 마흔에 손오공 도복 세트를 사 입었던 건... 그때는 선을 아득히 넘었던 것 같고. 심지어 핼러윈도 아니었다. 하지만 손오공 도복을 입으면 ‘에네르기파’를 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여튼 분명히 하자면 내 취미는 피겨 수집이 아니다. 당연히 만화책 수집도 아니고, 플레이스테이션도, 게임보이도, 80년대 할리우드 B급 호러 영화 감상도 취미는 아니다. 링크드인 취미란에 쓰는 건 전시 감상과 골프, 요리. 어른의 취미다. 


어른은 주말을 이렇게 보낸다. 업계 동료와 함께 전시를 보고, 잘 모르는 작가에 대한 이러쿵저러쿵 평가한다. 서울 부동산 시장과 반도체 파운드리 전망에 대한 뜬구름 잡는 소리도 한다. 그러다 내가 잘 모르는 깊이까지 대화가 나아가면 동의하지 못하겠다며 주제를 바꾼다. 요즘 누구네 사업이 잘 나가는지, 누가 영업을 잘하는지, 하지만 그들 모두 알맹이 없는 가짜라며 결론짓는다. 그리고 잠깐의 침묵. 패자는 말이 없다. 패자는 행동만 할 수 있다. 등 돌려 그라운드를 빠져나가는 강등권 팀처럼. 그렇게 어른의 주말은 적당한 열패감으로 마감된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40대 남자가 하는 일을 한다. 회사에 출근하고, 성과를 내기 위해 고민하고, 발전하기 위해 노력한다. 아쉬운 소리 안 하고, 미움 사지 않고, 어른답게 문제를 해결한다. 


어른과 아이를 구분 짓는 기준은 책임의 범주다. 어른이 되면 프로젝트, 팀원들, 연로한 부모님, 처자식, 내 미래, 늙은 개까지. 사랑하는 사람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야 한다. 사랑하지 않는 팀원들도 책임져야 하고. 그러나 책임은 불안이다. 사고의 책임이 현장이 어딘 줄도 모르는 책상머리 앞 책임자에게 있듯, 내 사람들에게 언제 어떤 불행이 닥칠지 알 수 없어 불안하다. 얼음 호수 위를 걷는 삶이다. 이 상태로 열심히 살아도 나보다 좋은 아파트, 좋은 차를 타는 사람들은 늘어만 간다. 경쟁에서 초월해질 때도 됐는데, 나날이 나이 드는 부모님에게도 해외여행 시켜주고 싶은 마음은 절실해진다. 커가는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다. 내가 절망에 빠진 사람처럼 보이나? 아니다. 그 어렵다는 평범한 삶이다. 이제는 책임감에 익숙해졌다. 책임질 사람이 있다는 것은 나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단지 아주 작은 보상이 필요할 뿐이다. 그게 야무치 피겨와 손오공 도복이라서 그렇지. 


네버랜드 신드롬은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유지하려는 욕구를 뜻한다. 어린 시절 좋아했던 것들을 다시 경험하며 그 나이로 돌아간 기분을 느끼고, 20대들의 놀이와 패션을 즐기며 나이 듦을 거부하고, 캐릭터나 카드 뉴스로 정보를 주고받으며 아이처럼 재밌게 노는 현상을 네버랜드 신드롬이라 해석한다. <드래곤볼> 코스프레를 하고 주식 단타 매매를 하는 것도 네버랜드 신드롬일 것이다. 


네버랜드 신드롬은 정서적 성숙을 거부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피터팬 신드롬과는 다르다. 네버랜드 신드롬의 이면에는 경쟁에 지친 자신에 대한 위로이자 책임에 대한 보상이 숨어있다. 세상에는 ‘어른이’을 위축시키는 것들은 너무 많다. 반드시 봐야만 하는 것들, 이를테면 소셜미디어와 트렌드 뉴스가 그렇다. 소셜미디어에선 다들 자기 행복을 과시한다. 남의 행복을 작은 화면으로 빠르게 스크롤 하다 보면 내 안에 ‘싫어요’가 쌓인다. 반대로 내 행복을 과시하다 보면 ‘좋아요’에 굶주린 도파민 중독자처럼 되기도 한다. 소셜미디어를 사용할수록 작은 불행이 차곡차곡 쌓인다. 트렌드 뉴스는 어떠한가. 잘 모르는 아티스트와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는 놀이문화와 멋진 것 같지 않지만, 인기 많은 신제품을 공부하듯 읽게 만든다. 읽고 보고 들어야 하는 정보가 너무 많다. 암기력은 떨어져 가는데, 고유명사 외우기가 힘든데, 왜 랩 하는 친구들은 본명을 안 쓰는가? 


트렌드를 놓친 기성세대가 되지 않으려면, 부단한 노력과 조금의 뻔뻔함이 필요하다. 이 와중에 희소식은 나이 들어 경제력이 강해진 내 세대가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상품을 소비하기 시작했다는 것일 테다. 아버지가 7080 콘서트에 열광했던 것처럼, 선배들이 <응답하라 1994>를 보던 것처럼, 이제는 우리가 2000년대 문화를 소비하고 있다. 시장도 주 소비층에 맞춰 2000년대 상품을 출시한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에 있던 물건들, 워크맨, 유선 이어폰, 핸디캠 같은 것들, 우리가 어렸을 때 열광했던 것들이 다시 유행한다. 다시 우리의 시대가 왔다. 지금까지 달려온 우리에게 주어진 잠깐의 휴식이자, 위로이며, 보상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쩐지 시한부 선고처럼 들리기도 한다. 우리가 <90년생이 온다>의 주역들에게 바통을 넘길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어른이 되면 어떤 기분일까? 기성세대를 마음껏 비난하던 때는 몰랐다. 어른들은 뚱뚱하고, 힘도 세니까. 마음도 강한 줄 알았다. 사실은 깊이 생각해 본 적 없다. 아이들은 어른의 마음을 이해하지 않는다. 이해하려 든다면, 그건 슬픈 상황일 거다. 철없는 아이들은 경험해야 할 게 너무 많다. 스무 살에 겪는 생경함을 생각해 보라. 연애와 상실, 불안한 미래와 대상 없는 적의 같은 것들이 내 안에서 끊임없이 충돌한다. 그 사이에 교수님의 남모를 감성은 들어올 틈이 없다. 그런데 책임질 게 많은 어른이 되어 보니, 힘은 없지만 뚱뚱해졌다. 머리숱도 조금 줄었고, 체력도 떨어졌다. 변한 건 그뿐이다. 외형과 놓인 처지를 제외하면 그대로다. 스무 살이 20년째 계속되고 있는 것 같은데, 거울에는 아저씨가 있다. 그게 낯설어 거울을 덜 보고, 셀피도 덜 찍게 된다. 용돈 모아 만화책을 사고, 플스방에서 밤을 새우고, 돈이 없어 피겨는 구경만 하던 그때와 나는 다르지 않다. 여전히 도전은 무섭고, 미래는 불안하고, 상실감도 채워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다. 돈은 더 많다. 세금에, 생활비에, 상환금에 떼면 뭐 아주 많은 건 아니지만 10만 원짜리 피겨나, 4만 원짜리 피콜로 코스튬 정도는 고민 없이 살 수 있는 재력이다. 그렇다고 어른이 되길 거부하는 피터팬 신드롬은 아니다. 어른의 책임을 다하고 있기에 ‘어른이’를 누리는 것이다. 피콜로처럼 옷 입고, 언젠가 ‘마관광살포’를 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 모터스라인, 2023년 Vol. 3

매거진의 이전글 현실과 마법 사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