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쉐 제주 드라이브 후기
지난 4월 포르쉐는 제주도에서 ‘겟어웨이 미디어 드라이브 2023’를 열었다. 비현실적인 풍경 가운데 포르쉐 대배기량 모델들이 마법을 부렸다.
환기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봄이 되자 겨울내 미뤄둔 업무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해야 할 일은 많고,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배워야 할 것이 많았다. 복잡한 마음에 포르쉐가 들어왔다. 포르쉐는 지난 4월 제주에서 미디어를 대상으로 ‘겟어웨이 미디어 드라이브 2023’을 개최한 것이다. 이름 그대로 잠시 현실에서 벗어나 포르쉐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자는 취지로, 1박 2일간 차량을 시승하며 75주년을 맞이한 포르쉐 브랜드 역사와 가치를 경험하는 행사였다. 행사 참여를 신청하고 나니 지친 마음에 포르쉐 감성이 살랑살랑 일었다.
제주공항에 도착하자 폭우가 쏟아졌다. 오후 3시였다. 파라다이스 같은 제주를 기대했지만, 스콜이 몰아치는 남국의 우중충한 하늘만 보였다. 호텔까진 자동차로 1시간 거리였다. 이동하는 내내 미니버스 루프에는 천둥 번개와 굵은 빗줄기가 쏟아졌다. 창밖은 어둡고, 바다는 평소 보다 더 일렁이는 듯 했지만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대서사시의 도입부 같았으니까. 호텔에 도착하자 비가 그쳤고, 버스에서 내리니 호텔 직원들과 포르쉐 행사 담당자들이 마중나와 있었다. 안내에 따라 라운지로 이동해 웰컴 드링크를 마시며 다른 일행을 기다렸다. 호텔은 전반적으로 고요했다. 라운지 창밖으론 수영장에서 물놀이하는 외국인 가족이 보였고, 그 너머로는 바다가 있었다. 어제까지 회사에서 겪었던 치열한 일상과는 달랐따. 오후 내내 이어진 폭우와도 다른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팬데믹 이전의 여름 휴가 같은 것들이 떠올랐던 것 같다.
곧이어 저녁 만찬이 이어졌다. 레스토랑에선 제주에서 채집한 식재료를 이용한 특별한 요리가 제공됐다. 서버들은 코스가 진행될 때 마다 셰프의 의도와 정성, 먹는 방법을 세세하게 설명했다. 근사한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호화로운 음식을 경험하니, 미식 기행을 온 게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마이크를 잡고 환영 인사를 한 주현영 이사에 따르면 ‘겟어웨이 미디어 드라이브 2023’는 일상에서 해방되어 포르쉐와 함께 즐겁고 편안한 휴식을 경험하는 것이 목적이라 했다. 그러고 보면 포르쉐는 라이프스타일 보다는 기술과 혁신이 먼저 떠오르는 브랜드다. 자동차 기술이란 복잡한데, 특히 모터스포츠를 기반으로 한 포르쉐의 경우에는 각주가 필요할 정도로 어렵고 신기한 기술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포르쉐의 신기술을 설명하다 보면 포르쉐가 지향하는 라이프스타일은 놓치곤 한다. 어쩌면 이번 행사는 포르쉐에서 무엇을 경험하고, 어떤 라이프스타일을 누릴 수 있는지, 적절한 예시가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 오리엔테이션이 있었다. 주행 방식과 코스 설명, 유의사항 등이 전달됐다. 시승회에는 국내 판매 중인 포르쉐 전 차종이 동원됐다. 정확히 각 모델에서 고성능과 에디션 모델 등 특별한 모델 중심으로 선정됐다. 시승은 2인 1조로 편성됐으며, 각 조는 차량 2대를 시승했다. 어떤 모델을 탈지는 운에 달려있었다. 제비뽑기였다. 개인적으로는 타르가 디자인이라 불리는 ‘포르쉐 911 에디션 50주년 포르쉐 디자인’을 타고 싶었다. 근사한 블랙 보디에 타르가 오픈 에어링이 주는 독특함을 느끼고 싶었다. 그것도 제주에서. 하지만 나의 운명의 신은 ‘718 박스터 GTS 4.0’을 선택했다. 오히려 좋다. 대배기량 엔진음이 주는 즐거움도 크다. 또 다른 차량으로는 ‘타이칸 크로스 투리스모’를 원했다. 순수전기차인 타이칸의 고요함과 민첩함을 경험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최대 1,200ℓ의 넉넉한 적재공간과 사륜구동, 비포장도로 주행도 가능한 에어 서스펜션이 장착된 올 라운더 전기 스포츠카이기 때문이다. 또한, 선샤인 컨트롤 기능이 들어있는 파노라마 선루프도 경험하고 싶었다. 장대하게 펼쳐진 선루프에 빗물이 떨어지는 모습도 구경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 운명의 전도사는 ‘카이엔 터보 쿠페’를 골랐다. 물론, ‘카이엔 터보 쿠페’는 드림카다. 가족을 태우고 스포츠 감성을 즐길 수 있는 SUV는 많지 않다. 탁월한 고속 주행 안정성이란 SUV에서 보기 드문 미덕을 가졌다. 또한, 루프 라인이 완만한 곡선을 이루는 쿠페 실루엣에선 역동적인 멋도 느껴진다.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호텔 앞에 포르쉐 전 차종이 도열해 있었다. 그 모습이 꽤 근사했는데, 이어지는 시승에선 더욱 멋진 도열 장면들을 보게 됐다.
오전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카이엔 터보 쿠페’ 앞유리에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졌다. 빗길에 통행량도 많아 퍼포먼스 보다는 안전하게 대열을 유지하며 이동했다. 국도에 들어서자 차량이 줄었다. 하지만 안개는 더욱 짙어졌다. 가시거리가 짧아 다들 서행하는 분위기였다. 느긋하게 이동하며 ‘카이엔 터보 쿠페’의 실내를 감상했다. 천정에는 총 면적 2.16m²의 고정식 파노라믹 글래스 루프가 장착되어 개방감이 시원하고, 운전석을 중심으로 1열은 카본과 알칸타라로 마감해 레이싱카의 감성도 풍겼다. 스포츠 시트는 옆구리를 단단하게 받쳤다. 애플카 플레이어를 연결해 최신 걸그룹 음악을 따라 부르는 것도 소소한 재미였다. 오디오는 보스 서라운드 시스템이다. 사운드가 입체적이고 깨끗하다. 험준한 건 아니지만 비포장도로를 지났다. ‘카이엔 터보 쿠페’는 온로드에 최적화된 SUV이지만, 기본·자갈·진흙·모래·바위 5개의 오프로드 주행모드를 제공해 흙길 정도는 쉽게 통과한다. 빠르게 주행 모드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어댑티브 3챔버 에어 서스펜션이 기본 사양으로 장착됐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부드러운 승차감을 보이고, 노면 상태나 주행 모드에 따라 섀시의 감쇠력을 3단계로 조절할 수 있다. 아이브를 부르다 보니 어느덧 가시리 국산화풍력발전단지에 도착했다. 제주의 바람을 담은 친환경 단지로 조성된 곳으로 풍력 발전기 사이로 잔디가 넓게 펼쳐져 있다. 캠핑하기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보란 듯이 포르쉐는 타이칸 루프텐트를 전시해 놓았다. 타이칸 지붕에 설치하는 하드쉘 타입의 루프 텐트다. 내부 매트가 푹신하고 깔끔하다. 80kg 이상의 성인 남성이 누워도 끄떡 없었다. 이와 함께 간단한 간식, 미니 피크닉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오래 머물 것 같던 안개가 사라졌다. 다음 코스는 한라산에 오면 반드시 가봐야하는 필수 주행코스인 1100고지였다. 한라산 고원지대는 고저차가 큰 업다운 코스로, 굽이진 코스가 자동차 성능을 몰아붙이기 제격이다. ‘카이엔 터보 쿠페’의 트윈 터보 차저 4리터 V8 엔진은 최고출력 550마력, 최대 토크 78.6kg·m을 발휘한다. 시속 100km까지 가속력이 3.9초에 불과하다. 강력한 힘을 굽이진 코너에서 발휘하면 좌우로 크게 흔들릴 수 있다. 특히 무게 중심이 높은 SUV라면 그렇다. 하지만 ‘카이엔 터보 쿠페’의 어댑티브 리어 스포일러와 루프 스포일러는 뒷바퀴 접지력을 높이고, PTM 사륜구동 시스템이 균형을 유지했다. 운전대를 돌릴 때 마다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니 그야말로 손맛이 탱글탱글했다. 그러나 이번 프로그램의 취지는 퍼포먼스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었다. 주변 환경을 감상하며 여유도 부려야 했다.
오후에는 ‘718 GTS 4.0’을 시승했다. 시동을 걸고 지붕부터 개방했다. 제주의 바람과 4.0L 6기통 박서 엔진의 배기음도 온전히 느끼고 싶었다. 역시 최신 아이돌 음악을 틀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BGM이었다. 메인 연주는 엔진이 다 했다. 우리는 산을 빠져나와 사계 해안도로로 향했다. 산방산 절경을 따라 이어진 서쪽 해안은 눈이 즐거운 코스였다. 주행모드를 스포츠로 설정하고 직선 코스에선 속도를 즐기기도 했다. 순식간에 7,800rpm에 달하는 빠른 응답성과 정밀한 핸들링, 포르쉐 세라믹 컴포지트 브레이크의 강력한 제동력에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차량은 시종일관 낮은 자세를 유지했고, 코너에선 노면을 움켜쥐고 달렸다. 무게 중심이 크게 쏠려도 섀시는 견고하게 차체를 받쳤고, 균형을 잃지 않았다. 고속 주행 안정성의 바탕에는 혁신적인 기술들이 있었다. 포르쉐 액티브 서스펜션 매니지먼트는 10mm 낮은 지상고를 제공하고, 스포츠 모드를 지원하는 포르쉐 스태빌리티 매니지먼트매니지먼트는 차체 균형을 유지하며, 기계식 리미티드 슬립 디퍼렌셜을 지원하는 포르쉐 토크 벡터링 시스템은 오버스티어 발생을 제어한다. 운전자가 어느 상황에서도 균형을 잃지 않도록 배려했다. 차만 믿으면 된다. 포르쉐만 믿고 달리면 된다. 어느덧 대열은 관광지에 접어들었다. 노을 해안로는 카페가 밀집한 지역이다. 관광객들이 우렁찬 배기음에 놀랄까 조심해야 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대배기량 포르쉐 행렬을 보곤 휴대폰을 꺼내 촬영했고, 잠깐이지만 연예인이라도 된 기분이 들었다. 특히 수학여행 온 고등학생들은 지붕을 개방한 우리 차량을 보고서는 크게 환호했는데, 우리는 배기음으로 화답했다. 관광지를 빠져나오자 바다가 넓게 펼쳐졌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돌고래 떼가 있었다. 수면 위로 점프하며 이동하는 돌고래 떼의 형상을 보고 포르쉐의 루프라인을 떠올렸다면, 너무 심취한걸까?
제주 고산리유적안내센터에 도착해선 운전자를 교대했다. 다음 목적지는 한림 해안로였다. 푸른 제주를 벗삼아 여유롭게 운전하는 해안코스다. 차량 통행량이 많아 교통정체가 발생하는 구간으로 빨리 달리는 것 보다는 안전하게 달리는 게 먼저였다. 바닷바람과 비가 개인 제주의 파란 하늘, 6기통 박서 엔진 소리, 최신 아이돌 인기가요까지. 비현실적인 순간이었다. 깊이 고민할 것도 오래 생각할 것도 없었다. 사실 별 생각 없었다.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걱정이 사라졌다는 것만으로도 마법 같았다. 최종 목적지는 공항에서 지척거리의 카페였다. 카페에선 커피와 디저트를 먹으며 돌아갈 채비를 했다.
이날 두 대의 차량만 시승했지만, 사실 더 멋진 차량들이 많았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지붕을 개방하고 달리던 911 카레라 S 카브리올레, 근사한 실루엣의 911 카레라 4S 쿠페, 와인딩 코스에서 내심 부러웠던 718 카이맨 GT4, 가속에서 민첩함을 보여준 타이칸 GTS, 솔직히 가장 편해 보였던 파나메라 4E-하이브리드 플래티넘 에디션과 파나메라 터보 S, 카이엔 E-하이브리드 쿠페 그리고 마칸 GTS까지 모두 일탈하기 좋은 모델들이다.
-포르쉐 매거진 <크리스토포러스> 2023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