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적 독후감
어떻게 살아야할 지 모를 때는 <토니오 크뢰거>를 읽는다.
우리 집은 섬 끝에 있다. 한강과 안양천이 만나는 지점, 이등변삼각형 꼭짓점에서 동쪽을 향해 서 있다. 베란다에선 한강이 보이고, 복도에선 안양천이 보인다. 서울은 강남과 강북으로 나뉘는데, 우리 집은 강남과 강북 사이, 강과 천 사이에 동떨어져 있는 나 홀로 아파트다. 우리 집이 내 처지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주류도 아니고 비주류도 아닌 것. 주류가 아닌 것은 전부 비주류 아니야? 그렇지만 비주류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것이 있다. 그 수가 너무 적어 구분하는 걸 잊곤 하는 부류다. 나는 그런 부류로 남겨져왔다. 학창 시절에는 공부를 잘하지 못했고, 리더십 있는 축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말썽을 피우지도 못했다. 어디에도 속하진 않지만 그래서 누구와도 어울릴 수 있었다.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사람으로 살아왔다. 그런 내게 세상은 정과 반으로 나뉘어 보였다.
토니오 크뢰거는 독일 북부 지역의 유서 깊은 집안 자식이다. ‘열네 살밖에 안 되었지만 어른들로부터 먼저 인사를 받기도 하였다’고 한다. 토니오는 라틴계 이름이고, 크뢰거는 독일계 이름이니 반은 독일계, 반은 라틴계다. 남다른 혈통이 그를 갈등하게 만든다. 독일인 아버지는 사업가고 시민적이라면, 라틴계 어머니는 예술가다. 쓰다 보니 이 커플 꽤 괜찮다. 상반된 성향이 서로를 보완해주지 않나. 하지만 이상적인 결합에서 태어난 아이는 분열을 생각했다. 토니오는 어머니의 갈색 피부와 남국적인 외모를 물려받았다. 예술적인 재능까지. 축복이다. 어린 토니오는 고마운 줄 모르고 남의 집 애들이나 부러워하며 쫓아다닌다. 그는 친구 한스의 금발과 푸른 눈을 동경했다.
한스는 영웅과 같이 말을 타고, 수영과 체조, 못하는 게 없으며 반에서 1등을 하는 우등생이자 부유한 집안 자제였다. 한스를 토니오와 대비되는 인물로 그리려다 보니 엄친아를 너머 약물 투입 직전의 슈퍼히어로쯤으로 묘사된다. 토니오와 극명하게 다른 점은 인기가 많다는 거다. 사람들은 한스를 사랑한다. 그걸 옆에서 매일 봐야만 하는 절친 토니오가 느낀 소외감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토니오는 한스가 모든 면에서 자신과 정반대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토니오가 한스처럼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한스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해주길 바랐다.
토니오의 열망은 고통과 우울을 동반한 슬픔으로 이어졌다. 경쾌하게 걷는 한스와 달리 토니오의 걸음은 축 늘어졌다. 글에는 묘사되지 않았지만 나는 토니오 어깨가 굽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처럼.
논쟁을 즐기진 않지만 입장을 정해야 할 때가 있다. 대선을 앞둔 2008년 즈음이었던 것 같다. 자취방에서 술 마시다 선배가 물었다. 이쪽이냐? 저쪽이냐? 무엇이 내 가치관과 더 맞는지 선택해야 했다. 이쪽에 서면 저쪽이 옳지 않았고, 저쪽에 서보니 이쪽이 옳지 않았다. N극과 S극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법을 익혀나갔다. 철가루가 몰린 쪽으로 다가가는 게 처세술이고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눈치를 보며 대세에 따라 어물쩍 상황을 넘겼다. 하지만 균형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깨질 때도 있었다.
사랑해? 사랑하지 않아? 사랑한다고 말하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고,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헤어져야 했다. 당연한 일. 나는 사랑하고, 너는 사랑하지 않아도 돼. 이런 관계는 성립되지 않는다. 나는 정말 논쟁을 싫어하는데, 자신의 생각만 떠들고 강요하는 지루함 때문이다. 논쟁의 결론은 명확하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 옳은 것을 선택해야 하지 않냐고? 그럼 다시 자신의 생각만 강요하는 지루한 과정이 반복된다. 흑백논리는 부정하고 싶지만 입장을 표명할 때는 선택지가 흑과 백뿐이다.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나는 너를 사랑할 것이다. 그건 내 안에서 이루어진 선택이다. 우리의 관계는 닫힌 상태로 영원할 것이다.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너는 왜 옳지 않다고 말하나? 사랑하는 것도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닌 그 사이의 어정쩡한 곳에 마음을 두었다.
토니오는 열여섯 살이 된다. 그도 사랑에 빠진다. 잉게보르크 홀름이라는 소녀의 평소와 같은 모습, 평소와 같은 행동을 본다. 다만 날씨가 조금 눈부셨다. 그리고 토니오는 다짐한다. “살아 있는 한 잉게보르크여, 그대를 사랑하겠노라!” 이건 자신을 향한 선언이자,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삶을 선택한다는 외침이다. 사랑에 빠진 소년은 시를 쓴다. 하지만 그가 쓴 시는 보내지 못한 겁쟁이의 편지이며, 그런 자신을 다그치는 채찍같은 것이다. 토니오는 사랑을 얻지 못하고 재능을 인정받는다. 구애에 실패한 소년에겐 구애의 열띤 시도만 재능으로 남는 법이다. 토니오 크뢰커는 시인이 된다.
작가가 되려면 이기적이어야 한다. 시를 쓰던 형이 말했다. 나는 고민했다. 글보다 기술을 배우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할 줄 아는 기술은 변변치 않은 것이었다. 남들만큼 노력해 취업 시장에서 경쟁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시를 썼던 것 같다. 현실은 치열하니까. 시를 쓰려면 병든 가족과 기운 가세로부터 등 돌릴 용기가 필요하다. 못 본 척하는 건 죄라 생각했고, 죄책감을 이겨낼 힘이 없었다. 그리고 게을렀다. 노력할 자신이 없었다. 사랑이나 사랑으로 인한 적개심이나 분노 같은 게 남아 있지 않았다. 내게는 잉게보르크 홀름 같은 존재가 없었다. 이기적이지 못해서 이타적인 사람이 됐다. 이제는 내가 이타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현실에서 도망칠 자신도, 죄책감을 감내할 힘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예술가의 삶을 상상하는 것이 전부였다. 예술을 하지 않는 자는 예술가가 될 수 없고, 일하지 않는 자는 생계를 책임질 수 없다. 일하면서 소설 소재를 상상했고, 일을 마치면 상상은 증발했다. 내가 무엇을 떠올렸는지, 퇴근 후에는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10년 넘게 현실과 꿈 사이로 출근했다.
화가인 리자베타는 토니오에게 시민도 아니고 예술가도 아니라고 말한다. 예술가인 시민은 없나? 시민인 예술가는 존재할 수 없나? 둘은 양립할 수 없나?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지금 보면 그렇지만 1백 년 전 데카당스가 유럽을 휩쓸던 시절에는 예술가와 시민이 구분됐다. 예술가는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했고, 시민은 삶을 살았다. 예술가는 타고나는 것이고, 그것을 천직 삼아 정진하였다. 여기에 토니오는 문학은 저주라 말하며, 예술이 아닌 삶을 살고 싶다고 고백한다. 삶을 관찰하는 자가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토니오의 인생은 정반합의 과정이었다.
중년의 그는 핀란드로 떠나 우연히 한스와 잉게보르크를 보게 된다. 행복하게 춤을 추는 둘의 모습을 보고 운다. 토니오는 어둡고 쓸쓸한 세계에서 고뇌하며 살아왔다. 그 삶의 목적이 무엇이었을까. 위대한 시인이 되는 건 아니었을 거다.
이사할 때 거실에 3m 길이의 책상을 설치했다. 글도 쓰고 책도 읽으려고 마련한 책상에서 먹기만 했다. 마음을 굳게 먹으면 이 책상에서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마음이 안 생긴다. 집에서는 그냥 쉬고 싶다. 글을 쓰는 것 따위가 삶의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이 책상에서 족발을 먹으며 깨달았다. 겨우 글을 써서 성공하겠다는 것도 바람에 불과한 것이다. 숭고한 의지, 대단한 무언가를 만들겠다는 포부도 집에 오면 사라진다. 그래서 좋다. 스스로에게 대단한 목적을 부여하고, 세상을 나눠서 보고, 분열하며 성장하는 건 가짜 삶이다. 그건 진짜가 될 수 없다.
우리 집은 강남도 아니고 강북도 아니지만 뭐 어떤가. 어중간한 곳에서 사는 삶도 있고, 그것이 나쁘지 않다. 균형을 맞추려 노력할 필요도 없다. 애초에 대립은 없었다고, 안양천이 한강으로 흘러드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 아레나 옴므 플러스, 2022년 9월호에 기고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