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 사람들 - 배다리 텃밭 정자
일어날 시간도 아닌데 잠이 확 달아나 버렸다. 귀마개를 하고 자는 데도 소리가 귀를 열고 들어온다. 아니면 커튼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 때문이었을까. 정신을 가다듬는 데 시간이 한참 걸린다. 창문을 여니 새소리가 들이닥친다.
동틀 녘은 새들의 시간이다. 참새, 까치, 직박구리 그리고 까마귀까지 새소리로 동네가 요란하다. 옆집 할머니네 옥상 텃밭은 새들이 좋아하는 공간이다. 아침이면 빨랫줄에 앉은 새들을 종종 보게 된다. 우리 집도 새들이 좋아하는 곳이다. 현관 입구에 놓은 길고양이 밥을 직박구리가 와서 한 알씩 빼먹는다. 생각도 못했던 일이라 아내의 말을 한동안 믿지 못했다.
창을 열어두었는데 바람이 없다. 봄에는 바람이 잦더니 기온이 제법 올라가면서 바람도 잦아들었다. 출근하기까지 시간이 남았다. 30분만 녹음하자!
간단하게 녹음 장비를 챙겨 텃밭으로 나갔다. 텃밭에는 마을 정자가 있다. '마을'이란 말이 어울리는 배다리 동네에는 텃밭이 있고 '정자'가 있다. 동네 한복판을 가르는 산업도로가 될 뻔했던 곳이다. 주민과 행정당국이 오랜 싸움을 벌인 끝에 텅 빈 공간은 지금 텃밭으로 남았다. 그 끝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아무튼 지금 공터의 반은 주민들이 밭으로 쓰고 나머지 반은 관에서 꽃을 심는다.
'정자'
특별한 공간의 소리를 들려주는 음향다큐 <골목길 사람들> 시리즈 아이템을 찾으며 생각한 것이 정자였다. 한여름 정자에서 듣는 매미소리. 정자 그늘에서 쉬는 할머니들 이야기. 수박 먹는 소리. 음향으로 풀어낼 이야기가 많은 곳, 쉼이 있고 숨이 있는 공간이다. 하지만 요즘 도심에서 '정자'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여기저기 물어물어 찾아낸 곳이 바로 우리 동네, 배다리 정자이다. 업은 아기 삼 년 찾은 꼴이다.
정자에 녹음장비를 설치하고 보니 텃밭에는 이미 할머니들이 쪼그려 앉아 있다. 호미로 땅을 캐는 소리가 들린다. 웅크린 그 모습이 마치 바위처럼, 하나의 사물처럼 보인다. 이야기꽃을 피우기 좋아하는 할머니들도 아침 텃밭에서는 고요하다. 눈을 감고 새소리를 듣는다. 새들도 아침이 바쁘기는 마찬가지이다. 스르르 잠이 오려다 깜짝 놀라 깬다. 마을을 지나가는 1호선 전철 소리이다. 텃밭이 움푹한 공간이라 소리가 메아리치듯 확성되어 들린다. 소리에 울림이 있다. 출근 시간이 다가올수록 전철 소리가 잦다.
눈을 감고 생각해본다. 이 공간이 도시계획대로 8차선 도로가 되었다면 어땠을까. 공간은 지워지고 소리도 사라졌겠지. 새들도 떠났을 테고 할머니들도 어디론가 가야 했겠지. 마을도 정자도 사라졌을 테고. 도시재생이니 업사이클링이니 뭐니 재생할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테지.
공간이 있어야 소리가 채워진다. 공간이 있어야 쉼이 있고, 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