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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봉 Nov 07. 2022

햇볕 의자

햇볕 의자. 할머니들꺼. 버리거나 가져가지 말아요. 할머니 일동.


앞집 할머니가 사라졌다. 매일 아침 옥상에서 텃밭 돌보는 일을 하는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 할머니네 옥상과 우리 집 발코니가 마주한 터라,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열어도 되는지 그녀의 옥상을 염탐하는 게 내 하루의 시작이다. 할머니네 일 층에서 장사하는 주먹밥 이모에게 물어도 행방을 모른다. 어지간한 동네일을 다 아는 분인데 이모도 몹시 걱정하는 눈치다.


할머니가 사라지기 얼마 전 골목에서 그녀를 만난 일이 있다. 할머니는 다짜고짜 내 전화번호를 묻는다. 무슨 일이 있으면 전화할 데가 필요하다고. 이를테면 아프거나 혹은 무거운 걸 들거나. 허리 수술을 한 이후 무척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그게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할머니는 어디 가신 걸까. 옥상의 채소들은 다 시드는데. 상추를 비닐봉지에 담아 우리 발코니로 던지던 할머니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할머니와의 첫인상은 좋지 않았다. 구도심의 오래된 집을 고쳐 살려니 도시가스를 설치해야 했는데 앞집 할머니의 동의를 구해야 했다. 도시가스 공급관에서 집까지 거의 천만 원이 드는 비용을 우리가 부담하는 것도 황당한데, 그마저 이웃의 동의를 구하지 못하면 공사조차 못하는 거였다. 할머니는 당신 집 2층에 가스가 콸콸 안 나올까 걱정이었다. 수압이 낮은 수도관처럼 생각하신 거였다. 설명해드려도 막무가내였다. 혼자 사니까 무시하냐며. 우여곡절 끝에 겨우 가스를 연결했다. 참고로 도시가스 인입설치비 사용자부담 제도는 서울, 대전, 대구, 부산의 경우 폐지되었다. 인천과 경기도는 아직 비용의 50%를 사용자가 부담한다. 구도심을 재생하려면 이런 제도부터 개선해야 한다.


가을 햇볕 아래 빨간 플라스틱 의자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가까이 가서 보니 햇볕 의자라 쓰여 있다. 할머니 일동이 그렇게 이름 붙였다. 기막힌 작명이다. 해를 따라 움직이는 햇볕 의자. 온종일 골목에서 해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해바라기 할머니들. 사람은 없고 의자만 덩그러니 남았다. 따스한 가을볕이 그녀들에게 오래 머물기를.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햇살 한 움큼씩 주머니에 담아 갈 수 있기를. 골목길을 걸으며 기도한다.


(인천일보에 연재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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