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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봉 Jan 18. 2021

건축사들의 가정방문

아파트 전세난민 시절

다음 인터뷰 장소로 건축사들은 우리 집을 선택했다. 집에 대한 생각을 말로 듣는 것보다 어떻게 살고 있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일종의 가정방문이었다. 어떤 색을 좋아하는지, 가구는 뭐가 있는지, 구조와 인테리어는 어떤 스타일을 선호하는지 그런 것들을 알고 싶어 했다.    


하지만 가정방문은 그리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집이, 우리가 바라는 바를 제대로 설명해줄 리 없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면 학창 시절부터 가정방문은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는 누구를 집에 초대할만한 형편도 안 됐었고, 그래서였는지 방문의 의도 또한 탐탁치 않았다. 


건축사들의 가정방문은 그와는 다른 의도였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전셋집은 우리 취향이나 욕망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남의 집’일 뿐이었다. 우리 집도 아닌 곳에 돈을 들이고 싶지 않아, 지저분한 것만 가리고 살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런 곳에 와서 우리가 바라는 집의 미래를 가늠한다는 게 영 못마땅했다.      


당시 우리가 살던 아파트는 결혼 후 세 번째로 얻은 전셋집이었다. 결국 또 돈에 맞춰 아파트를 구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래도 이 집을 선택한 이유는 베란다 창 앞에 가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정남향 창을 통해 쏟아지는 햇살을 하루 종일 받을 수 있는 것이 큰 장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의 행복이었다. 그 햇살이 쏟아지는 베란다 외부창이 알루미늄 새시였다는 걸 이사 하고나서야 뒤늦게 발견했다. 맙소사. 아내도 나도 전셋집 집 구하기가 너무 어려운 나머지 그런 것까지 미처 살펴보지 못했다. 이 집을 선택한 단 가지 장점에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위안을 삼자면 지하철에서 집까지 걸어오는 길에 봄이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그나마 걸을 맛이 난다는 정도였을까.      


이 집을 선택한 또 다른 이유 아닌 이유도 있었다. 바로 우리가 살던 아파트 근처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전에 살던 집도 그 근처였다. 자신이 살고 있는 반경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그때 깨달았다. 마치 누군가 경계선을 그려놓고 주문을 건 것처럼, 그 테두리를 뛰어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니 아파트에서 단독주택으로 집의 형태를 바꾸는 일은 더구나 어려운 선택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처음 얻은 신혼집은 연수동의 작은 아파트였다. 연수동은 1990년대 초 아파트들이 대거 들어선 신도시였다. 그래서 건축 연도가 이미 25년씩은 넘은 아파트들이 많았다. 우리가 계약한 13평 아파트도 마찬가지였는데, 이 역시 돈에 맞추려면 다른 답안지가 없는 상황이었다. 빌라를 생각해보기도 했는데, 그래도 아파트가 살기 편하다는 주위 말을 들어 작은 평의 집을 선택했다.      


첫 아파트를 계약한 날을 잊을 수 없다. 우리의 신혼집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계약서를 작성하는 집주인의 손목과 손가락에서 반짝이던 큼직한 금붙이들 때문이었다. 소위 ‘아파트 복부인’이라 불리던 이들의 실물을 그때 나는 처음 보았다. 집주인은 이 집 말고도 아파트를 몇 채를 더 갖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손이며 목이며 걸고 낄 수 있는 거의 모든 곳에 보석과 금붙이들을 훈장처럼 달고 있었다. 아파트를 한 채 매입할 때마다 기념으로 하나씩 다는 걸까. 그러면 이분은 도대체 몇 채의 아파트를 갖고 있다는 말인가. 계약서를 작성하며 쓸데없는 생각만 하다가 도장을 찍으라는 곳에 대충 찍고 일어섰다.       



처음 살던 아파트는 아늑했다. 오래된 아파트가 그렇듯 아파트 동과 동 사이가 멀어서 해를 가릴 일도 없고, 그 거리만큼 사생활도 보장이 되었다. 우리가 살던 곳은 이층이었는데 앞에 큰 나무들이 베란다를 가려주어서 커튼을 열면 푸르른 녹음이 우릴 맞이했다. 어느 순간에는 마치 우리가 전원 속에 살고 있는 건가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아파트 단지 안에 있던 놀이터와 공원은 아파트 단지에 비하면 기이할 정도로 넓었다. 요즘 같았으면 아마도 아파트 두세 동은 더 들어서고도 남을 크기였다. 그 공원으로 아파트를 빠져나가면 산책길이 이어졌는데, 아내와 나는 벚나무가 늘어선 그 길을 좋아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그 길을 따라 아파트 단지들이 만들어 놓은 거대한 콘크리트 숲을 유유히 산책했다. 오래된 아파트 단지에는 키 큰 나무들이 많아서 대규모 아파트 단지의 답답함을 잊기에도 좋았다. 


대체로 우리는 첫 아파트에 만족하며 살았다. 안방을 크게 만들었던 옛날식 구조가 아쉬웠지만, 동네도 한적한 곳에 있어 그런 차분함을 좋아하는 우리에겐 어울리는 곳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집 크기가 작은 것이 흠이어서 2년 계약이 끝나고 우리는 좀 더 넓은 곳을 알아 보기로 했다. 사실 집주인이 집을 팔겠다고 하지 않았다면 그 집에서 더 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집주인은 우리에게 그 집을 사는 건 어떻겠냐고 권유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전세로 이사 다니면 되지 굳이 집을 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보일러가 너무 낡아 교체해야 할 상황이었는데, 그걸 우리가 떠안고 싶지도 않았다. 생각해보면 세상물정 모르던 시기였다. 금반지 집주인이 이런 내막을 알았더라면 참으로 귀엽다고 할 일이었다.     


두 번째로 얻은 아파트도 처음 살던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당시 내가 다니던 회사가 사옥을 옮긴다는 이야기가 있어, 일부러 지하철 역 근처로 집을 알아보다 계약한 곳이었다. 이 아파트도 오래된 것은 마찬가지였는데, 지하철역이 가깝고 이전보다 평수가 넓어서 대출을 그만큼 더 많이 받아야 했다. 겨우 대출금을 갚았는데, 다시 대출 인생이 시작되었다. 그때만해도 대출이 많으면 큰일이 나는 걸로 아내나 나나 그렇게 생각하던 때였다. 둘 다 너무 깔끔을 떠는 성격이어서 대출 또한 빚이고 빚은 그 어느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았다. 세상물정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보일러 교체 비용이 아까워 아파트를 사지 않은 것보다 더한 일이었다. 


첫 번째 살던 아파트가 한적한 곳이었다면 두 번째 살던 아파트가 있는 곳은 번화가였다. 집을 나서면 술집과 상가들이 무성한 그런 곳이어서, 막상 이용할 때는 좋지만 살기에는 번잡스러웠다. 창문을 열면 시끄러운 소음이 몰려 들었다. 게다가 이 집은 층간소음이 너무 심했는데, 심지어 윗집에서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까지 다 들릴 정도였다. 어쩔 땐 서랍을 여는 소리까지 들려서 ‘아파트 이름처럼 모두 대동단결하며 살아야 하는 건가’라는 농담을 하곤 했다. 좋아서라기보다 어쩔 수 없서 그냥 살아야 했다. 그래도 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더 살겠거니 했는데, 2년이 지나자 집주인이 또 집을 팔겠다고 하여 다시 전세를 구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 때만 해도 순진한 우리는 왜 아파트다 집주인들이 그렇게 집을 팔아치우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게 일종의 갭투자라는 걸 뒤늦게 알았다. 


2015년 당시에도 아파트 전세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세 번째로 구한 집은 정말 울며 겨자 먹기로 선택한 곳이었다. 이전에 살던 아파트보다 나을 것이 전혀 없었지만 전세금은 더 비쌌다. 당시까지만 해도 무리해서라도 집을 사야겠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게다가 아파트 값이 폭락할 거란 소문이 있어서, 이러다 아파트 전세금도 못 돌려받는 게 아닌가라는 걱정마저 해야 했다. 물론 그것은 나의 생각이었다. 아내는 생각이 달랐는데, 작은 아파트는 절대 가격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 경제가 폭락할 수도 있어서 심지어 전세가 아니라 월세를 살아야 한다고까지 생각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삶은 계속되었다.     


그렇게 구한 세 번째 집은 정말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외관도 오래되어 낡아 보였는데, 아파트 복도며 엘리베이터까지 지저분해서 오히려 가장 작고 저렴했던 첫 집이 그리울 정도였다. 게다가 층간소음은 더 가관이어서 도대체 이게 어디서 나는 무슨 소리인지 가늠할 수조차 없는 기괴한 소리들이 매일 우리의 정신을 갈아먹고 있었다. 남들처럼 우리도 윗집에 올라가 얼굴을 붉히는 상황을 감수해야 했다. 그런데 알고 보면 범인은 윗집도 아닌 그런 상황이 반복되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이 아파트는 건축 당시부터 부실공사였다는 소문이 있었다. 사는 사람 잘못이 아님에도 소음에 대한 책임은 사람에게도 떠넘길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가해자이자 피해자였다. 아내와 나는 잠귀가 예민해서 층간소음을 견디기 위해 귀마개를 하고 자야 했다.        


이런 곳에 우리가 꿈꾸는 집을 설계해줄 선생님들이 가정방문을 온다는 것이었다. 집에 대한 우리의 로망을 실현해줄 건축사들에게 ‘이게 우리 집입니다.’라고 하기에 너무나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건축사들이 집을 둘러볼 때마다 옆에 쫓아다니며 ‘아닙니다. 이 집에는 우리가 바라는 삶이 전혀 없어요.’라고 항변을 하고 싶을 정도였다.      


우리가 내내 살던 집이었음에도 우리는 우리 집을 부정해야 했다. 월세도 전세도 자기가 사는 곳이라면 자기 집인데, 우리는 그런 삶을 살지 못했다. 임시적인 거처는 늘 임시적인 삶을, 늘 어딘가 부실한 삶을 설계하도록 했다. 전세살이가 지겨운 이유는 층간소음 말고도 이런 이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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