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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봉 Apr 20. 2021

거꾸로 심은 사나이

함박꽃 꽃말은 수줍음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의 첫눈을 사로잡는 것이 수국이기를 봉봉은 바랐다. 또한 둥글고 탐스러운 꽃 뭉치가 낮은 담 너머에서도 쉬 보여, 골목을 지나는 이들의 마음까지 둥글고 풍성했으면 하는 생각이었다. 봉봉은 수국 중에서도 키가 크게 자라는 목수국을 마당에 들였다. 지금은 비록 키가 작아도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할 즈음이면 담장 높이까지 자랄 수 있으리라. 봉봉의 바람대로 수국은 대문 앞에 떡하니 자리하고 앉아 토실토실 살이 오르는 강아지처럼 하루가 다르게 잎을 피워내고 있었다.


알뜰한 봉봉은 수국을 사며 배송료를 물지 않기 위해 작약 구근도 함께 주문했다. 딱히 작약일 이유는 없었지만 인터넷 화면으로 마주한 겹작약꽃의 풍성함에 바로 매료되고 만 것이다. 작약의 우리말이 함박꽃이란 게 괜한 것이 아님을 봉봉은 생각했다. 게다가 땅이 아닌 화분에서도 월동이 가능하다고 하니 한시름 놓을 수도 있었다. 그동안 겨울을 견디지 못하고 죽은 식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봉봉은 죽은 식물 앞에 멀뚱히 서서, 영문도 모른 채 아쉬운 작별을 고해야 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더 이상 되고 싶지 않았다. 작약을 심은 것은 여러모로 잘한 선택이라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봉봉은 물을 주며 처음 심을 때와 작약의 상태가 전혀 달라진 게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식물마다 잎이 나는 시기가 모두 다를 수도 있지 않은가, 봉봉은 생각했다. '식물마다 다 특성이 다르니 그럴 수도 있겠군.' 그래도 이제 사월 중순인데 너무 늦는 것이 아닌가 의문을 품었으나, 이제는 식물에 대해 아는 것도 늘었으니 마음을 느긋하게 먹기로 했다. 하지만 한 주 뒤에도 그 모양이 똑같아 작약에 뭔가 문제가 있음을 깨닫고 그걸 판매한 곳에 전화를 하기로 했다.


"그곳에서 수국과 작약을 사서 심었는데 작약이 싹도 나지 않고 전혀 변화가 없네요."

"그럴 리가요. 저희는 싹이 난 것만 보내드립니다."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다소 딱딱한 말투로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봉봉은 분명 작약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고, 이런 걸 판매한 사람이 되려 이렇게 무 자르듯 냉정하게 대답하는 것에 기분이 상했다. 당장 바꿔 달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작약이 무슨 공산품도 아니고 뭐가 문제인지 아직 이유를 알 수 없으니 분을 삭이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싹은 처음부터 보지 못했습니다. 분명 뭔가 문제가 있습니다. 혹시 잎이 늦게 나나요?"

"그럼 뿌리를 캐서 사진으로 찍어 보내주세요."


봉봉은 화분에 담긴 작약을 캐냈다. 조심스레 뿌리를 살살 드는데 그냥 쑤욱 뽑혀 올라왔다. 뿌리라고 할 것도 없었다.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죽은 것이 분명했다. 봉봉은 이렇게 죽은 식물들을 하루 이틀 본 것이 아니었다. '이제 나도 척 보면 다 안다. 이런 걸 팔고 저렇게 뻔뻔하게 얘기하다니.'


봉봉은 화분에 심은 작약 사진과 뿌리를 들춰낸 사진까지 보냈다. 사진을 보내자마자 전화가 되돌아왔다. 봉봉은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냉정한 말투의 남자에게 따질 참이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말은 엉뚱했다.


"작약을 거꾸로 심으셨네요."

"네?"

"위아래를 혼동하셨나 봐요. 거꾸로 심으셨어요."

"거꾸로 심었다고요?"

"네. 위로 나온 게 뿌리예요."


봉봉은 자신의 다리가 뿌리를 내려 그 자리에 박힌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자신도 모르게 '거꾸로 심었다고요?'라는 말을 크게 복창까지 하고 나서. 혹시나 골목을 지나던 누군가 그 소리를 들었을까 봉봉은 다시 목소리를 낮추었다. 안 그래도 창피함에 얼굴을 묻고 싶었는데, 절로 머리가 땅으로 숙여졌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선... 생.. 님."


봉봉은 남자의 말대로 거꾸로 처박힌 작약 얼굴에 싹이 났는지 흙을 털어보았다. 마치 더러워진 자신의 얼굴을 씻는 듯한 기분이었다. 다행히 흙 속에는 흰 쌀알처럼 생긴 눈이 보였다. 남자가 시킨 대로 작약의 위아래를 뒤집어 다시 심고 살아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미 마른 뿌리가 과연 다시 살아날 수 있을지 봉봉은 그 알량한 지식을 헤아렸다. '아니지. 그래도 모르지. 뿌리가 들린 채 땅속에서도 싹을 틔우지 않았던가.'


봉봉은 손바닥에 있는 작약 구근을 바라보았다. 식물에겐 고문도 이런 가혹한 고문이 없었으리라. 봉봉은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시 작약을 제대로 심고, 이 쪼끔한 눈이 싹이 되어 자라기를 기도하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일임을 깨달았다. 함박꽃이 필 무렵 함께 활짝 웃을 수 있을지, 냉정한 선생도 작약도 그도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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