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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디 Jul 27. 2023

착각 시리즈

어느 날 내 책 -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흔한 한국도서관 책 분류법, 『한국십진분류법』. 책들을 크게 아홉 개 주제로 나누고 장르, 시대 등등으로 세분한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문학은 800번, 심리학이나 철학책을 보려면 100번 서가로 가야 한다.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찾는 자기계발서, 처세, 재테크, 부동산 책들은 300번에 있다. 역사와 위인을 찾아보려면, 특히 외국 여행지를 알아보려면 900번으로 가야 하고, 자연과학은 400번, 문화‧예술‧스포츠는 600번, 도서관이랑 좀 거리가 먼 듯한 종교는 200번, 언어가 700번, 그리고 기술과학이 500번에 있다. 백과사전이나 독서, 도서관, 컴퓨터 코딩 같이 이 아홉 가지 주제에 들어가지 않는 것들은 000번 대다. 문체부에서 2021년 실시한 「국민 독서실태 조사」를 보면, 성인이나 학생이나 위 주제들 가운데 문학을 그중에서도 소설을 제일 좋아한다. 실제로 그렇다. 도서관에서 베스트셀러 소설들은 종이책이든 오디오북, 전자책이든 예약이 풀로 다 차 있다. 도서관 사서는 대부분 여자고, 이용자도 그렇고, 책 읽는 곳엔 여자가 많다. 조사에서도 나온다. 지역별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우리나라에선 여자가 남자보다 책을 조금 더 읽는다. 도서관에서 책을 꽂고 있다 보면 보인다. 여자 친구 손에 끌려다니는 남학생도 있고, 980번 대 여행 관련 서가엔 젊은 사람들과 여성들이 많다. 티브이 책소개 프로그램이나 강연을 주로 남자들이 맡아하는 것과는 대조적인 현상이다. 테이블에서는 시험공부 같은 걸 하고 있고 소파에선 어르신 분들이 책을 읽고 있다. 사회가 고령화 돼 가고 있어서인지 어르신이 점점 더 느는 것 같다. 그분들도 옛 대하소설을 즐겨 찾아 읽는 걸 보면 소설을 따를 건 없어 보인다. 그래서인지 처음 도서관 봉사를 할 때는 애들 책에 치이고 소설책에 치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보니, 500번대 책들이 뒤죽박죽일 때가 많았다. 기술과학이나 자연과학이나 비슷한 성질(이과, 나는 문과) 아니냐, 그렇게 생각했었다. 자주 대출되는 책들을 보니 이해가 갔다. 500번 기술과학 주제에는 510번 대 의학이 있고, 590번 대에 생활과학이 있다. 독서실태조사에 의하면, 독서의 목적은 성인과 학생들에게 모두 ‘새로운 지식과 정보’이며 독서는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 하니 이런 필요에 직접적으로 응답하는 주제들이 500번대에 있었던 것이다. 한편, 책을 읽는 사람들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그냥 ‘읽고 싶어서’라니까, 살라니 필요해서 읽긴 읽는데 읽고 싶은 건 사람들 사는 이야기, 이야기인 셈인가. 세상 책들은 이렇게 사람이 필요해 사람이 지은 것이니 지극히 다양하다 할지라도 십진분류법 정도 카테고리면 웬만한 건 다 구분해 넣을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1. 성탄절이 다가오던 어느 해 12월, 나는 은평구 작은 도서관에서 책을 정리하고 있었다. 오십견이 있어 팔을 높이 올리질 못하던 때였지만 주로 아이들이 이용하는 도서관이어서인지 다행히 책장이 높지 않아 운동 삼아서 하기 좋았다. 생각해 보니 책을 책꽂이에 정리하는 작업은 좋은 운동이었다. 세 시간 정도 하다 보면 땀도 조금씩 나고, 앉았다, 일어났다 반복하니 어찌 보면 전신운동이었다. 사서들이 손목에 보호대를 감고 있는 모습을 많이 보긴 하지만 내 생각에, 한꺼번에 많이 들지만 않으면 걷기까지 포함한 좋은 운동이다. 하지만 청구기호 작은 숫자와 글자가 헛갈릴 때가 많다. 5와 6, 심지어 8자까지 자세히 보지 않으면 똑같이 보인다. 그럴 땐 안경도 바꿔 써보고 핸드폰 확대기도 써보고 틀리지 않으려고 노력을 많이 한다. 그런데…, 분명히 기술과학 500번 대에 있는데 이 책이 떡하니 있는 거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언젠가 김영하가 팟캐스트에서 읽어줬던 글 같은데, 이 책이 왜 여기 있지? 8자를 잘못 보고 여기다 꼽았나?’ 

    

    나는 용감하게 책을 뽑아 들고 문학 쪽으로 몸을 틀었다. 사서 선생님이 왜 그러냐고 날 불러 세웠다. 문학에 꽂아야 하는데 여기다 꼽은 것 같다고 말씀드리니, 어디 한 번 봅시다, 한다. 제목이 전혀 기술과학적이지 않아 본인도 잠시 당황하더니 청구기호가 513.8(신경계 질환)인 걸 보고 꽂혀 있던 자리는 틀리지 않았다고 확인해 준다. 책을 뒤집어 보니, ISBN 번호에 내용분류기호인 마지막 세 자리는 400(자연과학)이다. 팟캐스트에서 김영하 작가는 이 책에 대한 설명을 꼼꼼하게 해 줬을 것이다. 작가 이름은 올리버 색스이며 그는 신경학 전문 분야 의사이고 그런 그가 자신이 진료한 환자들에 대하여 기록한 글을 엮은 것이라고. 그런데 나는 들으며 졸았든지 아니면 다른 일을 하고 있었나 보다. 이 책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안에 제목과 같은 첫 번째 글을 소설가 김영하가 읽어주었다는 사실만 가지고 나는 정말 엉뚱하고도 재밌는 단편소설로 기억한 것이다.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에 들어가 「국가종합자료목록」을 검색해 보니 대부분 도서관에서 513.8로 구분해 잘 정리하고 있었다. 그래도 반가운 건 그 와중에 몇 안 되는 도서관에서 848(영미문학, 르포르타주 및 기타)에 두었고, 나처럼 생각했는지, 843 영미 소설에 분류해 놓은 도서관도 있었다. 작가 올리버 색스를 일컬어 ‘의학계의 시인’이라고들 부르고 어떤 책 소개 유튜브 영상에선 그에게 노벨 문학상을 주어야 했다고까지 하는 걸 보고 그제야 이 책으로 인해 발생한 오류와 착각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의대생 필독서라고도 하고 인지심리학자 김경일은 학생들에게 추천해 읽힌다는 책이었다. 

    몰랐다. 올리버 색스라는 사람이 이렇게 추앙하는 사람이 많은 작가였는 줄 정말 몰랐다. 나는 ‘아내’도 아니고 ‘모자’도 아닌 ‘착각’이라는 단어에 꽂혔고 뭐든지 직접 가서, 보고, 만져봐야 하는 성미인지라 곧장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들어가는 글에는 ‘나는 나 자신을 자연학자인 동시에 의사라고 생각한다. 나는 질병과 사람 양쪽 모두에 똑같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또한 … 나는 이론가이자 극작가이기도 하다. 나는 과학적인 것과 낭만적인 것 모두에 푹 빠져 있고, 그 둘을 단순히 질병이 아니라 인간을 에워싼 조건 속에서 끊임없이 고찰하고 있다.’고 적혀 있다. 자연학자라는 관점에서 ISBN에 붙어 있던 400번도 옳았고, 의사의 임상기록이니 510번대가 맞고 극작가로서 낭만적인 것에 푹 빠져 있다는 의미에서 848번도 맞을 것 같다. 하지만 극은 아니고 소설은 더더욱 아니니까 소설이라고 분류한 번호 843은 ‘착각’이다.  

   

    2. ‘착각’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번엔 부천의 한 작은 도서관이다. 코로나가 한창이라 상호대차로 쏟아져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책들을 소독하고 정리하느라 책에 붙은 번호밖에는 다른 걸 볼 여력이 없었다. 그때 갑자기 눈에 훅하고 들어오는 책 제목이 있었다. 『마음을 읽는다는 착각 : 오해와 상처에서 벗어나는 관계의 심리학』. ‘착각’이라는 말만으로도 저절로 끌려 손이 갔다. 책에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태도에서 오해는 시작된다, 속임수를 감지하는 능력이 있다고 해도 무작위 확률에 비해 약간 높을 뿐, 낯선 사람 마음보다 친구, 동료, 애인 마음을 더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차이는 미미하다, 이런 사실을 깨달아야 관계를 바로잡을 수 있는 실마리가 생긴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무리 물고문당하는 상상을 하고, 잠 못 자는 상상을 하고, 가난한 사람이 되어 보는 상상을 하고, 몇 년간 독방 신세가 되어 보는 상상을 하면서 … 애써도 자신의 상황과는 극단적으로 다른 상황에 처하는 게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는 없다. 누구나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기 전에 그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칠 수 있지만 정작 우리는 상대방을 판단하면서 그런 사실을 쉽게 간과한다.  

  

    책을 읽고 어떠냐 물으면 울 아들내미가 늘 하는 말이 있다. “너무 당연한 말이어서 말이지. 그 말대로 하느냐 안 하느냐가 문제지.” 그러면 책에 어떤 내용이 있더냐고 더 이상 물을 수 없게 된다. 그저 아들이 내려 주는 커피를 조용히 기다리기 일쑤다. 그러다 지나도 한참 지난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재수 마지막에 학원에 왜 안 갔는지 아느냐고 묻는다. 놀랐다. 학원에 안 간 줄도 몰랐다. 같이 공부하던 같은 반 친구가 주먹을 휘둘렀는데 자기는 운동을 한 사람이고 CCTV도 있었기 때문에 맞고만 있었고, 담임 선생님이 잘 처리해 주실 줄 알았는데 원서 쓰기 전에 예민해서 그런 거라며 무마하려 해 억울했었다고. 그럴 때면 잠에서 번쩍 깬다. 아무리 다 큰 아들이라지만, 집에서 항상 웃는 아이니, 별 탈 없이 잘 커 주고 있구나, 생각했었다. 이럴 때면 정말, 내가 착각 속에 살고 있네 싶다. 엄마가 생각하는 평온한 그림 망치고 싶지 않아 말도 못 한 건 아닌지 미안하기만 하다. 책을 읽고 감명받고 무언가를 알고 있다고 해서 그렇게 행하고 있다는 건 아닌데, 더구나 그렇게 사는 것도 아닌데…. 그때, 몇 번을 봐도 물리지 않는지 매번 같은 액션 영화에 정신 팔려있던 아빠는 아들에게, 원두 가는 거 분리해서 청소 좀 하라고 한다. “손잡이 풀고 … 와셔 떨어져서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하고… .” 아들과 나는 동시에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아빠가 분명 ‘와셔’라고 한 거 맞냐 묻는다. 아빠가 아무리 스펠링을 또박또박 불러 주어도 우리는 평생 처음 들어본 단어에, 아빠는 외계인인가, 생각하고 있었다. 아빠에게 너무나 당연한 말을 아내와 아들내미가 외계어 취급하자 아빠는 답답했다. 남편과 알고 지낸 세월이 34년쯤 되고, 아들내미를 낳고 기른 시간이 20년이 넘었다. 그 긴 시간 속에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단어 ‘와셔’. 그래, ‘잘 안다고 하는 생각’은 착각이라고 했다. 누구나 ‘자기중심적으로 편향’되어 있다고도 했다. ‘타인의 관점을 생각한들 그 생각이 정확하다는 보장이 없다’ ‘정말로 타인의 관점을 이해해야 한다면, 유일한 방법은 상대에게 뭘 원하는지 묻거나 ….’ 좋아하는 영화도 팽개치고 아빠는 열심히 커피 그라인더를 분리해 와셔를 보여 준다. “이건 평와셔고, 스프링와셔라는 것도 있어….”      


타인의 마음은 절대 펼쳐진 책 같을 수 없다. 서로를 더 잘 이해하는 비결은 상대의 보디랭귀지를 해독하는 능력이나 관점을 수용하는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자신의 마음을 스스럼없이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게끔 공들여 관계를 맺는 것이다.     


    책을 그저 바라만 보는 건 읽는 게 아니고 펼쳐져 있다고 해서 알게 되는 것도 아니며 읽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고 읽다가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꼼꼼하게 사전을 찾아보고 사전에도 없으면 묻고 알아보아야 한다. 그렇게 펼쳐진 책을 읽었다고 해도 그것으로 타인의 마음을 알았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 아들 말대로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가 이마를 탁, 치는 깨달음을 준다.      

    3. ‘착각’이라는 주제를 따라가다 ‘나를 나로 만드는 것은 대체 뭘까?’ 질문하는 줄리아 쇼라는 이의 책을 만났다. ‘자기 정체성의 진정한 뿌리는 우리의 기억에 있다’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몹쓸 기억력 : 자기 자신마저 속이는 기억의 착각』이라는 제목의 책이다. 설명에 의하면 ‘우리가 하나의 전체적인 기억으로 여기는 것은 뇌의 여러 영역들에 있는 기억파편들(기억흔적들)이 서로 연합해 만들어내는 결과물이다.’ 작가가 이 책을 쓴 이유는 ‘우리의 기억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라고 한다. 우리의 기억은 심각한 결함을 가지고 있다. 거짓 기억이 존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원래 잊도록(망각) 설계되어 있다. 『마음을 읽는다는 착각』에서 ‘자기중심적 편향’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는데 이 책에는 ‘우월착각’이라는 말이 나온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을 평균 이상으로 똑똑하고 매력적이며 유능한 인간으로 생각한다는 결과를 보여준 연구도 있다. 자기가 만능이라고까지 믿지는 않더라도 대개는 거의 모든 면모에서 평균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외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남성과 여성 모두 자기 외모를 실제보다 훨씬 높게 평가한다고 한다. ‘내가 그래도 평균은 넘지’ 이렇게 말이다(사람들에게 겸손은 원래 힘든 거구나. 나같이 내향적인 성격에 소심한 사람에겐 유용한 정보다). 이렇게 기억이 미심쩍다는 걸 알아도 우리는 행복하게 살 수 있단다. 이유는 ‘그 덕분에 오히려 유연한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면 된다. 우리 인생과 기억의 황금기는 바로 지금이다.      


    4. 가장 최근엔 『생각한다는 착각 : 뇌과학과 인지심리학으로 풀어낸 마음의 재해석』이란 책을 읽었다. 여기서는 더 나가 ‘우리 자신이 느끼는 것도 포함해 감정들 역시 그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고 하고 있다. ‘감정은 순간적인 창작’이다. 저자 닉 채터에 의하면 생각의 한 유형인 지각이 가장 중요하다. 다른 모든 유형의 ‘생각’은 그저 ‘지각의 확장’ 일뿐이다. 그런데 우리의 감각적 경험은 빈약하기 그지없다. 정확하고 총괄적으로 본다고 착각하지만 모순적이고 편협하다. ‘뇌는 이 세계를 단편적으로 언뜻 보고 단편적으로 상상한다.’ 제목에는 ‘생각한다’인데 결론은 ‘마음의 비결’이라고 해서 원제목을 보니 ‘The Mind is flat(마음은 평평하다)’였다. 그러니까 여기서 ‘생각하다’는 ‘think’가 아니라 ‘mind’다. 그러고 보니 우리말 ‘마음’이라는 말이 포함하고 있는 여러 의미가 저자가 말하는 ‘평평하다’와 왠지 어울린다. 저자는 ‘숨겨진 깊이 즉 내면세계와 그 세계가 포함하는 신념, 동기, 그리고 두려움은 그 자체로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거듭 말한다. 프로이트가 말한 무의식은 헛소리, 생각을 ‘빙산’에 비유하는 것도 잘못이다. 우리 마음의 비결은 ‘숨겨진 깊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 주제를 두고 현재를 창의적이고 즉흥적으로 만들어내는 놀라운 능력에 있다. 우리가 “마음먹었어”라고 할 때 그 마음은 즉흥적이라, 원래 내면 어딘가 있다가 튀어나오는 게 아니고, 말하는 순간 생겨나는 것, 실재하는 것이다.     


 삶을 풀어나가는 것은 소설을 풀어나가는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우리는 ‘바로 그 순간에’ 신념과 가치, 행동을 형성한다.    

 

    ‘나를 나로 만드는 것은 대체 뭘까?’라는 『몹쓸 기억력』의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한다는 착각』에서는 더 파격적이고 더 적극적으로 내놓는다.     


우리는 과거에 의존한다고 하더라도 계속 우리 자신을 재창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재창조를 이끌어나가면서 우리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이 될지를 빚어낼 수 있다. …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자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 뭐든지 가능하다라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우리의 인생과 사회의 구성이 본질적으로 제한이 없으며 창조적인 과정이라는 의미다. 또한 우리가 결정과 행동을 판단하는 기준 역시 동일한 창조적인 과정의 일부가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요컨대 인생은 우리가 참가하고, 규칙을 만들어내며 스스로 점수를 지키는 경기다.


    이 글을 읽자 먼저 남편이 한 말이 떠올랐다. 책을 읽고 싶지만 늘 바쁜 그에게 무슨 책을 읽고 싶은지 물어봤었다. ‘시집’이라고 했다. 기계공학과를 전공한 그가 ‘시집’을 읽고 싶어 하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자신은 시가 정말 어렵다고 했다. 나는 그럴 거라고, 나도 어렵다고 얘기해 주었다. 어떤 점이 그렇게 어려운지 물었다. “시를 읽으면 그걸 넘어, 뒤가 상상되어야 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더라고. 깜깜해.” 그에게 닉 채터의 말을 들려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뒤는 없어, 원래 없대. 안 보이는 게 아니고. 그냥 시를 듣고 떠오르는 걸 마음 가는 대로 상상하면 되는 거야.” 그러면 그는 시에 조금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으려나.      


    5.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제대로 볼 수 없다는 말을 읽었기에, 그날은 더욱 마음을 다잡고 잘못 꽂혀 있는 책이 없는지 찾고 있었다. 자료실 입구가 시끌시끌했다. “장애인 차별”이라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다가갔다. 사서 선생님들이 번갈아 왔다 갔다, 했다. 들어오던 다른 남자가 흰 지팡이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지팡이를 짚고 있던 사람은 뭐 하는 거냐며 소리를 질렀고, 시각장애인 지팡이를 걷어찬 젊은 남자는 화를 내진 않았지만 미안하단 얘기도 없었다. 아니 이건 무슨 상황이람. 흰 지팡이를 짚고 입구에서 무엇을 기다리는지 돌탑처럼 우뚝 서 있는 그 사람에게 갔다. 좀 앉으시겠냐 물으니, 괜찮다고 한다. 그냥 도서를 예약했는데 책이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고 찾으러 왔다고 한다. 그럼 1층에 가서 받아가면 된다고 얘기하고 보니, 아, 볼 수 없는 분이지, 그제야 나는 지금껏 모르던 세상 사람을 만났다는 걸 깨달았다. 기억의 거짓, 감각의 거짓, 특히 시각의 결함, 그런 이야기를 읽고 있지만 그 글엔,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세계가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다. 책을 볼 수 없어 화가 나 불만을 토로하는 그와 안 된다, 없다며 쩔쩔매는 사서들의 대화엔 그저 소리만 진동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불쑥 떠오른 말이 있었다.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4부 단순함의 세계에 소개된 시인 리베카에 대한 에피소드에서 읽은 말이다.      


우리는 환자의 결함에 너무 많은 주의를 기울였던 것이다. 그래서 변화하지 않는, 상실되지 않고 남아 있는 능력을 거의 간과했다.     


    그는 볼 수 없는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기이한 사람이라, 결함이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언젠가 유튜브에서 전 유엔 대사 오준이, 누구나 삶의 한 단계에서는 장애인이 된다, 누가 더 오래 장애인으로 사느냐의 차이일 뿐, 이라 한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서들도 규율에 얽매여 “장애인 차별” 외치는 이를 빌런 대하듯 할 사람들 아니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닉 채터 말대로 뒤에, 아니면 그 안에 의도나 신념 같은 건 없는 거라니까. 지금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찾고,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맘먹었다. 나는 이 큰 도서관의 한 자료실에서 있는지 없는지 일하는 봉사자일 뿐이라 난감하기가 이를 데 없긴 했지만 말이다. 사서들 기지로 문제는 하나씩 해결돼 가는 것처럼 보였다. 결국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마련이니,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한 건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내 생각은 쥐어짠 튜브에서 쓸데없이 튀어나와 버린 치약 같았다. 이런 경우 대비해 저작권도 공부해야겠고, 도서관에서 가능한 장애인을 위한 서비스에 대해 알아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쏟아진 치약이라도 더 열심히 이를 닦아야 하겠기에.      


    6. 나는 혼자 일련의 이 특별한 책 읽기를 ‘착각 시리즈’라고 불러 보았다. ‘착각 시리즈’는 마지막 편을 향해 가고 있다. 이번 회차에 제목을 붙인다면, ‘끝없는 망각 이 가슴 아픈 자기 상실’이다. 올리버 색스는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 두 번째로, ‘길 잃은 뱃사람’ 지미라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괄호 안 작은 글씨로 ‘우리는 다리나 눈을 잃으면 다리가 없고 눈이 없다는 사실을 의식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면 그 사실 자체를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을 깨달을 자신이라는 존재가 없어졌기 때문이다’고 썼다. 지미의 진료 기록에는 ‘가망성 없음, 치매, 착란, 정체성 장애 증상 보임’이라고 씌어있었다고 한다.      

    ‘치매’, 이 치매에 관련된 책들도 올리버 색스의 책처럼 513번 대에 있다. 『치매의 거의 모든 기록 : 치매 환자가 들려주는 치매 이야기』가 신간으로 들어왔다. 58세에 조기 치매 진단을 받은 웬디 미첼이라는 실제 환자가 쓴 두 번째 책이라고 했다. 김혜자가 치매 환자로 열연한 「눈이 부시게」라는 TV드라마, 너무 슬펐는데. 언젠가 본 다큐멘터리에서는 89세 할머니가 치매인데, 밭에서 양말에 흙을 잔뜩 묻힌 채 들어오는 걸 필리핀 며느리가 부정확한 발음에 큰 목소리로 나무라고 있어서 귀도 맘도 아팠었다. 치매 어머니에 대하여 딸 입장으로 솔직하게 써 내려간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의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도 읽었다.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는 작가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쓴 문장이었다고 했다. 이 단 한 문장밖에 알 수 없어 안타까워하던 이야기를 읽었기에 웬디 미첼의 글이 참 귀하게 여겨졌다. 치매 환자가 직접 들려주는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는 먼저 ‘왜곡되는 감각’에 대한 것으로 시작한다.      


    ‘우리처럼 기억을 앗아가는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도 냄비의 물이 끓을 때 보글보글 올라오는 기포들처럼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면 깜짝 놀랄 때가 있다.’

    ‘혀 끝에 남은 잘 구운 케이크의 맛과 냄새, 이제는 그런 기억들을 떠올리는 것이 점점 어려워진다. 지금은 인지하지 못하지만, 내 주방에는 여전히 이런 냄새가 희미하게 떠돌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식탁보가 검은색이면 식탁이 다이닝룸 중앙에 생긴 커다란 싱크홀처럼 보여서 혼란스러웠다.’ 

    ‘하얀 접시도 문제였다. 치매 환자에게 하얀 접시에 색이 흐릿한 매시드 포테이토나 얇고 납작한 생선 조각을 담아 주면, 환자는 접시에 음식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할지도 모른다.’      


    깜짝 놀랐다. 감기를 심하게 앓고 후각이 돌아오지 않는 엄마도 생각나고, 대상포진으로 혼자 찾은 병원에서 아편계열 진통제를 처방받아 온 시어머니도 생각났다. 올리버 색스와 니컬러스 에플리, 줄리아 쇼, 닉 체터가 쓴 훌륭한 연구, 귀한 이야기들을 읽으며 깨달음을 얻는다지만 나의 소소한 이 일상의 기쁨이 펼쳐 지나는 그 뒤에서 어머니들이 연로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웬디 미첼의 말에 더욱 귀 기울이였다. 그는 치매를 진단받은 후 지금까지 혼자 살고 있다고 했다.     

    ‘나는 아이들이 각자의 삶을 영위하기를 바라지 간병인이라는 명목하에 어떤 식으로든 자기 생활이 방해받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든 항상 엄마이고 싶다. 내 능력이 떨어졌어도 여전히 아이들에게 쓸모 있다고 느끼고, 아이들을 보살피는 것이 나한테는 중요하다.’

    ‘자녀가 늘 지켜보면서 뭔가를 하지 말라고 말한다면 또는 다른 사람이 당신 대신에 모든 일을 해준다면 인생에 무슨 기쁨이 있겠는가?’

    ‘왜 그들은 우리를 어린아이 취급하는가? 왜 그들은 우리가 할 수도 있는 일이 아닌 할 수 없는 일에 초점을 맞추는가? 왜 그들은 환자를 진단명 대신에 한 사람의 개인으로 보지 않는가?’     


    그는 자신의 치매를 진단했던 의사가 이렇게 말을 해주면 좋았을 거라고 한다.     


    네, 치매는 참 곤란한 병이에요. 하지만 이 새로운 꼬리표가 당신을 나타내지는 않을 거예요. 5분 전에 이 문을 열고 들어온 당신과 지금의 당신은 같은 사람입니다. 여전히 당신은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많은 것이 될 수 있어요.     


    부모님이 치매로 진단받으면 사형 선고라도 받은 듯이 붙잡고 엉엉 울어버리는 K-드라마 장면만 알다가 눈이 크게 떠지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긍정적인 자아개념을 유지하는 것이 저항’ 임을 알려 주고 ‘자존감을 보호’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위해서 끊임없이 ‘대화’ 해야 한다고 웬디 미첼은 말하고 있다. 그녀의 글은 “치매는 ‘지금’에 더욱 집중하게 할 뿐 치매로 멈춰야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며 끝난다. 그동안 읽은 ‘착각 시리즈’의 결론과 다르지 않다. 어차피 안다고 하는 생각은 착각이고 기억도 감정도 생각도 즉흥적인 창작으로 만들어지는 순간 실재할 뿐이라고 했다. 그렇게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재창조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7. 조용히 책을 읽던 도서관 이용자들은 어쩌면 인상을 찌푸렸을 한바탕 소동이 끝나고 나는 무슨 한 일도 없었으면서 다리에 힘이 빠지고 멍해졌다. 영미문학과 독문학, 불문학 작품들이 있는 서가에 올리버 색스가 마지막 2년 동안 쓴 4편의 에세이를 묶어 낸 『고맙습니다』가 보였다. ISBN 끝자리 400에 보통은 513번 대에 정리되어 있을 텐데 848번에 꽂혀 있다. 뽑아 들고 털썩 콘크리트 바닥에 앉았다.      


    ‘내가 여든 살이라니!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가끔은 인생이 이제야 시작될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이내 사실은 거의 끝나가고 있다는 깨달음이 뒤따른다.’ 

    ‘어쩌면, 운이 좋다면, 몇 년 더 그럭저럭 건강을 유지하면서 프로이트가 삶에서 제일 중요한 두 가지라고 말했던 사랑과 일을 계속해 나갈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뜬금없이 궁금해졌다. AI는 늙을 수 있을까? AI는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운에 맡긴다는 걸, 건강을 유지한다는 걸 알까? 그리고 삶이란 걸 살고 있다고 생각할까? 그런 삶에서 제일 중요한 것 두 가지로 사랑과 일을 꼽고 그것을 계속해 나갈 수 있는 걸 자유라고 할까? AI가 그런 걸 원하는 날도 올까?     

 

    제목이 찍힌 표제지를 넘기자 별빛 두 개가 나뭇잎에 매달려 떨어지는 그림 아래 문장 두 개가 적혀 있다. 뭔가, 길었던 이번 ‘착각’ 시리즈를 마무리할 딱 좋은 말이 아닐까 싶었다. (엄마, 보고 있죠?)   

  

나는 지금 죽음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의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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