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내 책 - 티투스 안드로니쿠스
아니, 그렇게 위대하다는 셰익스피어 작품인데 이렇게 없을 수가 있나. 옆 동네 도서관들까지 검색했는데. 티,투,스,안,드,로,니,쿠,스. 한 자 한 자 다시 또박또박 자판을 두들겨 보지만 ‘해당도서가 없습니다’라고 뜬다. 흔한 책이 아닌가? 네이버 창에 넣어 보았다. 지식백과가 맨 앞에 뜬다. ‘타이터스 앤드러니커스’. ‘엔드러니커스’라고 쓰인 다른 글도 있다. 배경이 로마라서 ‘티투스 안드로니쿠스’가 맞는 것 같은데, 하긴 셰익스피어가 영국사람이고 영어로 쓰인 작품이니 ‘타이터스 앤드러니커스’가 맞을까? 전에 본 유튜브 동영상에서 덴마크 가수 크리스토퍼가 ‘당신을 노래하는 다비드라고 한다’는 래퍼 이영지의 영어에 “다비드? 아, 데이빗!” 하던 장면이 생각난다. ‘데이빗’이라고 맘대로 옮겼지만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데이비드’라고 써야 한다. 도서관 사서 업무 기본은 책들을 분류하고 정리해 이용하는 사람들이 편리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서 교육 대표 과목은 ‘정보분류’와 ‘정보조직’이다. 그 과목에서 나는 우리말로 이름을 표기하는 방법이 50가지 이상 되는 대문호가 존재한다는 걸 배웠다. 『죄와 벌』, 『백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러시아 작가 도스토옙스키다. 인터넷만 띄워보아도 도스토예프스키, 도스또옙스끼, 도스토예브스키, 도스또예프스키, 도스또예브스키….
신부님들 일을 할 때였다. 프랑스 본원 한국 명단에 있는 신부님들 수가 한국에서 보낸 명단보다 많으니 확인을 부탁한다는 메일을 받았다. 받아 비교해 보니 한글을 영문 알파벳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같은 사람을 다르게 표기한 것이 원인인 걸 알았다. 나는 동일인으로 보이는 사람들 이름을 여권에 사용하는 것으로 통일해 고치고 나머지는 지워 정리했다. 일을 그만두고 사서자격증을 공부한 나중에야 프랑스 본원 기록에 있는 이름들 표기가 특이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단체가 한국에 처음 시작될 때 한국 사제 양성을 위해 오신 오영진(Oliver de Berranger) 신부님이 서류 작업을 하면서 한국 회원들 이름을 들리는 대로 옮겨 쓰셨다. 신학박사에 프랑스 생드니 교구장으로 주교까지 역임하셨던 분이 아무렇게나 하셨을 리 없다. 기준이 있었다. 국어 로마자 표기법이 마련되어 있기 전, 외래어 표기법이 생기기 전에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이라는 게 있었다. 이를 모른 채 그 일을 이어받은 한국 신부님들이나 직원들이 그때그때 임의로 다시 옮기곤 했던 거다.
이런 일 저런 일 떠올리며 검색창에 영문 알파벳으로 ‘Titus Andronicus’라고 넣어 보았다. 셰익스피어가 젊은 시절 썼다는 이 잔혹한 비극을 알라딘 서점에서 찾아 읽을 수 있었다. ‘티투스 안드로니쿠스’로 검색해서 뜨는 책이었다. ‘타이터스 앤드로니쿠스’로 검색하면 또 다른 책이 하나 뜬다. 물론 번역한 사람도 출판사도 달라 두 책이 같아도 같은 책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표기법에 따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이 왠지 마음이 쓰인다. 연극을 많이 보질 않아서 셰익스피어 희곡을 읽으면서도 내 머릿속엔 그저 학예회 장면이 펼쳐진다.
“… 라비니아, 이 가운데 어느 책이냐? 루키우스, 책을 하나하나 펼쳐 보아라. 그렇지만 네가 더 잘 읽었고, 잘 알고 있지. 자, 내 서재로 가서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잡아 슬픔을 잊어라.…”
( 「티투스 안드로니쿠스」, 윌리엄 셰익스피어,
신상웅 옮김, 동서문화사, 2019. 172쪽.)
극 주인공인 로마 영웅 티투스 안드로니쿠스 장군이 딸 라비니아에게 하는 말이다. 라비니아는 티투스가 포로로 잡아 온 고트족 왕비 타모라의 아들 둘에게 강간당한 뒤 혀가 잘리고 손이 잘린다. 이쯤 되니, 앗, 학예회일 순 없겠는데, 싶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잔혹함엔 한계가 있어 안소니 홉킨스가 티투스 역을 맡은 1996년 영화 「타이터스(Titus)」를 찾아본다. ‘책을 골라잡아 슬픔을 잊어라’ 말하는 티투스는, 오랜 세월 많은 이들에게 그랬듯, 책이 위로를 준다고 믿고 있다. 반면 라비니아는 위로받기보다 말이 하고 싶었다. 그저 울부짖을 뿐 말을 할 수 없는 그녀가 정신없이 펼친 책은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다. 그 속에 ‘테레우스의 배신과 필로멜라를 강간한 사건’이 씌어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팡이를 들고서 모래 위에 글을 쓴다 (‘저도의 추억’ 같은 말 아님). ‘강간, 키론, 데메트리우스’. 영화에선 이 순간 터져 나오는 라비니아의 고통스러운 감정이 격렬하게 그려진다. 라비니아가 쓴 글자를 읽은 티투스는 분노에 떨며 “구리판 한 장을 구해서 뾰족한 강철로 이 말을 적어 간직해 두겠다” 한다.
갑자기 셰익스피어가 언제 살았던 사람인지 궁금했다. 구글은 그가 1564년에 세례를 받았고 52세였던 1616년에 죽었다 가르쳐준다. 기원전 43년에 태어난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와 『변신이야기』를 검색해 본다. 여러 친절한 블로거들 덕분에 ‘테레우스의 배신과 필로멜라를 강간한 사건’에 대해 알게 되었다. 구글은 나를 “보고” 내 소리를 “듣고” 있을지 모른다더니 유튜브는 내게 필립 글라스의 「Metamorphosis(변신)」을 추천해 준다. 이리 쉽게 ‘앎’을 해결해 주다니, 인터넷, 참 좋은 세상이다. 아들과 함께 본 한 유튜브 동영상에서 마인크래프트 건축가 휘용이 그랬다, 마인크래프트에서 건축 가능 공간은 인터넷 세상이니 “무한대”로 보면 된다고. 『도서관, 그 소란스러운 역사』라는 책에서 매튜 베틀스가 한 말이 떠올랐다.
‘… 맹인 사서 보르헤스를 따라 서고에서 나와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바다에 뛰어들어 보기도 한다. 다행히 예상했던 것보다 충격이 그리 크지 않다. 거기서도 운이 따라야 원하는 자료를 찾을 수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도서관 그 소란스러운 역사』, 매튜 베틀스 지음,
강미경 옮김, 지식의 숲, 2016. 40-41쪽.)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그에 따른 기술이 발전할수록 원하는 자료를 찾을 수 있는 운도 조금은 좋아질까? 나는 라비니아처럼 인터넷 바다와 도서관을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닌다. ‘도서관이 모든 책을 소장하고 있다’는 보르헤스가 품은 ‘우아한 희망’을 인터넷이라는 정보망에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보르헤스는 ‘무한하게 많고 무한하게 얇은 종이로 이루어진 단 한 권의 책 … 눈에 보이는 각각의 종이는 다른 유사한 종이들로 연결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상상이 불가능한 한가운데의 페이지에는 뒷면이 없게 될 것’이라고 마치 인터넷 페이지들을 연상시키는 말을 『바벨의 도서관』에서 ‘우아한 희망’에 대한 각주로 썼다. 그에 따르면 이런 믿음은 ‘태곳적부터 있었다’. 무슨 말이 이렇게 어려워. 이런 건 더 읽지 말까. 굳이 이런 말을 곱씹어 이해해야 하나. 도서관에서 일하고 그냥 도서관이 좋은 나는 그래도 읽고 또 읽고 있다.
‘한 권의 책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바벨의 도서관」in『픽션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민음사, 2011, 106쪽.'완벽한 책'의 각주)
‘동일한 책들이 동일한 무질서 속에서 반복되고 있음으로 ….’
(「바벨의 도서관」109쪽.)
티투스와 라비니아가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를 펼쳐 ‘테레우스의 배신과 필로멜라를 강간한 사건’으로 소통하고 분노를 공유하는 순간, 나는 이것이 보르헤스가 말한 ‘동일한 책이 동일한 무질서 속에서 반복’되는 걸 발견하는 순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라비니아를 강간한 키론과 데메트리우스는 라비니아의 혀를 잘랐다. 여기에 더해 잔인하게 손까지 자른다. 필로멜라는 수를 놓아서 언니에게 자신이 당한 일을 알렸다고 한다. 그렇지, 말할 수 없을 때, 언어를 모를 때, 손이 대신할 수 있는 일이 많지. 필로멜라든 자기 처지를 알리는 언니 프로크네든 글을 읽을 줄 모르거나 쓸 줄 모르는 거야. 아니면 쓰지 못하게 하거나. 반면 라비니아는 글을 알아서 읽고 쓸 줄 아는 여잔 거지. 1990년대 배경 일본 영화 『행복한 사전』에 연애편지를 읽지 못하는 여주인공이 나오는 것하고 비교가 된다. 요즘은 컴퓨터 자판도 있고, 심지어 뇌과학도 발달해, 본 것을 직접 영상으로 출력 재생하는 것도 가능해질 거라는데 그렇게 되면, 혀를 뽑고 손을 자르는 걸로는 부족하겠는걸. 그런데 왜 라비니아는 말을 하려고 했을까? 말해봐야 결국, 아버지 손에 죽고 마는데….
티투스는 포로로 잡힌 타모라가 탄원함에도 그녀 아들을 희생제물로 쓴다. 또, 단지 전 황제의 맏아들일 뿐 왕으로서 터무니없고 가증스러운 사투르니누스를 황제 자리에 앉힌다. 후에 티투스는 가슴을 치며 후회한다. ‘아, 로마여, 너를 비참하게 만든 것은 나다. 나를 이처럼 학대하는 저자를 황제로 모시라고 한 것은 내 잘못이었다’고. 사투르니누스는 황제가 되면서 자기 동생 바시아누스의 약혼녀이며 티투스의 딸 라비니아를 왕비로 취하려 했다. 이에 저항하는 바시아누스. 티투스는 바시아누스 편을 드는 아들 무티우스를 자기 손으로 죽이는데 이때, 사투르니누스는 티투스를 비난하며 라비니아를 버리고 포로인 타모라를 왕비로 들인다(라비니아에는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타모라는 살결이 곱다고, 이런…). 타모라와 두 아들 그리고 타모라의 정부 아론은 음모를 꾸며 티투스에게 복수한다. 티투스의 불행은 잔혹했던 자기 잘못에 더해 참혹하고 잔인하게 이어진다. ‘권선징악(勸善懲惡)’에서 오로지 ‘징악’만이 춤을 추는 이 극에서 ‘권선’이랄게 있다면 책을 펼치고 막대기로 글을 써서 해낸 ‘라비니아의 폭로’가 아닐까 싶다. 라비니아의 폭로로 촉발된 복수의 카니발 끝에 티투스는 죽고, 추방당했던 티투스 아들 루키우스가 사투르니누스를 죽여 로마 군중들 앞에서 황제가 되며 극은 끝난다.
라비니아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황제 맘대로, 아버지 맘대로,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결혼할 뻔하고, 타모라와 그 정신 나간 아들들에게 강간당한 데 더해 혀와 팔을 잘렸다. 그녀는 안다. 아버지는 정조를 더럽힌 딸을 살려두지 않으리라는 걸,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지에는 죽음 아니면 치욕뿐이라는 걸, 여성의 이해는 완벽하게 제거된 세상이라는 걸, 그 악의 책임 소재가 어디까지 미쳐있는지까지. 그러나 그녀는 수치스러운 상항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고 끝까지 살아서 말한다. 자신은 강간당했다고, 범인은 키론과 데메트리우스라고. 여성이 소유물로 취급되고 강간당한 책임이 여성에게 있다고 하던 시대에 그것은 죽음을 각오해야만 하는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저항이지 않았을까. 그래서 나는 그녀가 그저 아무런 죄가 없는 불쌍한 희생양이기만 한 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티투스 집안 서재는 요즘으로 보면 가상이든 실재든 ‘도서관’으로 보인다. 필로멜라, 비르지니, 라비니아…, 이름도 모양도 다른 이야기들이 저마다 고독하게 있다가 우연한 시간 무질서하지만 주기적으로 반복하여 누군가의 목소리가 되고 다시 기록된 것들이 삶을 이어가는 장소. ‘도서관은 사회의 축소판’이라 하고 ‘책을 불사르는 행위는 결국 인간을 불사르는 것과 같다’(『도서관, 그 소란스러운 역사』에서 매튜 베틀스가 인용하고 있는 하이네의 말)고까지 하는 이유가 그것일 것이다. 티투스가 모래 위에 라비니아가 쓴 말을 구리판에 새겨 두었겠기에 그 모든 참사는 수치로만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죄 없는 라비니아의 존재가 사투르니누스를 죽이고 황제에 오른 루키우스를 정당화한다. 타모라도 라비니아처럼 수치를 당했으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살아남으려 죄악을 저지르는 타모라가 맞는 결과는 라비니아와 다르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수치를 당한 이들은 말도 꺼내 보지 못하고 들어 주는 이 없이 죽어갔다.
‘한 권의 책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보르헤스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 오영진 신부님이 남겨 놓은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에 따른 인명 표기 자료도 잘 정리해서 남겨두면 좋았을 텐데. 무한한 정보의 세계에서 그것이 들려주는 이야기 길이 언제 어떻게 열릴지 모를 일인데. 검색되지 않지만 있는 세상, 무한한 이름들, 삶들이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