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기)
세계외교사를 살펴보면 쓰시마의 ‘국서개작사건’처럼 상식이나 예의에 어긋나더라도 서로 국익에 부합한다고 하면 기꺼이 탁자를 마주하고 대화와 협상을 하는 장면이 종종 나와요. 이처럼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설령 상식이나 예의에 어긋나더라도 눈 감아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생각 하나)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햄릿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햄릿은 삼촌인 클로어디스가 제 아비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런 원수가 자신의 어미와 결혼까지 했지요. 햄릿 자신은 살아남기 위해 미친 척하고 살아갑니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존재로 살던 햄릿은 유령으로 나타난 죽은 아비의 메시지를 듣고 고뇌합니다. 그리고 자기 운명을 결정하는 선택을 하지요.
여러분은 날마다 크고 작은 선택과 결정의 순간을 마주합니다. 아마 오늘 아침 눈뜰 때부터 여러분이 미처 알아채지 못한 사이 이미 시작되었겠지요. '지금 일어날까, 조금 더 잘까?', '게임을 끄고 학원으로 갈까, 한판만 더할까?', '아는 척을 할까, 모른 척 지나갈까?' 어쩌면 그런 크고 작은 선택과 결정에 따른 행동의 결과들이 모여 지금의 여러분을 만든 것인지 모릅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격언 하나가 있지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조차 선택의 영역이라고 말할 수 있을 테니 선택과 결정이야말로 여러분이 살면서 평생 맞닥트려야 할 숙명과도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이는 한 개인이든 국가와 같은 커다란 집단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무언가를 선택할 때 여러분도 저마다의 기준을 갖고 결정하겠지요. 만일 개인의 문제라면 재미 또는 좋아하는 정도를 헤아려 취향에 따라 얼마든지 만족할만한 선택을 합니다. 그리고 그런 기준으로 선택한 것들은 여러분이 누구인가를 말해주기도 하지요. 그런 선택들이 모여 자기의 개성, 즉 남들과 다른 나만의 고유한 특성이 만들어진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좋든 싫든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내 선택이 다른 사람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겠지요. 이럴 땐 단순히 내 취향만을 헤아려 선택할 수만은 없습니다.
한 개인이 아닌 국가와 같은 커다란 집단이면 어떤가요? 한 나라의 선택이 수많은 사람은 물론 다른 생명, 자연, 전 지구에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뭐든 두루 헤아릴 것이 많아질수록 골치 아픈 일이고, 그 골칫거리를 현명하게 판단하고 결정하려고 나선 사람(뽑힌 사람)이 지도자, 즉 정치인이나 관료(공무원)라는 사람들입니다. 그럼 이런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이런 사람들은 어떠한 기준으로 판단할까요? 바로 명분과 실리입니다.
쓰시마 섬의 다이묘(영주)를 중심으로 한 관료들의 결정을 한 번 살펴볼까요.
명분은 보통 어떤 일을 할 때 내세우는 구실이나 이유를 일컫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게임을 하려고 합니다. 부모님 눈치가 보여요. 여태 공부했으니까 머리를 좀 식히려고, 지금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아이템이 있어서, 따위의 구실이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이유가 부모님께 먹히기도 하고, 안 먹히기도 하겠지만요. 그런데 이 사건이 있던 시대에 명분이란 건 조금 다른 의미였어요.
한자로 명분(名分), 이름이나 신분에 따라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같은 것이었죠.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각 이름(신분, 직위)에 걸맞는 말과 행동, 규범들 말이에요. 다이묘는 쓰시마 섬의 지도자, 우두머리이지만 일본이라는 한 나라로 봤을 때 작은 섬의 영주였어요. 당시 일본 전체를 아우르는 최고 권력자인 쇼군의 처지에서는 신하라고 볼 수 있지요. 다이묘는 쇼군의 신하로서 충성과 복종이라는 지켜야 할 명분이 있습니다. 쇼군을 속이고 국서를 제멋대로 고친다는 건 명분을 거스르는 일, 즉 역모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불충인 거지요. 명분에도 어긋나고 자칫하면 자기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는 위험한 결정을 해야 할 피치 못할 사정이 무엇이었나요? 먹고사는 문제였지요. 바로 실리입니다.
실리를 보다 간단하게 말하면 이익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하는 게 먹고사는 문제입니다. 실리란 말의 '리(이)'는 한자로 '利', 이롭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글자는 ‘벼 화(禾)’에 ‘칼 도(刀)’를 합친 글자에요. 농부가 벼를 베니 곡식이 생기고 이롭지요? 먹고사는 문제가 예나 지금이나 가장 중요한 이익이란 뜻이겠지요. 다이묘 입장에서는 신하로서의 명분보다 자신을 비롯한 쓰시마 섬 백성의 먹고사는 이익을 더 시급하고 중요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또한, 다이묘는 쇼군의 신하이기도 하지만, 쓰시마 섬에서는 지도자이기도 하잖아요. 쓰시마 섬으로 보자면 최고 권력자라는 명분이 한편으로 있는 겁니다.
이롭다는 뜻의 '利'에 칼이란 뜻이 들어있다고 했지요? 사전을 찾아보면 '利'자에 첫 번째로 나와 있는 뜻이 '날카롭다'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익은 달콤한 만큼 위험한 구석이 있습니다. 모두가 이익을 생각하니까요. 쓰시마 섬의 다이묘는 쇼군의 날카로운 검에 목이 달아날 위험을 감수하고 실리를 따른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쓰시마 섬의 다이묘는 자신의 선택에 확신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지도자라는 사람이 이런 엄청난 일을 꾸밀 때는 그 정도의 각오와 기개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쓰시마 섬의 다이묘가 저지른 사건은 자신이 모시는 쇼군과 조선의 왕을 속이고 양국의 신의를 해치는 간계로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쓰시마 섬의 백성과 전쟁으로 앙숙이 된 양국의 평화를 되살리는데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어요. 결과는 어떤가요. 도쿠가와 막부(조정, 정부)에서 이 사실을 알았지만, 쇼군 역시 불충을 단죄하는 명분보다 조선과 경제문화 교류를 통한 발전이라는 실리를 선택하지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건 간계든 묘수든 쓰시마 섬의 백성들 입장으로는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준 자신의 다이묘를 훌륭한 지도자로 여겼을 겁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있습니다. 일본 본토에서 이 사실을 알고 문책하는 과정에서 이 사건의 책임자인 쓰시마 다이묘가 아닌 애꿎은 사람의 목을 베는 것으로 무마했다는 것이지요. 상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이런 결과를 놓고 봤을 때 다이묘는 자신의 선택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오롯이 진 지도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떠올려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이렇게 명분과 실리가 부딪칠 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무엇일까 하는 점이지요. 바로 ‘숙의’라고 생각합니다. 숙의란 깊이 생각하여 충분히 의논한다는 말입니다. 이 사건의 당사자들을 다시 들여다보세요. 어려운 선택과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쓰시마 섬의 다이묘도, 조선의 조정도, 일본의 막부도 이 사안과 관련하여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숙의의 모습이 보입니다. 근대화 이전의 봉건 국가 시대였기에 한계가 있었겠지만 말이지요. 이런 숙의가 가장 잘 보장되는 제도가 지금의 민주주의입니다. 오늘날 지도자라고 나서는 사람들이 봉건 시대의 지도자들보다 못하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되겠지요.
이 책의 본디 제목은 '사건'으로 보는 조선통신사입니다. 이 책을 읽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던 말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건이 일어났다는 건 이 일을 벌인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했다는 말이고, 그 행동에 앞서 어떤 선택과 결정을 했다는 말일 테니까요. 왜 그랬을까, 그 사건의 결과가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나(당시는 물론 현재까지 어떤 영향을 끼쳤나), 이 두 가지 질문은 앞으로 보다 나은 선택을 위한 우리들의 결정에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가혹한 운명의 화살을 맞고도 죽은 듯 참아야 하는가.
아니면 성난 파도처럼 밀려드는 재앙과 싸워 물리쳐야 하는가.
죽는 건 그저 잠자는 것일 뿐,
잠들면 마음의 고통과 육신에 따라붙는 무수한 고통은 사라지지.
죽음이야말로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결말이 아닌가.」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아름다운 날, 2005, 83p
참고로 책을 못 본 사람을 위해 햄릿의 결말을 알려드리죠. 원수인 삼촌 클로어디스를 죽여 복수에 성공했지만, 자신도 죽고 제 어미도 죽게 됩니다. 그러니 비극이지요. 그러나 햄릿이라는 이름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살아남았습니다. 어떤가요? 햄릿은 죽음을 선택했으나 결과적으로 그 선택은 영원히 사는 길이었습니다.
지금 어떤 선택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나요? 명심하세요. 앞으로 하게 될 크고 작은 선택의 결과들이 모여 앞으로의 여러분을 만든다는 것을요!
1. 국서를 몰래 고쳐라!
임진왜란이 끝난 뒤 쓰시마에서 조선 조정과 일본 바쿠후(막부, 조정, 정부) 몰래 엄청난 수작을 부렸대! 자칫하면 쓰시마 다이묘(영주)가 목숨까지 내놓아야 할 처지였어. 그런데도 쓰시마는 왜 그토록 위험한 일을 남몰래 꾸미고 있었을까?
“영주님! 이대로 가다간 우리 쓰시마는 아예 끝장입니다, 끝장! 어떻게든 조선과 일본 사이에 다시 국교가 열려야 돈벌이도 되고, 조선으로부터 식량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긴 한데……. 임진왜란 때 우리가 앞장서서 조선으로 쳐들어가는 길을 안내했는데 지금 조선에 손을 내민다니 그게 될 말이오?”
“그래서 말인데요, 좋은 수가 있습니다. 이번에도 우리가 앞장서서 조선으로 가는 겁니다. 가서는 우리 쓰시마는 본래 힘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일본의 최고 실권자인 쇼군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며, 우리는 진실로 조선과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매달리는 겁니다. 만약, 우리 뜻을 안 받아들이면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은근히 몰아치기도 하고요!”
“그런데 암만 우리가 애걸복걸 매달린다 해도 조선이 쉽게 받아줄 리 없을 텐데……. 만약, 조선에서 어떤 조건을 내걸면 어떻게 하겠소?”
“그건 염려 마십시오. 우리가 중재하면 틀림없이 조선에서는 반응이 있을 겁니다. 그러면 조선 임금이 우리 쇼군에게 국서를 보낼 테니 그걸 우리가 먼저 보고, 살짝 고쳐서 쇼군에게 보내는 겁니다. 또, 쇼군이 조선 임금에게 보내는 국서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먼저 본 다음 살짝 고쳐서 조선에 보내는 거죠. 그럼 감쪽같을 겁니다!”
어때,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겠지? 맞아! 정말로 엄청난 일을 쓰시마에서 꾸미고 있는 거야. 조선 임금이 보낸 국서와 일본 쇼군이 보낸 국서를 자기네 마음대로 뜯어고치려는 거지. 이러다 딱 걸리는 날이면 목숨까지 내놓아야 할 판인데 말이야, 실제로 그렇게 했대!
왜 그랬을까?
임진왜란이 끝나자 쓰시마는 일본에서 가장 먹고살기 힘든 곳이 되었어. 왜냐고? 쓰시마는 예로부터 조선과 일본 사이의 중계무역으로 큰돈을 벌었거든. 또, 조선으로부터 곡식을 하사받아 부족한 식량을 채웠고. 그런데 임진왜란 때 조선을 짓밟는 데 쓰시마가 앞장섰잖아. 그러니 전쟁이 끝난 뒤 조선에서 쓰시마를 곱게 볼 리가 없지. 중계무역도 끊기고, 식량도 끊겼으니 쓰시마로선 여간 힘든 게 아니었어. 또, 일본 본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1536~1598)가 죽은 뒤 쇼군 자리를 둘러싸고 전투에 휩싸였거든. 그러니 쓰시마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 사정이 이러니 쓰시마의 형편이 어땠을까? 빤하지? 결국, 쓰시마는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선 거야. 그래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 끝에 ‘조선과 일본이 다시 국교를 맺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 거지. 필요하다면 두 나라 사이에 끼어 국서까지 제멋대로 고치려고 맘먹은 거야!
한편, 쓰시마의 요청에 대하여 조선은 어떻게 했을까? 사실 조선도 일본 사정이 무척 궁금했어. 일본이 다시 쳐들어올지 어떨지도 모르겠고, 임진왜란 때 붙잡혀 간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으니 마냥 쓰시마의 요청을 물리칠 수만은 없었지. 고심 끝에 조선에서는 사명대사 유정(1544~1610)을 일본에 탐적사로 보내기로 했어. 그러자 쓰시마는 잽싸게 끌고 간 조선인을 일부 돌려보내고, 다른 지역에도 연락해 붙잡아온 조선인을 돌려보내라고 발 빠르게 움직였지. 어떻게든 조선에 잘 보여야 국교가 다시 열릴 테니까! 이런 쓰시마의 간계와 도쿠가와 이에야스(1542~1616)를 만난 사명대사가 이에야스는 조선과 아무런 원한이 없다고 말했다는 보고에 따라 조선은 쓰시마에 답을 줬지. 그때가 임진왜란이 끝난 지 딱 십 년이 되던 1606년이었어. 대신에 조건을 내걸고, 이 조건을 받아들이면 다시 일본과 국교를 틀 수 있다고 전했지.
그럼 조선은 어떤 조건을 내걸었을까? 크게 두 가지야.
“첫째, 쇼군 이에야스가 먼저 조선에 국서를 보내야 한다! 둘째, 임진왜란 때 조선 임금의 무덤을 파헤친 범인을 붙잡아 보내야 한다!”
이런 조건은 쓰시마 입장에선 참 골치 아픈 문제였어. 왜 그럴까?
“영주님! 조선이 요구한 조건을 쇼군이 받아들인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입니다. 그러니 다른 길을 찾아야 합니다! 조선에 국서를 먼저 보내야 한다는 말은 다시 말해 이에야스 쇼군이 임진왜란에 대하여 사과해야 한다는 뜻이잖습니까? 그런데 조선과는 아무런 원한이 없다고 하는 이에야스 쇼군이 무엇 때문에 사과하겠습니까?”
“그렇지. 그래서 골치가 아프다는 말이요. 뭐, 뾰족한 수가 없겠소?”
“그래서 말인데요, 방법이 영 없는 것은 아닙니다.”
“방법이 있다? 무슨 수가 있단 말이오?”
“자칫하면 목을 내놓아야 할지 모르므로……. 보안을 철저히 하면 될 수도 있습니다만……. 과감히 그리고 몰래 국서를 고치는 수밖에 없습니다!”
“뭣이라? 국서를 고친다고?”
쓰시마는 조선의 첫째 조건인 ‘일본이 먼저 국서를 보낸다’는 말을 차마 쇼군에 전할 수 없었어. 그러니 쇼군이 먼저 국서를 보내는 것은 어렵다고 보고, 거짓으로 자기네가 국서를 만들어 조선 임금에게 보낸 거야. 그러자 조선으로서는 첫째 조건을 일본이 받아들인 것이니 큰 문제 하나가 풀린 셈이야! 이런 식으로 쓰시마는 그 뒤로도 조선 임금과 일본 쇼군 사이에 오간 국서를 죄다 고쳤거든. 이를 ‘국서개작사건’ 또는 ‘국서조작사건’이라고 해. 이제 쓰시마의 수작이 어떤 건지 눈에 선하지?
그렇다면 조선의 두 번째 조건을 쓰시마는 어떻게 처리했을까?
“둘째, 조선이 ‘왕릉을 파헤친 범인을 보내라’는 조건은 조선을 엉망진창으로 망친 책임을 묻겠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이 또한 쇼군이 받아들일 리 만무하지요. 그러나! 국서도 바꾸는 마당에 그보다 쉬운 일을 왜 처리하지 못하겠습니까? 우리 쓰시마의 감옥에 있는 죄인 가운데 두 놈을 조선으로 보내 그놈들이 조선 왕릉을 파헤친 범인이라고 우기면 됩니다!”
그래서 쓰시마에서는 왕릉을 파헤친 범인으로 엉뚱하게도 쓰시마의 죄인을 보냈어. 그러니 진실이야 어찌 됐건 조선이 내건 조건을 둘 다 들어준 셈이 됐잖아. 그렇다면 조선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을까?
“전하! 나라 사이에 오가는 국서, 그것도 먼저 사과를 하는 국서가 이렇게 몇 달 만에 왔다는 것은 의심쩍기 그지없습니다! 몇 년이 걸려 고민해도 그 답이 쉽지 않을 터인데, 이처럼 빨리 국서가 왔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전하! 다르게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쓰시마가 붙들어간 조선인을 되돌려 보내는 것도 그렇고, 사명대사의 보고를 들어도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저런 사정을 살펴볼 때 일본 또한 전쟁 피해를 줄이기 위해 능히 그럴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오랑캐 섬나라도 전쟁 뒤 편할 까닭이 뭐 있겠습니까? 행여 우리와 명나라 연합군이 쳐들어갈까 봐 걱정도 될 겁니다. 그러니 굳이 우리가 의심할 까닭이 없습니다.”
“전하!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왕릉을 파헤친 범인으로 새파랗게 젊은 죄인 두 사람을 보낸 것은 감히 오랑캐가 우리 조선을 우롱하는 짓거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은 임진왜란 때 고작 십여 세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신중히 생각해야 합니다!”
“전하! 젊은 죄인 둘을 보낸 것은 당연히 의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사정이야 어쨌건 국서도 먼저 보내왔고, 왕릉을 파헤친 죄를 물어 그 죄인도 보내왔으니 우리의 요구조건은 모두 받아들여진 셈 아닙니까? 게다가 지금은 북쪽 여진족의 움직임도 심상찮으니 남쪽을 미리 안정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 일본의 속셈도 알아볼 겸, 끌려간 우리 조선인도 되돌려 받을 겸 쇼군이 보낸 국서에 대하여 회답 국서를 보냄이 마땅한 줄 압니다!”
“알겠소. 짐이 쇼군에게 답장을 보내 끌려간 사람을 하루속히 돌려보내라고 요구하겠소. 그러면 일본으로 보낼 사신의 명칭은 어떻게 정하는 게 좋겠소?”
“전하! 일본 쇼군의 국서에 대한 답장을 보내는 것이니 ‘회답’이라 하고, 끌려간 조선인을 돌려받아야 하니 ‘쇄환’이라고 하면 좋겠습니다. 곧, ‘회답 겸 쇄환사’라 함이 옳겠습니다!”
조선은 이런 결정을 내린 뒤 ‘회답 겸 쇄환사’를 국서랑 함께 쓰시마로 보냈어. 물론, 쓰시마는 그 국서에도 손을 댔지!
“영주님! 조선이 보낸 국서에 ‘봉복’이란 말이 있는데 이는 반드시 고쳐야 합니다! ‘봉복’이라는 말은 ‘쇼군이 보낸 국서에 대한 답장’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쇼군은 국서를 보낸 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걸 보내면 우리가 마음대로 국서를 보냈다는 게 들통날 것이고, 경을 칠 게 빤합니다! 그러니 ‘봉복’이란 말 대신에 ‘봉서’라고 고치는 겁니다. 그러면 조선 임금이 처음으로 일본 쇼군에게 글을 올린다는 뜻이 됩니다!”
이렇게 조선의 국서를 맘대로 고쳐 일본 쇼군에게 전한 쓰시마는 마찬가지로 쇼군이 보낸 국서도 살짝 고쳐서 조선으로 보냈지. 이르자면 쇼군의 답장에는 ‘일본국 미나모토노 히데타다’라고 적혀있었는데, 이를 ‘일본 국왕 미나모토노 히데타다’로 고쳐 조선으로 보냈어. 심지어 국새까지도 몰래 만들어 찍었고 말이야. 이렇게 조선과 일본의 조정 몰래 국서를 고쳐 쓰는 짓거리는 2차 회답 겸 쇄환사, 3차 회답 겸 쇄환사 때도 마찬가지였어. 대담하지? 그렇다면 쓰시마의 이런 수작은 과연 언제까지 이어졌을까? 세상에 완전범죄는 없잖아!
“쇼군 전하! 쓰시마 영주가 조선 임금이 보낸 국서와 쇼군이 보낸 국서를 제멋대로 고쳤다 합니다! 이는 쓰시마가 전하의 권위를 깎아내림은 물론이고, 반란을 꾀한 것인지도 모르니 당장에 불러 직접 심문하되, 그 죄가 드러나면 엄히 다스려야 합니다!”
봐, 큰일 났지? 어쩐다? 쓰시마가 이 절대, 절명의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이제 쓰시마에서 온 답을 들어볼 차례야.
“쇼군 전하! 저희가 국서를 고친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습니다! 일찍이 도쿠가와 이에야스 쇼군은 조선과 친하게 지내길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찌 대일본의 쇼군이 조선 임금에게 먼저 국서를 보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희 쓰시마에서 대신 국서를 만들어 보낸 것입니다. 쇼군의 이름 앞에 일본 국왕이라고 한 것은 그래야 조선 임금과 대등한 관계가 되겠기에 그리 한 것입니다!”
그러자 일본 조정에서는 무엄하고 방자한 쓰시마 영주가 스스로 그 죄를 시인했으니 목을 베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 나왔어. 하지만, 비록 쓰시마의 죄는 괘씸하나 조선이 쓰시마를 통해 일본과 외교 문제를 통하는 만큼 쓰시마의 공로를 인정함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거든. 그래서 당장 조선과 평화롭게 지내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되므로 쓰시마를 용서하되, 앞으로는 쓰시마로 관리를 파견해 국서를 함부로 고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으로 마무리한 거야. 조선과 일본 본토 사이의 작은 섬 쓰시마는 그렇게 죽다 살아난 거지.
1633년, 쓰시마에서 국서를 몰래 고친 사실이 발각되었지만, 도쿠가와 바쿠후는 정작 책임을 져야 할 쓰시마 영주는 너그럽게 봐 주고, 아무런 책임도 없는 애꿎은 사람의 목만 베었대.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이에야스가 국서를 마음대로 바꾼 사실을 알면서도 조선과 국교를 다시 맺으려고 일부러 모른 척했다는 주장도 있어. 아무튼, 그 말이 옳고, 그른지는 더 연구해 봐야 할 거야.
그럼 일본은 그렇다 치고, 국서개작사건을 전해 들은 조선의 입장은 어땠을까?
“전하! 섬나라 오랑캐가 우리가 보낸 국서와 자기 나라 쇼군이 보낸 국서까지 맘대로 고쳤다 합니다. 이는 오랑캐가 감히 우리를 놀리는 것이니 엄하게 다스림이 옳을 줄 압니다.”
“전하! 아니 되옵니다! 비록 쓰시마에서 그런 몹쓸 짓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그 일은 우리의 문제가 아니요, 오랑캐끼리의 문제이므로 굳이 우리가 나설 필요가 없습니다!”
자칫하면 국서개작사건으로 두 나라 사이의 외교 관계가 더욱 오랫동안 끊어질 판이었어. 하지만 조선과 일본 두 나라 모두 양국의 평화를 원했거든. 그 때문에 쓰시마가 저지른 국서개작사건을 더는 문제 삼지 않은 거야. 건드려봐야 두 나라 모두 시끄럽기만 하잖아. 그렇게 쓰시마는 대역죄를 범했음에도 큰 문책을 당하지 않고 살아남았어. 재미난 것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서로 죽고, 죽이는 끔찍한 전쟁을 치러 철천지원수가 된 조선과 일본이 오래지 않아 저마다 제 나라에 유리한 명분을 앞세우며 선린외교를 유지하려 했다는 점이야. ‘역사의 아이러니’란 말은 이럴 때 쓰는 것 맞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