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기)
일본은 임진왜란 직후를 봐도 어떤 일을 처리하는 체계가 꽤 잘 구축돼 있음을 알 수 있어요. 피로인의 경우만 해도 양반 출신의 지식인, 도공이나 바느질꾼처럼 기술자, 일반인 등으로 구분해 일본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했거든요. 반면, 조선은 임금이 어명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되돌아온 피로인을 도와줄 대책을 성심껏 세우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지요. 이처럼 어떤 일이 생기면 그에 대한 대처를 잽싸게 체계적으로 세울 필요가 있는데요, 그건 외교 관계도 마찬가지라 하겠어요. 그렇다면 오늘날 한일관계에서 독도나 위안부, 무역 갈등처럼 쟁점이 되는 사안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준비를 해야 일본에게 당하지 않고 일본을 제대로 상대할 수 있을까요? 또, 가장 평화롭게 두 나라 모두 득이 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생각 둘)
지난 1편에서 우린 조선통신사 뱃길을 다시 여는 데 기여(?)한 다이묘의 목숨을 건 선택(또는 신의를 저버리는 간계)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지도자나 백성들의 집단 의지가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하느냐에 따라 역사의 향방이 정해지곤 하는데, 그때 가장 중요하게 헤아리는 두 가지 판단 기준이 있다고 했어요. 그렇습니다. 바로 명분과 실리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한 편에 서 있다면 문제 될 것이 없지만, 이 두 가지 가치가 서로 충돌할 때 인간은 더 나은 선택을 위해 고민하게 됩니다. 특히, 지도자라면 눈앞의 이익도 중요하지만, 나라의 앞날을 헤아리는 큰마음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두 번째 사건을 볼까요. 조선은 통신사를 보내기에 앞서 ‘회답 겸 쇄환사’를 파견했다고 했지요. ‘쇄환’은 잡혀간 이들을 데려오는 일을 말해요. 사절단의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겠네요. 전쟁통에 잡혀간 백성들을 데려오는 건 만백성의 어버이라는 임금의 명분으로서도 그렇지만, 전쟁 후 나라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젊은 노동력이 필요한 나라 사정 즉, 실리로도 필요한 일입니다. 이렇게 명분과 실리가 한편인 데다가 지도자의 의지도 있었음에도 성과가 그리 신통치 않았어요. 왜 그런가요?
에드 영이라는 작가가 그리고 쓴 『일곱 마리 눈먼 생쥐』라는 그림책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아 만든 책입니다. 코끼리 다리를 만진 빨간 쥐는 기둥이라고 믿고, 코를 만진 초록 쥐는 뱀, 상아를 만진 노란 쥐는 창, 머리를 만진 보라 쥐는 낭떠러지, 귀를 만진 주황 쥐는 부채, 꼬리를 만진 파란 쥐는 밧줄이라고 주장합니다. 마지막 하얀 쥐는 어떨까요? 다른 여섯 마리가 하는 말을 듣고 그들이 만진 곳을 죄다 가서 만져본 다음 실체가 코끼리라고 알려주지요.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단순합니다. 어떤 의도를 헤아릴 필요가 없지요. 자연(自然), 말 그대로 자기 스스로 그러한 거잖아요. 태풍이 불어 농작물이 상했어요. 태풍이 나쁜 마음을 먹어 밭을 헤집어 놓는 게 아니지요. 여행을 가는데 날씨가 참 좋아요. 편안하게 멋진 풍경을 잘 보라고 여행자를 배려해서 해가 쨍한 게 아닌 것처럼요.
반면,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 사건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요. 자연과 달리 사람은 봄날 날씨처럼 변화무쌍한 감정을 가지고, 저마다의 사정이 있으며, 다른 누군가와 관계 속에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지요. 따라서 우리가 한 사건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려면 헤아려야 할 태도가 있습니다. 바로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눈을 갖는 겁니다. 한쪽의 시선이 아닌 다른 쪽으로 시야가 열려 있어야 하지요.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눈먼 일곱 마리 생쥐 이야기처럼 저마다 만져본 곳이 다르니 저마다 믿는 진실이 달라요. 눈먼 쥐들이 일부로 거짓을 말하는 건 아니잖아요. 저마다 만져서 알게 된 세계가 다를 뿐이지요. 우리는 지혜로운 하얀 쥐처럼 자신이 보고 겪은 걸 바탕으로 하지만 다른 사람의 지식과 경험을 보태서 판단해야 합니다. 그럼 하나의 눈이 아니라 일곱 개의 입체적인 눈으로 이 사건을 바라봅시다.
왜란 때 일본으로 잡혀간 피로인들은 모두 일곱 가지 경우가 있었다고 해요. 첫째로 싸우다 잡혀간 경우, 둘째로 직접 전투에 나서진 않았지만, 성을 쌓거나 식량을 조달하거나 하는 일을 하다가 잡힌 경우, 셋째로 일본 내 부족한 노동력을 메꾸기 위해 끌고 간 경우, 넷째로 도공 등 일본에 필요한 기술을 가진 경우, 다섯째로 여자나 어린아이 가운데 예쁘거나 재능이 있어 끌고 간 경우, 여섯째로 전쟁 중에 왜군에 협력한 경우, 일곱 번째로 돈벌이 수단으로 노예매매를 목적으로 끌고 간 경우입니다. 일곱 가지 경우를 헤아려볼 때 피로인들 가운데 하루라도 빨리 조선으로 되돌아오고 싶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첫 번째와 두 번째 경우를 먼저 볼까요. 전투에 직간접으로 참가한 사람들이니 나라에 대한 애국심이 있고 전쟁을 일으킨 일본에 대해선 원한이 있는 사람들이 많겠네요. 일본 처지에서는 말 그대로 적군이니 대우를 좋게 해줄 리가 없을 겁니다. 일곱 번째 경우는 노예로 팔려간 신세였으니 기록에 보이는 대로 그 처우는 더 말할 나위가 없을 테고요. 그러니 이런 경우에 속하는 피로인들은 조선으로 돌아오길 바라는 사람들이 많았을 거라 짐작할 수 있겠어요. 여섯 번째 경우는 어떤가요? 나라를 배신하고 일본에 협조한 매국노잖아요. 제 발로 돌아올 리 없습니다. 그렇다면 셋째, 넷째, 다섯 번째 경우의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자기 의지가 아니라 일본이 필요해서 끌고 간 경우입니다. 조선으로 돌아오길 바랐을까요, 계속 일본에 남길 바랐을까요. 결과를 놓고 보면 이들의 상당수가 조선으로 돌아오길 바라지 않았던 것 같네요. 왜 그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나요? 이들은 명분과 실리 가운데 어떤 걸 선택했나요? 여러분은 이들의 선택을 비난하는 쪽인가요, 이해하는 쪽인가요?
당시 조선도 끌려간 이들을 모두 데려오고 싶었을 겁니다. 그들을 잘 대우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절실하게 매달릴 정도로 이 문제를 살핀 건 아닌 것 같네요. 명분 치레 정도로 적당히 이 문제를 넘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어렵게 돌아온 자들의 대우마저도 박했다는 걸 보면 그렇습니다. 오랜 전쟁으로 인한 수습과 재건으로 나라 살림이 어려웠다 하더라도 임금부터 관료까지 자기 몫을 내놓아서라도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백성들을 챙겼어야 마땅하지요. 그래야 나라가 어려워지면 백성들이 목숨 걸고 나서지 않을까요? 이런 선례들이 모여 부강한 나라가 만들어집니다. 결과로 놓고 보면 자기 이익을 셈하여 일본에 남은 사람들의 선택이 더 현명한 판단이 되어버렸습니다. 다음에 벌어질 미래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관료들의 무능과 타락, 백성들의 빈곤, 결국 나라를 잃은 설움으로 이어집니다. 물론, 목숨을 건 많은 애국자가 있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이 일본에 부역하거나 자기 안위를 위해 침묵했습니다. 정말 슬프고 안타까운 역사이지요.
피로인들을 어떻게 대우했느냐를 두고서 당시 조선의 행태를 비난하고, 잡아간 포로들을 선별하여 이익이 되는 자들에게 대우하면서 실리를 찾은 일본을 후하게 평가하는 것은 여섯 마리 눈먼 쥐의 태도일 겁니다. 전쟁은 어떤 명분과 이유에서든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전쟁을 일으킨 쪽은 일본이고, 전쟁터가 된 조선은 피해국입니다. 가해와 피해라는 양단의 입장으로써 일본은 전범이지요! 그렇다고 일본은 가해국으로 나쁜 쪽, 조선은 피해국으로 좋은 쪽으로만 평가할 수도 없습니다. 피로인들의 선택을 두고서도 조선으로 귀환을 바란 피로인들은 애국자로 좋은 쪽, 일본에 남은 피로인들은 배신자로 나쁜 쪽으로 평가할 수도 없지요. 전쟁 이후 조선과 일본의 형편, 당시 피로인들이 처한 나름의 형편들을 죄다 헤아려야 합니다.
자, 정리해봅시다. 지난 1편의 글에서 어떤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을 때 보통 그에 해당하는 사람(또는 집단)의 선택과 결정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과 결정의 기준이 되는 중요한 잣대로 명분과 실리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쯤에서 여러분에게 이미 벌어진 사건을 판단하고 평가할 때 유용하고 이롭게 쓰일 수 있는 무기 하나를 더 알려드릴까 합니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요. 바로 그러한 선택과 결정을 한 사람(또는 집단)이 처한 상황, 나름의 ‘형편’입니다.
「머리가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313p
지금은 돌아가신 신영복 선생이 오랜 감옥 생활을 하는 가운데 가족, 지인과 주고받은 서신을 모아 엮은 책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위에서 가져온 문장 가운데 입장을 형편으로 바꿔 말하면 되겠지요. 입장(立場)은 곧 내가 발 딛고 선(立) 곳(場)을 말합니다. ‘입장의 동일함’은 달리 말하면 역지사지의 자세이지요. 저 사람의 발, 저 사람의 눈, 저 사람의 머리가 되어보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선택하고 결정할 때 나의 명분과 실리를 저울질하는 것에서 나아가 상대의 입장, 즉 형편을 헤아리는 것이 더 어렵고 큰마음입니다.
다시 위 사건으로 돌아가 봅시다. 조선의 임금과 관료들은 명분에서도 실리에서도 당연히 피로인들을 모두 데려오는 선택을 합니다. 하지만, 전쟁 후 당시 조선의 상황이 좋았을 리 없겠지요. 그러니 쉽게 현실과 타협하고 피로인 귀환 문제는 흐지부지 넘어갔을 테고요. 만약, 조정에서 당시 끌려간 당사자들이나 그 가족의 처지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았다면 어땠을까요? 말 그대로 뼈와 살을 깎는 아픔을 느끼며 제 기득권을 포기하면서라도 피로인들을 데려오고, 대우하는 데 온 힘을 쏟았을 겁니다.
조선을 침략한 일본은 어떤가요? 처음부터 이들은 자국의 실리와 그 실리를 가릴 명분을 찾는 일이 더 중요했지요. 만일, 저들이 무고한 조선 백성들의 형편을 헤아렸다면 애초부터 전쟁을 일으키지도 않았겠지요. 이런 의미에서 보면 ‘입장의 동일함’이야말로 ‘관계의 최고 형태’라는 위의 말은 충분히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다만, 최고의 형태란 좀처럼 현실에서 실현되기 어려운 이상이라는 게 문제지요. 적어도 한 나라를 이끌겠다고 나선 사람들이라면 최고의 결정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끝으로 『눈먼 일곱 마리 쥐』의 이야기에서 빼먹은 중요한 사실 하나를 덧붙이는 것으로 이번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사실 이 쥐들에게는 눈이 멀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결함이 있습니다. 눈치채셨나요? 바로 귀도 멀었다는 거지요. 자기가 알게 된 사실만 진실이라고 우기면서 다른 쥐들의 말은 하나도 귀담아듣지 않잖아요. 시각장애인들이 들려주는 말에 따르면 눈이 안 보이는 대신 다른 감각에 더 집중하게 되면서 청각 같은 감각이 더 예민해진다고 하거든요. 이 쥐들은 이렇게 더 민감해진 청각마저도 닫고 사는 꼴입니다. 유일하게 하얀 쥐만이 귀를 열고 다른 쥐들의 말을 존중하며 자기 손과 발로 직접 코끼리의 전체를 만지고 판단합니다. 여러분은 어리석은 여섯 마리의 쥐 가운데 하나가 아닌 한 마리의 특별한 하얀 쥐가 되기를 바랍니다.
2. 끌려간 우리 백성, 피로인을 데려와라!
임진왜란이 끝난 뒤 조선에서 일본으로 보낸 외교사절단으로 ‘통신사’가 있어. 그 통신사의 전신인 ‘회답 겸 쇄환사’를 파견할 때, 조선 조정에서는 두 가지 중요한 임무를 맡겼어. 하나는 일본의 수도인 에도 즉, 오늘날의 도쿄로 들어가 쇼군을 비롯한 일본 지배층의 속사정을 살피는 것이고, 하나는 임진왜란 때 끌려간 피로인 곧, 조선 백성을 데려오는 것이야. 일본 학계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은 적게는 2만 명에서 3만 명, 많게는 5만 명에서 6만 명 정도로 보고 있어. 그러나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짐작해. 왜냐하면, 끌려가던 중에 죽은 사람도 부지기수고, 어떤 사람은 통계에 잡히지도 않은 경우도 흔했거든.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아? 전쟁을 치르면 전투하기도 급급할 텐데 어찌하여 왜군은 힘없고 죄 없는 조선 백성을 마구잡이로 붙잡아 갔을까?
“조선으로 쳐들어가려면 병사 십오만이 필요하다. 빨리 병사를 더 늘리도록 하라!”
“아니, 그렇게 농민을 왕창 데려가면 농사는 누가 짓고, 일은 누가 다 한다는 말입니까?”
“그런 건 걱정하지 마라! 조선으로 가면 조선인을 많이 잡아 올 것이다. 그러면 너희가 그놈들을 노예나 하인처럼 마구 부려먹으면 될 것 아니냐?”
임진왜란 때 일본은 조선인을 강제로 잡아가서 노예처럼 부려먹기도 하고, 심지어 멀리 포르투갈 상인에게 총포나 비단을 받고 팔아넘기기도 했어. 그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의 삶이 어떠했는지 잠시 살펴볼게.
일본 승려 게이넨이 쓴 『조센히닛키』를 보면 끌려간 조선인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어.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일본 상인이 앞다투어 왜군을 따라 다니며 ‘사람 팔고 사기’를 하는데 너무나 처참하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새끼줄에 목이 엮인 채 앞으로 내몰려 종종걸음을 쳤고, 몽둥이로 때리는 광경이 마치 무식한 죄인을 고문하듯 한다. 들이나 산, 성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쳐 죽이고, 대꼬챙이로 머리를 찌르고, 아비는 자식을 한탄하고, 자식은 아비를 찾으니 처음 본 광경이다. 조선 아이는 인질로 잡혀가 부모와 떨어지니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서로 슬퍼하는 것은 마치 감옥 안에 있는 죄인이 고문을 받는 것과 같았다.」
승려였던 일본인의 눈에 비친 조선인의 처참한 모습이 눈 앞에 펼쳐지지 않니? 아마 실제 벌어졌던 상황을 글로 다 표현하지 못했을 텐데도 이 정도면 뭐, 그 처참하고 끔찍함이란 상상을 초월하겠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의 끔찍한 생활을 일본인만 고발한 게 아니야. 조선의 유학자도 그 참상을 낱낱이 고발했지. 형조좌랑을 지냈던 유학자로 강황(1567~1618)이란 분이 있어. 강황은 임진왜란 때인 1597년 5월 오늘날의 전라남도 영광군에서 군량을 조달하는 담당관으로 일하고 있었거든. 그때 해안이 왜군에게 점령당해 식구를 데리고 배로 도망치다가 그만 왜군의 습격을 받아 식구 여럿이 물에 빠져 죽고 말았어. 강황도 물속에 몸을 던졌으나 왜군에게 붙잡히고 만 거지. 그 강황이 쓴 『간양록』에 남긴 기록을 한번 볼까.
「일본 배 안에는 남녀가 뒤엉켜 쓰러져 있고, 배의 양쪽 옆면에는 시체가 어지럽게 산같이 쌓여 있었다. 통곡 소리는 하늘을 찔렀고, 파도도 울부짖는 듯했다.」
실제로 강황의 형제와 자식 가운데 바다에 빠져 죽은 사람이 셋, 일본에서 죽은 사람이 둘, 살아남은 것은 여자 자식 하나뿐이었어. 그러니 끌려간 조선인의 삶이 얼마나 견디기 힘들고 어려운지 짐작이 가고도 남을 거야.
한편, 끌려간 조선인 가운데도 유학자나 도자기 기술자, 바느질을 잘 하는 사람은 일본에서 제법 괜찮은 대우를 받으며 살았어. 왜냐하면, 그런 학자나 기술자들은 일본에서도 꼭 필요한 사람이었거든! 자, 이 정도면 피로인이 누구인지, 피로인을 왜 문제 삼는지 알 수 있겠지?
그렇다면 ‘통신사’건, ‘회답 겸 쇄환사’건 조선의 관리가 일본을 오갈 때 이 피로인 문제를 어떻게 다루었을까?
통신사는 쇼군에게 국서를 전한 다음에는 오로지 피로인을 데려오는 데 모든 힘을 쏟아부었대. 하지만 피로인을 데려오는 문제가 조선의 뜻대로 호락호락하지 않았어. 기록을 보면 1607년에 일본으로 공식 사신이 가기 전까지 되돌아온 피로인의 숫자는 손으로 꼽을 만큼 적었고, 1607년 이후 사행 때 돌아온 피로인도 얼마 되지 않았거든. 그래서 조정에선 이를 두고 ‘구우일모’라 했어. 즉, 말 그대로 ‘아홉 마리 소 가운데 박힌 털 하나’니 그 많은 소털 가운데 달랑 털 하나란 소리잖아. 그만큼 적었다는 거야. 그런데 쇼군도 피로인을 데려가라고 허락했건만, 왜 피로인을 되돌려받는 일이 이처럼 쉽지 않았을까?
“다이묘님! 바쿠후와 쓰시마 번에서 임진왜란 때 붙잡아 온 조선인을 돌려보내라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조선에서 목숨 걸고 잡아 왔는데 왜 보낸단 말이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어디서 저토록 훌륭한 도공, 뛰어난 바느질꾼을 구할 수 있겠소? 쓰시마야 조선에 잘 보여야 먹고 살 수 있지만, 우리는 굳이 그럴 까닭이 없지 않소?”
“맞습니다! 피로인도 이제는 대부분 결혼해 아이까지 두고 있으니 쉽사리 조선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은 일본 사람이 다 되었다고 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그렇소! 그뿐만 아니라 쇼군께서 ‘되돌아갈 마음이 있는 피로인만 돌려보내라!’ 했잖소? 그 말은 곧 우리가 돌아갈 마음이 없다고 전하기만 하면 된다는 뜻이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피로인이 아예 사신을 만나지 못하도록 잘 살피도록 하시오!”
< 표 1 > 1605년에서 1643년 사이에 사신이 데려온 피로인 수
연도 내용
1605 1,390여 명 / 사명대사
1607 1.240명 / 회답 겸 쇄환사
1617 321명 / 회답 겸 쇄환사
1624 146명 / 회답 겸 쇄환사
1643 14명 / 통신사
『조선통신사』, 이원식
사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사명대사가 공식적으로 피로인을 데려온 1605년 이전에도 우리가 데려왔거나 일본에서 보낸 피로인이 있었거든. 1599년에 15명, 1600년에 520여 명, 1601년에 250여 명, 1602년에 230여 명, 1603년에 200여 명 등이야. 한편, 강황처럼 도망쳐 온 사람도 있는데, 1600년에 약 50여 명이 도망쳐 왔지.
아무튼, 왜 피로인이 쉽게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했는지 짐작이 가지? 일본 바쿠후는 조선 사신에게 정성을 다한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피로인을 돌려보내란 명령을 내리긴 했지만, 애써 나서지 않았으니 그 일이 잘 될 턱이 없지. 그런데 이런 사정 말고 또 다른 사정도 있어서 피로인이 쉬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했다고 해. 대체 어떤 사정이 더 있을까?
일본으로 가서 피로인을 만난 사신은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자극하며 조선으로 돌아가자고 달랬으나 그다지 성과가 없었대. 조선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피로인은 양반 계층 아니면 일본에서 먹고사는 생활이 어려운 사람이었거든. 그와 달리 일본에 처자가 있거나, 먹고 살 만하면 거의 되돌아갈 마음이 없다는 거야. 또, 피로인 사이에 나쁜 소문도 널리 퍼져 있어서 더더욱 어려움이 컸다고 해.
“조선으로 돌아가면 어떤 사람은 먼 곳으로 귀양 보내고, 어떤 사람은 따로 모았다가 종으로 부려먹는다.”
“임진왜란 때 일본을 도운 사람이나 양반에게 불만이 많은 사람은 죽음을 면치 못한다.”
솔직히 말해 조선에서 먹고 살기 힘든 평민이 일본에서 잘 산다면 굳이 조선으로 되돌아갈 까닭이 없잖아? 또, 전쟁 때 썩어빠진 양반을 혼내주거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왜군을 도운 백성도 있었는데, 그들은 설령 돌아가고 싶어도 처벌을 받을까 두려워 돌아올 수 없었던 게지. 실제로 이문장(?~?)이라는 피로인은 다음과 같이 떠들고 다녔대.
“조선의 법이 일본만 못하고, 생계가 어려워 살 수 없으니 돌아가도 아무런 득이 없다!”
그럼 실제로 일본으로 간 사신의 눈에는 이 문제가 어떻게 비쳤을까? 부사로 일본에 다녀온 강홍중(1577~1642)이 쓴 『동사록』을 보면 잘 살펴볼 수 있어.
「일부 피로인은 돌아가기를 애걸하기도 하고, 일부는 빚 때문에 돌아가지 못한다 하여 대신 갚아주었다. 한편, 일본에는 물자가 많고 백성이 편안해 살기가 넉넉하며, 피로인도 수년 사이에 수백 금을 모았으니 이 때문에 돌아갈 뜻이 없다. 심지어 양반의 자식조차 돌아간다 하고선 나타나지 않았다.」
역시 같은 시기에 종사관으로 일본으로 간 이경직(1577~1640)이 쓴 『부상록』에도 비슷한 대목이 있어.
「지나오는 길에 간혹 피로인이 있었으나 그 수가 많지 않고, 일본의 도읍지인 에도에 도착한 뒤에도 찾아오는 사람이 잇달았으나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주 적었다. …… 중략 …… 나이가 열 살이 되기 전에 잡혀 온 사람은 말이며 하는 짓이 왜인이었는데, 조선 사람이라는 것은 아는 까닭으로 통신사를 만나러 온 것이고, 조선을 그리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 중략 …… 생계가 조금이라도 넉넉하여 이미 뿌리를 박은 사람은 돌아갈 뜻이 전혀 없었다.」
그런 탓에 피로인을 데려오려고 엄청 애썼음에도 데려온 피로인은 얼마 되지 않았던 거야. 그렇다면 이렇게 어렵사리 되돌아온 피로인을 조선에서는 어떻게 대했을까?
1624년 사행 때 데려온 피로인의 보기를 들어볼게. 앞서 강홍중, 이경직이 사신으로 다녀온 때야. 사신이 피로인을 가까스로 달래 조선으로 데려왔으나 그 대접은 형편없었대. 임금님까지 나서서 피로인을 데려오라 했건만, 정작 부산에서는 피로인에게 줄 양식이 없어 사신이 먹던 식량을 나눠주기도 했어. 또, 피로인을 고향으로 데려다줄 아무런 준비가 돼 있지 않아 기껏해야 사신이 피로인의 고향에다 편지 한 장 달랑 써주는 게 고작이었지. 그러니 일본에서 피로인을 조선에서 푸대접한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거야. 이런 점은 우리가 지금도 곰곰이 생각할 대목이라 할 수 있어. 비록 임진왜란이 끝난 뒤여서 조선의 살림살이가 어렵다 하더라도 머나먼 바다 건너 왜국에서 실컷 고생하다 온 사람을 따뜻이 맞이해야지, 그렇게 내팽개치듯 하면 누가 좋아할까! 사실, 조선도 일본처럼 기술자나 도공을 어느 정도 떠받들었다면 피로인이 되돌아오지 못할 까닭이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