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것을 봐 줄 사람이 없습니다.
인생은 연극과 닮아 있었습니다.
무대는 하나였지만, 얼굴은 늘 바뀌었습니다.
짧은 삶이었지만
나는 꽤 많은 얼굴로 살아왔습니다.
학생 시절의 나는
부모님과 선생님에게 잘 보이는 얼굴이었습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 말 잘 듣는 아이.
말썽은 내 일이 아니었고,
대학에 들어가서도 휴학 한 번 없이 정해진 시간표를 따라 살았습니다.
일탈은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습니다.
졸업을 앞두고 취업을 했습니다.
선택이라기보다 조건에 가까웠습니다.
졸업 전에, 공백 없이.
전공 동기들 대부분이 제약회사 영업직으로 향했고
나 역시 ‘어울리는가’를 묻기 전에
‘들어갈 수 있는가’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 무렵의 나는 양복 한 벌 없었습니다.
그래서 빌렸습니다.
드라마 속 인물의 얼굴을.
유준상 배우가 연기하던
자신감 있고 단단한 남자의 표정과 태도를.
면접에서도, 첫 출근에서도
나는 나를 연기했습니다.
첫 현장에서 간호사는 단번에 알아봤습니다.
“신입 사원이시죠?”
원장님을 뵈러 왔다는 말은 목에 걸렸고
경력자인 척, 여유 있는 척
나는 또 다른 얼굴을 꺼내 들었습니다.
유쾌한 사람처럼, 열정적인 사람처럼.
회사를 옮긴 뒤에는
사람들 앞에 서는 역할이 주어졌습니다.
사내 행사, 외부 세미나, 교육 진행.
성격과는 맞지 않았지만
모든 멘트를 플레이 버튼처럼 꺼낼 수 있을 때까지
연습했습니다.
김제동을 비롯한 유명 MC들의 말투와 호흡을
분석했고 그대로 내 몸에 붙였습니다.
반응은 좋았습니다.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원래 잘하시는 분이네요.”
“천성이시군요.”
하지만
단 한 번도 편안했던 적은 없습니다.
늘 무대 위였고,
늘 연기 중이었습니다.
이제는
일 잘하는 척 하지 않아도 됩니다.
멋있는 척, 열정적인 척 하지 않아도 됩니다.
있는 그대로 일하고
있는 그대로 생활합니다.
웃고 싶을 때 웃고
기분이 상하면 화도 냅니다.
50대는
내 얼굴로 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 얼굴을 마주할 사람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