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사진 속에라도, 배우고 싶었던 아이
엄마의 사인이 담긴 신청서—
그 작은 글씨 하나가, 그날 나에겐 전부였다.
수요일.
그날은 방과 후 수업이 처음 시작되는 날이었다.
나는 알림장에 적힌
‘바이올린 수업’이라는 글자를 품에 안고
종일 마음이 들떴다.
그 설렘엔 이유가 있었다.
같은 피아노 학원에 다니던 수윤 언니.
예쁘고, 착하고, 피아노도 잘 치고,
거기다 바이올린까지도 정말 예쁘게 연주하던 언니였다.
“너도 해봐, 재밌어.
학교에서도 배울 수 있대.”
그 말 한마디가 마음에 오래 남았다.
전날 밤,
나는 엄마에게 조심스럽게 신청서를 내밀었다.
“엄마, 이거 2만 원 레슨비 있는데 괜찮아요?”
엄마는 종이를 보시고,
“그래, 학교에서 2만 원에 해주니까 너무 감사하네.
엄마가 사인해 줄게. 가져와봐.” 하시며 웃으셨다.
나는 그 종이를 반듯하게 접어
알림장 사이에 넣고 잠들었다.
다음날 점심시간이 얼른 오기를,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기대하며.
4교시 종이 울렸다.
나는 복도를 달리듯 걸어
바이올린 수업 교실 앞에 섰다.
문 너머로,
아이들이 하나둘 자기 악기를 꺼내
벌써 활을 켜고 있었다.
짧은 음이었지만,
기대 가득한 첫 수업의 공기가 느껴졌다.
나는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내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여긴 바이올린 있는 친구들만 수업 가능해요.
악기 없는 친구는 다른 반 찾아가야 돼요.”
선생님의 말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용히 돌아섰다.
새하얀 실내화를 질질 끌며
마룻바닥을 천천히 지나가는 발걸음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나만 혼자,
조금 늦게, 조금 외롭게
그 복도를 걷고 있었다.
어느 교실에서는 종이접기 반,
또 다른 교실에서는 체육활동 소리가
들려왔다.
문 앞에 서 있는 아이들은
서툰 인사를 주고받고 있었고,
누군가는 선생님과 함께 웃고 있었다.
나는 그 모든 교실을
복도 끝까지 지나쳤다.
뒤에서는 여전히
바이올린의 낯설고 예쁜 소리가
조용히, 길게 따라왔다.
그날 저녁,
엄마는 웃으며 물으셨다.
“오늘 바이올린 수업 재밌었어?”
나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엄마, 신청서를 더 빨리 냈어야 했나 봐.
레슨 받을 수 있는 인원이 벌써 다 찼대.
그래서 그냥 신청서 다시 받아서
더 재미있는 수업으로 들어갔어.”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씀하셨다.
“점심에 갖다 내지 말고,
아침에 빨리 갖다 내지, 그랬노.”
그 말이,
나에겐 충분한 위로였다.
엄마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으니까.
내 상황도, 내 마음도.
얼마 뒤,
피아노 학원에서 프로필 사진을 찍는 날이 왔다.
언니는 피아노 앞에 앉아 포즈를 잡고 있었고,
나는 그 옆에 서서 찍을 예정이었다.
그 순간,
나는 수윤 언니에게 조심스레 다가갔다.
“언니, 그 바이올린… 잠깐만 빌려줘도 돼?”
언니는 활을 어떻게 쥐는지도
자세히 알려주었다.
나는 꼭,
3년은 배운 아이처럼
자연스럽게 악기를 껴안았다.
그 모습으로,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바이올린 수업은 듣지 못했지만,
나는 그 악기를 사진 속에서 품었고,
그 마음을 품고
조금 더 조용한 어른이 되었다.
그 사진 속,
웃고 있는 나는 참 예뻤지만
그 웃음이 진짜 위로였다는 건
오래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엄마의 사인이 담긴 신청서
그 작은 글씨 하나가, 그날 나에겐 전부였다."
이 말이, 오늘 누군가의 마음을
조용히 감싸주었다면
저는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오늘,
이 글이 올라가면
엄마는 아시겠죠
그날의 진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