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지하철 교통약자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고관절과 무릎이 무너지며 의사는 최대한 활동량을 줄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말했다.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릴 때는 무조건 오른쪽의 안전봉을 잡고 오르내리는 것, 계단이 좀 긴 구간은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에 조금 익숙해지던 참이었다.
나이 많은 어르신들 틈에 끼어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
사람이 많이 붐빌 때는 눈치껏 뒤로 물러서 다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것.
젊은 사람이 당당하게 노약자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을 지켜보는 시선.
이 모든 것들에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있다.
교통약자 엘리베이터에 닫힘 버튼이 눌리지 않는다고 성을 내는 사람들.
지하철 승강장의 교통약자 엘리베이터는 닫힘 버튼이눌리지 않는다. 교통약자들과 휠체어가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에 일부러 비활성화한 것이다. 반면, 열림 버튼은 아주 세심한 센서가 작동한다. 출입문에 조금만 닿아도, 선을 조금만 넘어도 문은 다시 열린다. 그리고, 교통약자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대부분 이 모든 것을 익숙하게 생각한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나름의 매너도 있다. 코 앞에서 문이 닫힐 때 열림 버튼을 누르지 않는 것. 문이 한 번 열리면 다시 닫히기까지 1분 정도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숨을 참으며 정적의 60초를 기다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것에 불평을 하거나 불만을 표하지 않는다. 나를 가장 편하게 이동시켜 줄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이 공간에서 닫힘 버튼이 눌리지 않는다고 한숨을 푹푹 쉬며 호통을 치는 사람을 만났다.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호통칠 기운으로 계단으로 내려가시던가요.'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오른다. 당신만 불편한 것이 아니라고, 여기 있는 모두가 불편하지만 이게 유일한 수단이라 불평하지 않는 것뿐이라고.
스스로 교통약자임을 인정하고 약자들을 위한 수단에 익숙해지며 가장 많이 연습한 것은 '기다림'이었다.
몇 달 전, 출퇴근 시간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지하철 시위가 있었다. 그리고, 내가 마주한 것은 혐오와 아이러니였다. 시위 첫날, 멈춰진 지하철 안에서 큰소리로 욕을 하는 사람들을 마주했다. 그다음 날은 교통약자 엘리베이터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타고, 전동휠체어를 탄 사람은 멀찍이서 다음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광경이 익숙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20여 년 전부터 이어져 온 투쟁의 결과는, 겨우 전동 휠체어 하나가 들어가면 꽉 차는 좁디좁은 엘리베이터였다.
젊은 사람이 타면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교통약자이지만 눈치를 보며 뒤로 물러서는 광경이 나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는 상식적인 사람이 아닌 걸까?
코로나로 항균 필름이 붙여진 엘리베이터 버튼 중에 가장 빨리 닳는 영역 '닫힘 버튼'.
빨리빨리의 나라 대한민국에서 닫힘 버튼은 그런 의미다. 당연한 것.
우리나라에는 닫힘 버튼이 작동하지 않는 엘리베이터가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엘리베이터를 지극히 상식적인 엘리베이터라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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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인간
종종 노약자석에 앉고, 아주 가끔은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서른한 살.
대학교 입학, 졸업, 취업 그리고 퇴사까지 나의 의지만큼 의사의 소견도 중요한 몸을 가졌지만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은 사람. 커리어와 함께 병명도 쌓여가는 삶을 살고 있다. 병원에 가는 것이 숨 쉬는 것처럼 익숙한 사람이라 스스로를 '병원인간'이라 부른다. 늙음은 아픔이 용인되지만 젊음에게는 아픔이 용인되지 않는 사회에서 병원인간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천천히, 꾸준히 이야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