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제보다 나은 오늘 Dec 11. 2022

이탈리아 산 지미냐노에서 투어버스를 놓쳐버렸다

탑의 도시. 하지만 나에게는 미아의 도시.

(이전 이야기에서 계속)

https://brunch.co.kr/@ragony/196




 2022년 11월 23일 수요일 오후 이야기.

 키안티 와이너리에서 배불리 먹고 마시고 와인 몇 잔에 알딸딸~한 상태에서 도착한 이탈리아 중세풍 도시 산 지미냐노(San Gimignano). 오늘 투어의 세 번째 목적지.


 사전 지식도 기대도 0.1도 없이 방문한 곳인데, 이곳 역시 도시 전체가 박물관처럼 고풍스럽기 그지없다. 가뜩이나 334m 고지대에 위치한 마을로 한 때 72개나 되는 탑이 도시에 존재했다고 한다(지금은 14개의 탑만 남아있다). 그래서 별칭은 "탑의 도시". 프랑스에서 바티칸으로 가는 "성지순례의 길(=프란치제나 길)" 길목에 위치한 까닭에 드나드는 사람이 많아 상업이 발달했고, 특히 염색업이 발달했었다고 한다. 수많은 탑의 용도 중 하나는 부의 과시도 있지만 염색한 천을 말리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좀 더 세부적인 지리적 배경지식은 위키백과를 참고하자.

https://ko.wikipedia.org/wiki/%EC%82%B0%EC%A7%80%EB%AF%B8%EB%83%90%EB%85%B8


 산 지미냐노 투어 출발.

 산 지미냐노 투어는 제한시간 내 자유투어. 별도의 가이드가 없다.

 가이드 선생님이 신신당부를 하신다.


 "재밌게 즐기시고 여기 출발지 버스정류장에 3시 50분까지 오세요~ 늦으시면 안 됩니다~"

(아, 이때 한번 더 물어봤어야 했다........ㅠㅠ)

출발 및 집합장소. 혹시 헷갈리면 안 되니까 언제나 사진을 찍어 놓자. (하지만 소용없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산 지미냐노는 마을 전체가 고지대에 위치한 곳. 벌써 탁 트인 전망이 한 폭의 그림 같다.


산 조반니 성문을 들어가기 전 공터에서 촬영
요게 마을 입구격인 산 조반니 성문. (이때까진 좋았다....)



 영화 세트장이 아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진짜 마을인데, 그냥 박물관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이탈리아는 한국으로 치면 기와집 가득한 "경주"같은 마을이 전국에 있는 느낌이다.

 

물론 이때까지도 좋았다. 모든게 좋았다. 날씨도 기온도 젤라토 맛도.


 2006년에서 2009년까지 젤라토 월드 챔피언에서 연속 수상했다는 유명한 명품 젤라토 집(젤라테리아 돈돌리). 왔으면 또 먹어봐야지. 유명한 만큼 줄이 길다. 이 집만 바글바글하는 것 같다. 어쨌건 득템에 성공. 뭘 시켰더라? 아, 기록을 안 해놨네... 모르겠다. 두 가지 맛을 고르긴 했는데 솔직히 말하면 베스킨라빈스 31 공장식 아이스크림보다 조금 더 쫀득하는 것 말고는 큰 차이를 모르겠다. 내 입맛에는 이탈리아 젤라토 집은 다 거기서 거기. 젤라테리아 돈돌리 가게는 성문을 통과해서 쭉 올라가면 보이는 "시스테나 광장"에 있는 집이며 거의 언제나 100%의 확률로 긴 줄이 서 있을 테니까 찾기 어렵지 않다.


 시스테나 광장은 저수조를 뜻하는 The cistern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The cisternThe The cisterncisternThe cistern

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


 요렇게, 빗물을 고이 받아다 모으면 시스턴(Cistern), 지하수를 퍼 올리면 우물(Well). 그러니까 시스테나 광장은 저수조가 있는 광장이란 말.


 

 시스테나 광장의 한 복판에는 지금은 지폐와 동전이 가득 들어있는 저수조를 볼 수 있다.



어느 마을을 가든 빠지지 않는 두오모(대성당). 입장료는 받지 않았지만 내부 촬영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었다. 프레스코화가 벽면에 많았지만, 담아올 수 없어 아쉽다.


빈 집이나 유물이 아니고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는 고풍스러운 집들


 마을을 완전히 가로질러 반대편 성문으로 나가면 이렇게 확 트인 전망이 보인다.



 슬슬 해가 질 시간. 유독 다리가 길어 보이던 해 질 녘 그림자마저 이국스러웠고, 어느 가게 앞에 매달려있는 비옷 입은 고양이 인형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때까지만 좋았다...... ㅠㅠ


 그래도 시간이 좀 남네~ 저기 저 대사탑에는 어떻게 올라가지? 하고 헤매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린다. 응? 뭐지? 전화할 사람이 없는데?



"헬로, 아 유 미스터 000?(여보세요, 000 이신가요?)"


"예압, 잇츠 미. 후아유?(네, 누구세요?)"


"아임 유어 투어 가이드. 훼어 아 유? 위 아 어바웃 투 리브. 왓스 해프닝? 와이 아 유 소 레이트?(투어 가이드입니다. 지금 어디셔요? 우리 막 출발하려 해요. 무슨 일이죠? 왜 당신만 늦죠?)"


"홧??? 유 톨드 미, 리조이닝 타임 이스 쓰리 피프티. 아이브 스틸 프리타임!(예?? 당신이 아까 집합시간이 3시 50분이라고 했잖아요. 아직 여유가 있는데??)"


"오 노. 조이닝 타임 이스 올레디 오버, 아이 세드 쓰리 피프틴!, 낫 피프티. 캔 유 조인 어스 위딘 파이브 미닛?(오 저런, 집합시간은 이미 지났어요. 저는 3시 15분이라고 했어요, 50분이 아니고. 5분내 오실 수 있나요?)"


"홧??? 아이 캔 아이 캔. 플리즈 웨잇 포 미. 아임 커밍 커밍 나우.(으악.. 지금 갑니다 가요. 기다려줘요.)"



 전화를 받았을 때 시스테나 광장 근처에 있었는데, 주차장까지 암만 헉헉대고 달려가도 10분이 걸린다. 땀이 뻘뻘 범벅이 된 상태에서 아무리 둘러봐도 아까 그 버스가 없다. 없다. ......진짜 없다.


 아..... 이런 멍청할 데가..........

 겨우 생존영어 하는 수준인데 너무 자만했었다. ㅠㅠ Fifty하고 Fifteen하고 구분도 못 하다니. 술기운이 여전히 알딸딸하던 그 때, 다수의 인원이 모이는 약속시간을 5분 단위로 정할거라곤 상상도 못 해서 평상시같으면 잘 받아적었을 저 단어가 Fifteen으로 듣고도 Fifty로 해석해 버린 것.


 갑자기 심각한 자괴감이 밀려오고 온 몸에 기운이라고는 없다.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었다. 그 5분을 못 기다려주나 싶다가도, 나 때문에 남들이 괜히 피해 보면 안 되지 만감이 교차한다. 어쨌든 투어 버스는 나만 두고 떠났다. 멀리 저 멀리. "버스는 떠났다"는 표현은 딱 이때 쓰는 표현이지... ㅠㅠ


 이왕 망한 건 어쩔 수 없고. 이제 어떻게 수습한다?

 다행히 지갑은 있고. 신용카드 있고. 현금도 있고. 여권도 있고 스마트폰도 있다. 음. 죽지는 않겠네.

 다시 수신자 번호로 전화를 걸어본다. 헉... 발신이 안 된다. 아, 그렇지. 이번에 Data 유심만 샀지. 원래 발신이 안 되는 Data Only eSIM이니 전화가 안 걸린다. 파키스탄 유심이 살아있어 수신은 되었지만 해외발신 활성화가 안 된 상태라 그것도 발신이 안 된다. 아, 어떡하나.


 무작정 도움을 구해보자.


내 생명을 구해준 곳


 주차장에 있는 관광안내소. 다행히 안내 직원은 영어를 잘한다.



"제가 이만코 저만코 해서 버스를 놓쳤어요. 도와주실 수 있나요?"


"관광사가 어딘지 아나요?"


"예. 다 적어놨어요. 버스 사진도 다 찍어놨어요. 번호판도 알아요."


"가이드 이름이 뭔지 아세요?"


"아, 그, 들었는데, 뭐더라... 아 그렇지, ○파니? 파노???"



 관광사 대표전화로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더니, 안심하란다. 한 시간 내 연결버스를 보내준단다.

 와~ 감동. 나 하나 때문에 버스를 보내준다고?

 사실 그건 아니고, 여기 관광사는 큰 관광사라 여기저기 투어상품을 여러 개 돌리는데, 다른 곳 갔다가 여길 마지막 여정지로 삼는 동일 회사의 마지막 관광투어버스가 곧 여길 도착할 거니까, 그걸 타고 복귀하란다. 가이드한테 다 말해놨으니 알아서 안내할 거란다. 대신, 그 버스는 여기가 마지막 여정이니 피사는 포기하라고.

아, 지금 피사가 문제니. 생존이 문제지.


 감사합니다. 말도 잘 안 통하는 여기서 어떻게 살아남나 순간 앞이 캄캄했는데, 그래도 다 살아날 길이 있구나. 관광안내소 앞 벤치에서 우두커~니 거의 한 시간쯤 앉아있으니 아까 내가 탔던 버스와 똑같이 생긴 버스가 온다. 그리고 그 버스의 가이드처럼 보이는 아주 큰 귀고리를 단 젊은 남미 여성이 나를 보더니, 이미 연락받았다며 안심하란다.


"우리 그룹은 지금부터 50분간 자유투어 할 거예요. 선생님도 그 시간까지만 여기로 다시 오시면 됩니다."


"아, 저는 아까 다 봤어요. 기운도 없고 그냥 여기서 쉬고 있을게요."


 사실 그랬다. 즐길 에너지만 있었어도 못 가본 종탑에도 올라가 보고 박물관에도 가 보고 알차게 50분을 더 꽉 채워서 관광할 수 있었는데, 자괴감이 너무 심하게 들고 이번에는 실수 말아야지 하는 생각만 들어서 이제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그냥 집에 가고 싶었다.


"저는 날마다 오는 곳이라, 관광객들 보내고 그냥 쉬는 찻집이 있는데, 같이 가서 쉬실래요?"


간판은 없지만 카페 맞음


 오, 이 가이드 아가씨 정말 친절하구나. 졸졸졸 따라가서 찻집에 가서 레몬차 두 잔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호의가 고마워서 차는 내가 삼. 다행히 찻값은 별로 안 비쌌다.(한 잔에 2유로쯤 했음)


"가이드님, 제가 그 버스에 물건을 좀 두고 내렸는데 제 가이드님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요? 혹시 여기서도 왓츠앱을 쓰나요?"


"아, 제가 그 가이드님 알아요. 계정 연결시켜 드릴게요."


 알려준 번호로 왓츠앱 계정을 연결하니 아까 그 가이드와 드디어 연결이 된다.


[왓츠앱 대충 요약]

"가이드님. 죄송해요. 제가 알려주신 시간을 착각해서 ㅠㅠ. 그나저나 차에 제 짐들이 좀 있는데 받을 수 있을까요?"

"너무 자책하지 마셔요.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에요. 그나저나 고객님이 탄 그 차가 저희 버스보다 먼저 같은 주차장에 도착할 겁니다. 그런데, 너무 오래 기다리셔야 하니 내일 피렌체 사무실로 오시거나 아니면 오늘 저녁에 두오모에서 만나서 전해드릴 수 있어요."

"아, 그럼 주차장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좀 기다리는 건 괜찮아요."

"그럼 저희 도착할 때쯤 다시 연락드릴게요."



 역시 직접 통화보단 문자 소통이 편하다. 이래야 실수가 없는데. 내가 괜히 통화를 싫어하는 게 아냐. ㅠㅠ


 생각보다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다시 버스를 타고 피렌체 행 복귀. 피사는 놓쳤지만 그래도 이렇게 무탈하게 구조된 게 어디야. 망했지만 이것도 다 경험이지... 

 아, 쪽팔린데 이거도 써? 말어? ......일단 쓰자. 흔치 않은 경험이잖아. ㅠㅠ



 저녁 7시. 아침에 탔던 그 장소(피렌체 몬테룽고 광장 터미널)에 버스를 내려준다.

 나를 살려준 그 남미 가이드 아가씨에겐 10유로 팁을 드리고 왔다. 살려준 목숨 값 치곤 너무 적게 드렸나...? 아냐, 사양하면서도 매우 기뻐하며 받으셨으니 괜찮아.


 몬테룽고 광장은 정말 황량하다. 여긴 버스정류장인데 말 그대로 광장에 제대로 된 대합실 하나 없다. 이미 도착했다고 가이드님께 문자를 보내니, 8시 15분에 두오모에서 만나자고 한다.(또 Fifteen...... 괜찮다. 이번엔 숫자다. 심지어 필담이다. 그냥 나 혼자 생긴 트라우마. 아까 차라리 쿼터라고 했으면 정확히 알아들었을텐데.ㅠㅠ) 여긴 혼자 기다리기엔 너무 위험하니 집에 들어가 기다리다 이따 두오모 앞에서 보잔다. 자기 집이 두오모 앞이라 괜찮다고 안심까지 시켜준다.


 사실 더 민폐 끼치고 싶지 않아 기다렸다 냉큼 짐만 받고 갈 생각이었는데 저렇게 안심을 시켜주니 안 갈 이유가 없다. 터덜터덜 걸어 숙소까지 가서 폰을 충전하며 조금 쉬었다가, 약속시간에 맞춰 두오모 광장으로 나갔다.


"고객님, 여기에요~"


딱 약속시간에 아까 그 가이드님이 계신다.


"여기, 이 짐 맞죠?"


 보조배터리, 힙쌕, 보온 내피 등 차에 두고 내린 물건들 하나도 안 빠뜨리고 잘 챙겨다 주셨다. 역시 그냥 가라고 하면 안 되지. 진심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10유로 팁을 드렸더니 기뻐하며 받으신다.


 왓츠앱으로 다시 한번 더 감사문자를 보내드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당신이 제 목숨을 살렸어요.(Thank you again, You saved my life.)"


"고객님이 저라도 그렇게 하셨을 거예요~ ^_^(If you had been in my place, you would have done the same.)"


훈훈한 마무으리...


가이드 선생님과의 훈훈한 재회. 일어난 시각은 여기서 -4시간 해야 맞음. (캡쳐를 파키스탄에서 했더니 시차까지 반영됨.)




비싼 수업이었으니 오늘의 인생 교훈을 남겨놓자.


1. 단체 관광에선 집결지와 집결시간을 엄수해야 한다. 늘 5분전에 도착한다는 마음으로 움직이자. 특히, 평소에 길 잘 못찾는 길치들은 집결장소를 구글맵에 표기해두면 좋다. 집결지를 사진을 찍어두면 나중에 길을 잃어버릴 때 물어보기도 편하다. 생각보다 유럽 고도시는 여기저기 다 똑같아보이고 담벼락이 높아 길을 잃을 확률이 높으므로 집결지의 주변 지형지물을 꼭 눈에 담아두어야 한다.


2. 특히 외국어로 알려주는 집결시간은 스마트폰에 숫자로 써서 한번 더 가이드의 확인을 거치자. 내가 50분 맞지요? 한 번만 더 물어봤어도 저런 철딱서니 없는 일은 안 일어났다.


3. 가급적 현지 유심은 Data 전용심 말고 전화발신기능이 있는 유심을 사자. 전화쓸 일이 뭐 있겠어? 하지만 급할 땐 절실하다.


4. 혼자 가는 여행이라도 길동무 한 명은 사귀자. 최소 혼자 버려지는 일은 없을거다.


5. 단체관광 회사정보를 사전에 메모해놓자. 가이드님 양해를 구해 개인 연락처를 받아두는것도 좋은 방법이나, 가이드 개인 동의가 필요하다.


6. 이동수단인 버스 사진을 찍어놓자. 번호판도 나오도록.


7. 적극적으로 관광안내센터를 찾아 도움을 요청하자. 그들은 관광회사도 잘 알고, 아마 필시 비슷한 상황을 여러 번 처리해봤을 것이다.


8. 지나간 일에 너무 자책말고 "현 상황"을 좋게 만들 수 있는 길에만 집중하자. 기분 침울해있으면 딱 당신만 손해다.


9. 경황은 없을지라도 도움받은 손길에게 감사인사는 꼭 하도록 하자.




(다음 편 예고 : 고행의 미켈란젤로 광장...)



#이탈리아 #배낭여행 #산 지미냐노 #젤라토 #투어버스 #시스테나 광장

매거진의 이전글 키안티 와이너리 와인 시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