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멀긴 했지만 충분히 다녀온 가치는 있다고 느꼈고 기차가 안락해서 그래도 생각보단 덜 피곤했다. Happy in Lodge 호스텔로 복귀했을 땐 저녁 7시가 후딱 넘는 시간이었다.
어제 룸메들은 싹 떠나고 옆 침대에 훤칠한 청년 한 명만 나를 반겨준다. 2층 침대 3개가 놓인 6인실에서 나와 그 청년 말고 나머지 침대는 아직 비어있었다.
"Hello, Where are you from? 반가워요~ 어디서 왔나요?"
"Nice to meet you, I'm from Korea...hmmmm no,no I'm from Pakistan. Anyway I'm Korean but I'm from Pakistan. 아, 한국이요. 아니지, 파키스탄인가? 저는 한국인이지만 파키스탄에서 왔어요."
어째 이 청년 매우 살갑고 리액션이 과할 정도로 좋다. 아, 말 좀 통하겠다.
"괜찮으면 저녁 안 먹었으면 같이 가서 먹어요~" 했더니, 이미 먹고 왔단다. 음... 스위스 마지막 밤 만찬을 혼자 쓸쓸히 먹긴 좀 그런데. "그럼 가서 맥주나 한잔 같이 해요. 안주는 제가 푸짐하게 살게요~"
이번에는 흔쾌히 콜!
이 밥친구는 네덜란드 그로닝겐에서 온 20대 젊은 청년이며 벌써 몇 달째 유럽 전역을 배낭여행 중이라고 한다. 그래... 여행도 다리 힘 넘치는 젊어서 하는 거지. 좋겠다~
늦은 시간에 식당을 애써 따로 찾기도 귀찮고, Happy in Lodge 호스텔 1층에 있는 식당엘 갔다. 식당 이름은 Brasserie 17. 구글 지도의 평점을 보니 평가가 그리 나쁘지 않다.
다행히도 스위스에선 2인분에 최소 10만 원은 한다는 퐁뒤를 여기선 미니 사이즈 15프랑(=2만 1천 원)에 팔고 있었다. 안 싸지만 상대적으로 싸 보인다.
둘이 왔는데 이 쪼꼬만 하나만 시킬 수 있나. 네덜란드 청년도 왔으니 네덜란드(홀랜드)에서 왔다는 홍합탕도 먹어보기로 했다. 일단 메뉴판 사진이 푸짐해 보인다.
메뉴판 사진만큼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풍성한 저녁차림. 여기에 각각 맥주 한 잔씩을 추가했으니 이미 가용예산은 일찌감치 초과했지만 스위스 물가치고는 싼 편이며 밥친구까지 초빙한 마당에 이 정도는 사줘야지.
네이버에서 스위스 식 치즈퐁뒤를 검색해보면 태반의 의견이 "절대 사 먹지 마세요"다.
기대보다 맛도 비주얼도 떨어지고 이해 불가할 만큼 비싸며 너무 짜서 반의 반도 못 먹고 남긴다는 의견들이 태반. 어... 그래 그래. 알겠으니 무슨 맛인지 내가 함 보자고.
치즈 퐁뒤, 비주얼은 사실 별 게 없다. 녹여 나온 치즈에 깍둑썰기해서 나온 바게트가 끝.
길다란 퐁뒤 전용 포크에 빵을 콕 찍어서 녹은 치즈에 담가서 뱅뱅 감아서 먹으면~
그렇지. 역시 짜다. ㅠㅠ 왜 다수의 한국인들이 치즈 퐁뒤 먹지 말라는지 이해가 되는 맛. 미적감각, 냄새, 분위기, 맛 등 종합적으로 따져봐도 가성비는 현격히 떨어지는 메뉴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농업 치즈의 나라 스위스 현지에서 먹는 퐁뒤니까, 깊은 치즈의 맛이 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이게 스위스 맛이구나 경험했으니 저 빵 몇 조각과 치즈 약간에 2만 원을 넘게 받는 비용이 크게 아깝지는 않았다. 경험과 기억의 대가로 생각하면 합리적 비용이지. 그리고 이미 짜디 짠 이탈리아 피자에 길들여진 끝이라 그런지 못 먹을 정도의 심각한 짠맛도 아니라서 냠냠 끝까지 안 남기고 잘 먹었다.(다 먹고 난 후 냄비에 누룽지처럼 들러붙은 치즈가 진국이라던데 그것만 느끼+짜서 남김)
이 날 만족한 의외의 성공 메뉴는 네덜란드 홍합탕. 홍합탕에는 화이트 와인과 양파, 마늘, 부추를 넣고 끓이는 뱃사람식(Seemannsart), 토마토소스와 허브를 넣고 끓이는 프로방스식(Provencale), 뱃사람식 조리법에 프렌치 감자를 조합해주는 혼합식(with Frites) 요렇게 세 가지 옵션이 있었는데, 네덜란드 청년의 조언을 받아서 첫 번째 뱃사람식으로 주문.
맛은 오~ 그냥 한국에서 먹던 어시장 홍합탕하고 거의 똑같다. 와인 탓인지 냄새가 약간 다르기도 했지만 냄비에서 홍합 껍데기째 건져서 속살 파먹는 방식도 똑같고 대충 한국식 맞다. 사실 뭐 홍합탕 요리가 별 거 있나. 싱싱한 홍합 넣고 물만 넣어 팔팔 끓여도 무조건 맛있다. 오랫동안 해산물을 거의 못 먹고 살아서 바다 요리가 더 맛있게 느껴졌다. 네덜란드 청년도 맛있다며 맛집 인정!
그나저나 뒤에 흰 옷 아저씨... 목을 저렇게 꺾으면... 보통 죽지 않나요.....? 처음 사진 열고 유령인 줄......ㅠㅠ
호스텔 룸메로 만나 밥친구가 되어준 이 청년 덕에 스위스에서의 마지막 밤은 외롭지 않았다. 딱 둘이서만 6인실을 사용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맥주를 곁들인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니 다른 룸메이트 두 분이 더 들어와 있었다.
외모가 이 분들 남아시아 분들이네? 어디서 오셨어요. 아, 저희는 인도에서 왔어요. 아 반갑습니다. 저는 이웃나라 파키스탄에서 왔어요.
헛. 대화 급중단.
나는 비슷한 지역에서 왔다고 반가움을 표한 건데 생각해보니 파키스탄-인도는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적국이지. 아니, 나 그냥 거기서 왔을 뿐이고 한국인이라고요.... 어쨌든 분위기 냉랭한데 굳이 친해질 필요 없으니 대충 씻고 오늘도 무사히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