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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제보다 나은 오늘 Jan 27. 2023

파키스탄 대정전

2023년 1월 23일 이야기

출근 준비를 하고 있는데 건물의 모든 조명이 일순간에 다 꺼졌다.


아, 또 정전이구나.


늘상 있는 일이라 뭐 크게 새삼스럴것도 없었다. 짧게는 몇 십분, 길게 잡아도 서너 시간 안에는 복구되겠지. 크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사무실로 출근했다.


※ 늘상 있는 일이라고 말하는 배경 이야기 참고

https://brunch.co.kr/@ragony/115


지사 안에는 비상발전기가 있다. 하지만 이렇게 비상시국에 모든 영역에 비상발전기로 전기를 다 공급하지는 않는다. 정말 필수적인 부하에만 선택적으로 전기를 공급한다. 이를테면, 24시간 가동이 되고 있어야 하는 윤활 및 냉각설비, 이를 제어하는 중앙제어실 등이다. 기타 건물에는 탈출을 위한 최소한의 비상조명 정도에만 전력이 공급된다.


엘리베이터도 당연히 가동중지. 계단으로 사무실에 이동하니 전체가 어두침침하다.(업무 사무실은 지하층에 위치한다.) 환기팬도 작동이 멈춰서 뭔가 좀 쿰쿰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다. 도저히 일할 환경이 못 되긴 하지만 언제나처럼 조금만 있으면 복구될 거니까 기다려보자.


업무시간 시작. 정전이 되든 말든 착실한 직원들은 모두 다 출근했다.

아, 그런데, 인터넷이 안 된다. 인터넷이 안 되니 인트라넷도 안 되고 협업과 소통이 필요한 모든 업무가 일순간에 차질이 생긴다.


"인터넷이 안 돼서 일을 못 하겠어요."


"그럼, 인터넷이 안 되어도 할 수 있는 일을 하세요. 업무절차서 업데이트, 전표 정리, 연간 교육계획 수립, 기존 자료정리 등등 할 일 많잖아요?"


어딜 또 놀려고. 호랑이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일할 거리는 무궁무진하다. 잦은 정전 탓에 전 직원들의 업무PC는 이미 랩탑PC니까 몇 시간 정도의 정전 상황은 버틸 수 있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도 전원이 복구가 안 된다.

아, 이번엔 뭔가 큰일이 있구나. 큰일이 생긴 것 같긴 한데, 인터넷이 안 되니 외부 소식을 알 길이 없다. 정전이 되면서 통신중계기 등 인터넷망도 다 같이 멈춰버린 듯. 나도 침침한 불빛 아래서 문서를 좀 봤더니 눈이 열 배는 빨리 피곤해진다.


아침 7시 34분에 발생한 정전은 점심때가 다 되도록 복구가 안 되었다. 여전히 내부 통신망은 복구가 안 되는 상태에서 12시쯤 되니 외부 4G(라고 쓰고 2G 속도) 통신망은 복구가 되었다. 그리고 전달되는 뉴스.


"파키스탄 전역에 대정전이 발생했습니다."


https://naver.me/GcWRGAl2

https://www.dawn.com/news/1733207/power-breakdown-reported-across-pakistan


으앵. 국가 광역정전? 큰일났네.


광역정전이 어떻게 일어나냐면...




 송배전망 일부가 탈락되는 국지정전과 국가단위의 광역정전은 스케일이 다르다. 


 통상, 전력망의 정전은 전력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에서 발생하는데 공급보다 수요가 증가하면 주파수가 떨어지고, 수요가 줄어들면 주파수가 올라가는 일이 생긴다. 전력통제 및 감시기관에서는 이를 24시간 모니터링하며 공급과 수요 양쪽을 다 조절하며 균형을 맞추는 일을 한다. 그런데, 이 일이 어느 관리한계를 벗어나면(즉, 주파수가 일정 범위 이상 이하로 변동되면), 발전설비들은 스스로의 기기보호를 위해 자동으로 가동을 멈추어버린다.(전문용어로 트립된다고 표현한다.) 이러면 주파수가 더 떨어지고 더 떨어진 주파수는 더 많은 발전설비의 가동을 멈추게 만들어서 결국 송배전망에 가압되는 전력이 없어지는 일(=0)이 도미노처럼 순식간에 일어난다. 이 현상이 국지적으로 발생하면 이웃 송배전망에 파급영향이 있기 전에 해당 그리드 전체를 격리시키면서 이웃 계통을 보호하는데, 이날은 운이 나쁘게도 이런 파급이 순식간에 국가 단위로 확대가 된 듯하다.


 타 연동망의 도움으로 금방 복구될 수 있는 국지정전에 비해 광역정전은 설비의 복구가 매우 힘들다. 한번 멈춘 전력계통을 다시 가동하려면 정밀한 양팔저울처럼 공급과 수요를 맞추며 전체 부하를 점진적으로 서서히 올려줘야 하는데 - 안 그럴 경우 주파수 불일치로 다시 정전되는 사고가 반복된다 - 공급전력이 0인 상황에서 자체적으로 스스로 가동될 수 있는 발전설비는 또 극히 제한적이다. 발전기를 가동하려면 냉각수, 윤활유, 여자기 등 각종 부대설비의 선 기동이 필요한데 이 또한 전기로 작동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 전력망은 전체 대정전(블랙아웃)이 발생했을 때 복구용 발전기를 미리 지정하고 스스로 발전기동이 가능한 발전단지를 반드시 확보하고 있으며, 고장복구 시나리오에 반영되어 있다.




 앗... 가벼운 맘으로 쓰려고 했는데 갑자기 심화과정.... 일단 여기까지.


 전기가 없어도 가스레인지는 되니까 어쨌든 밥먹고 사무실에 복귀했는데, 이제는 걱정이 살살 된다. 우리나라처럼 전력 구조가 고도화되어있고 국가 공급용량이 큰 나라는 전체 블랙아웃이 생겼을 때 완전복구까지 빨라야 열흘에서 2주 정도의 기간을 예상한다. 우리나라에 비해선 전력망이 단순하고 계통용량이 적다 쳐도 그래도 국가단위 블랙아웃인데 완전 복구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는지 가늠이 전혀 안 된다. 직원들한테 물어보니 예전에 블랙아웃이 발생했을 땐 복구까지 일주일이 걸렸다고 했다.


 어... 냉장고에 아이스크림 있는데 다 녹아 버리겠네...


 이 와중에 제일 먼저 아이스크림 녹는 걱정부터 되는 걸 보니, 우리 지사는 정전났다고 큰 피해가 될 일은 없는 게 맞나 보다.


 오전에는 복구시간만 기다리며 있었는데, 오후엔 뭘 어째야 한담? 난감하네? 하고 앉아있는데...

 현지인 매니저들이 내 방문을 두드린다.


"지사장님. 직원들 랩탑PC 배터리가 이제 다 되어서 전원이 안 들어옵니다. 그리고 환풍기가 안 돌아가서 화장실 냄새가 너무 심해요."


 음. 그렇긴 하지. 사실 나도 여기 있기 괴롭다고.


"알겠습니다. 전기가 없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군요. 필수인력을 제외하고 이 시간 이후부터 재택근무령을 내립니다. 근무시간 중 전력이 복구되면 즉시 일터로 복귀하는 조건부로요."


 직원들은 신났다. 사실 침침한 사무실에 갇혀있기 싫었던 나도 탈출하고 싶었는데 다행이었다.

 도로 숙소 도착.

 아, 이제부터 살아남을 걱정이 살살 된다. 오늘은 뭐 어떻게든 버티겠는데... 내일도 전력 복구가 안 되면...


1. 화장실 물이 안 나올거다. 급수펌프가 안 돌아가니까.

2. 냉장고 내 음식이 모두 상할건데 뭐 먹고사나.

3. 내부 인터넷은 아예 안 되고 4G 인터넷도 오락가락하는데다 스마트폰 배터리도 얼마 안 남았는데 비상연락은 어떻게 취하나.

4. 사무실에 인터넷은 커녕 제대로 된 조명도 안 들어오는데 직원들은 어떻게 근무하라고 하나.

5. 얼음까진 안 얼지만 여기도 겨울인데 ㅠㅠ 난방은 다 했네 ㅠㅠ

6. 방범초소에 외곽감시는 어떻게 하나? 어차피 칠흑 같은 어둠인데 테러 나면 다 죽겠네.

7. 설비용/사무실용 비상발전기 돌릴 기름은 얼마나 있나. 며칠이나 버티려나.



분위기 전달 차 "Dawn" 언론사에서 정전현황 몇 장 가져왔습니다. 지사 사진은 아녜요.


암튼 먼 일 모르겠고 당장 내일 비상 시나리오부터 짜 놓고 춥디 추운 잠자리에 일찌감찌 들었다. 춥지만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라 잠은 잘 왔다.


일찍 잠든 탓에 누가 깨우지 않아도 일찍 눈 뜬 새벽. 천장에 달린 공조기에 빨간 램프가 점등된 게 보인다. 아, 밤 새 전원이 복구되었구나. 천만다행이야. 어제 짰던 비상경영 시나리오 자동빵 폐기.


녹았다 다시 얼었을 냉동식품들이 조금 찜찜하긴 했지만 뭐 지금도 겨울인데 설마 상했겠어. 빨리 먹어 치워야지. 다만, 냉장고는 UPS(비상전원공급장치)를 달아서 최소한 음식은 보호해야겠어 안 굶어 죽으려면.


다이내믹 파키스탄. 


부디, 오늘도 무사히 플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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