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세"아녜요. 아니라구요.
드라마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살리려 주인공 독백의 흉내를 조금 내보았습니다.
https://brunch.co.kr/@ragony/229
드라마를 보는 내내 나는 너의 화끈한 복수를 응원했어. 역시 한국 드라마는 권선징악이 그 맛이지. 나도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란 거에 공감하는 사람이고 공감하기 힘든 "용서" 후 서로 질질 짜는 신파 스토리보다는 "처절하게 응징"하는 쪽이 훨씬 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란다 동은아.
동은아, 너, 그런데 하나 실수했어.
내가 이 장면 보다말고 얼마나 또 심기가 불편했는지 아니? 기억이 잊힐까 봐 너처럼 사진까지 찍어놨잖아. 이거, 어디서 퍼온 거 아니고 이모님 시켜서 찍은 사진도 아니다. 작.가.직.찍.
동은이 니가 일부러 의도한 발언이 아니란 건 알아. 언어란 사회적인 거고,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용어는 사회에서 배운 거고 그래서 별생각 없이 써 오던 그대로 썼을 거야. 그래도 그건 그거고 잘못한 건 잘못한 거야.
아직 뭔지 모르겠다고? 왜 이래... 동은아... 우리 배운 사람들이잖아... 너 심지어 교사잖아...
제발 부탁이야. "전기세"라고 얘기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
왜냐하면 우리는 "전기요금"을 내지, "전기세"를 내지는 않거든.
"전기요금"은 전력에너지를 사용한 만큼 내는 비용이야. 너, 그거 아니? 마트 가서 과자 한 봉지를 사도 세금이 붙잖아~ 그런데 이 "전기요금"에는 심지어 세금이 한 푼도 없다? 대신, "전력산업기반기금"이라고 해서, "전기요금"의 3.7%를 준조세 성격으로 거두고 있긴 해. 그치만 이건 기금이지 여전히 세금이 아냐.
http://www.greenpost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0265
알아들으면 된 거지 "전기요금"인지 "전기세"인지 뭐 그리 민감해하냐고?
내가 그러는 데는 다 이유가 있어요. 들어봐 바.
언어는 사람들의 인식체계를 통제하고 선입관을 갖게 만드는 강력한 힘이 있어. "전기요금"을 "전기세"라고 부르면 부지불식간에 "전기는 세금이구나"라는 선입관을 심어주고, 전기요금을 정부에서 통제하는 것을 매우 당연시하게 하는 효과가 생긴다고. 그리고 툭하면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기업에서" 라고 하는데, 공기업, 국민 세금으로 운영 안 해. 세금 지원은 정말 1원도 없어. 민간기업처럼 기업활동으로 운영되는 조직이란 말이야. 어쨌든 전기는 준공공재니까 어느 정도는 정부에서 통제하는게 나도 맞다고 생각해. 하지만, 전기는 원칙적으로 자동차에 주유하는 기름처럼 사용한 만큼 지불하는 "에너지상품"이야. 시장경제 체제에서 원칙적으로 상품은 원자재가격에 생산 및 가공에 들어가는 경비를 더하고 유통비용과 이윤을 더한 후 판매되잖아. 그래야 기업이 망하지 않잖아. 이런 거 저런 거 다 무시하고 그냥 싸게 팔기만 하면 다 망해. 망한다고.
언젠가 베네수엘라인가 쿠바인가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폭등하는 인플레이션 때문에 서민들이 너무 고통받으니 정부가 내세운 정책 중 하나가 "빵 가격 동결"이었다던데 그 이후 시장에는 빵이 자취를 감추었대. 전기에너지도 해외에서 석탄 가스 사다가 에너지 형태만 변환시키는 건데, 그거 가격 못 올리게 하니까 지금 한전이 당장 망하게 생겼어. 한전이 공기업이니 망정이지, 민간기업 같으면 저 가격에 전기 못 판다고 벌써 퍼지고 여기저기서 정전사태 나고 난리일 거야. 실제로 내가 살고 있는 파키스탄이란 나라는 비싸게 LNG 수입하고 발전해서 값싸게 전기로 팔 바에는 차라리 전력공급 중단을 택하고 있어. 2023년 현실세계 이야기라고.
https://news.mt.co.kr/mtview.php?no=2023030808225511129
전년도 한전 적자가 32.6조 원이래. 잘 상상이 안 되는 돈이다 그치? 이걸 직원들 줄 급여로 갚으면 대충 22년 정도가 걸린대나. 적자가 왜 저리 천문학적으로 난 건지는 혹시 아니? 수입 에너지 가격이 폭등해서 그래. 그런데 또 이걸 "한전이 방만하게 경영해서" 그렇다고 몰아가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지. 여기에 더 해서 "적자기업에 성과급이 웬 말이냐" 성토하는 글도 만만치 않아.
나는 한전 직원은 아니지만 저런 말 들으면 참 슬프다. 공공기관 및 공기업 종사자는 기업이윤에 비례해서 경영성과급을 받는 구조가 아냐. 경영성과급은 국가 정책에 얼마나 잘 부응해서 열심히 일했는지 "공공기관 경영평가위원회"에서 당해연도 실적을 조사해서 등급을 부여하고 그 등급에 비례해서 지급토록 되어있단다. 반대로 흑자가 수십조가 나도 직원들의 성과급은 그에 연동하지 않아. 그리고 정부는 공기업이 수십조의 흑자를 내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아. 그랬다간 또 서민경제를 등한시하고 국민고혈을 빨아먹는 기업으로 매도당하고도 남을 테니까.
잊을만하면 터지는 공공기관 비리에 대해서는 나도 마음이 아파. 그런데 어느 조직에서건 100% 투명하고 깨끗하게 관리하는 건 쉬운 게 아냐. 거의 불가능해. 그게 학교든, 회사든, 정부든, 은행이든, 군대든, 종교단체든 누군가 일부는 꼭 사고를 치지. 내가 그 사고 치는 사람들을 두둔하고자 하는 건 아니야. 조직에서의 비리와 부패는 그 사회 수준에 비례하는 거라서 그게 꼭 특정회사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얘기하는 것뿐이야. 조직의 극히 일부에서 벌어지는 비효율과 비리, 부패가 조직 전체를 매도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거야. 대부분의 직원들은 성실하고 깨끗하고 부지런해요.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도 전력품질이 매우 좋기로 유명해. 한번 생각해 봐. 마지막 정전이 되었던 때가 언제였던지. 내가 살고 있는 파키스탄은 정전이 너무 잦아서 아예 정전이란 말 대신 "Load Shedding(전력분배)"라는 용어를 따로 만들어 쓰고 있는 실정이야. 상대적으로 저렴한 전기요금에 상대적으로 매우 고품질의 전력에너지. 이건 대한민국 국민들이 누리는 축복 중 하나이고,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이면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24시간 말없이 땀 흘리는 "전력분야 종사자들의 헌신" 덕분이야.
나는 한전 직원은 아니지만, 날마다 열심히 성실히 일하고도 "전기세"가 올랐다고 "전력분야 종사자"들을 싸잡아 방만경영에 천문학적 적자 속 지들끼리 성과급 잔치를 벌인다고 매도하는 현실이 참 싫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전기요금을 올렸음에도 불구, 한전이 저렇게나 적자가 심하게 나는 건 수입에너지 가격이 전쟁으로 엄청나게 올라서 그런 거지, 방만경영이나 성과급 하곤 거리가 멀어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면서 유럽 전역에서 전기요금은 크게 뛰었다. 한국전력 등 국내 통계에 따르면 2021년 1월~2022년 6월 전기요금 인상률은 영국이 89%, 스페인이 45%, 프랑스가 25.6%에 달했다. 이탈리아의 경우 106.9%나 치솟았다.(아래 기사 중 일부 발췌)"
https://view.asiae.co.kr/article/2023011913360325382
자, 알겠지 동은아?
이제부턴 "전기세"라고 하기 없기다?
뭐라고 한다? "전기요금".
그래. 기억해 줘. 제발.
동은아. 너 그런데, 영어도 잘하더라?
너, 그런데, 한국어로는 "전기세"라고 했으면서 왜 영어로는 "Electricity Bill"이라고 하는데?
너, 사실 알고 있었구나?
이왕 쓴소리 하는 김에 한 마디만 더 할께.
동은이 너, 복수를 끝내고 주여정씨랑 바닷가로 이별여행을 갔잖아. 뭐, 뒤풀이 하며 술 한잔 하는 건 좋은데, 공공장소에서 음주를 했으면 치우고 갔어야지... 저게 뭐니? 그리고, 우리나라니까 망정이지, 대부분의 외국에선 공공장소에서 음주 자체가 허용되지 않아요. 술병 자체도 숨겨서 들고 다녀야 해.
그러니까 동은아.
앞으로는 바닷가 등대 같은 공공장소에서 음주는 좀 자제하고, 피치 못해 마셨으면 좀 치우고 가자?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