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제보다 나은 오늘 Mar 31. 2023

회사 로고가 박힌 깃발이 바닥에 떨어졌다

 밤새 강풍과 비바람이 불었다.


 연중 건조한 지역이라 먹구름이 끼고 비가 왔다 하면 거의 90% 확률로 천둥 번개 비바람이 친다. 한국에서는 봄에 잔잔한 비가 자주 내리며 그걸 "봄비"라고 칭하는 별도의 단어가 있다고 하면 현지 친구들은 그 분위기를 잘 상상하지 못한다. "어떻게 비가 내리는데 천둥 번개가 안 치고 바람도 안 불어요?" 하면서.


 기후학자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대기가 연중 건조하니까 비가 내릴 때 일순간 급상승하는 습도와 빗줄기로 하늘과 대지 간 형성되어 있던 전압의 불균형을 해소하려 할 거고 이미 생성되어 있던 막대한 전위차 및 전하량 때문에 천둥 번개가 생기는 게 아닐까 추측해 본다. 비 또한 국지적으로 기습적으로 내리니, 국지적으로만 습도 온도 압력이 바뀔 거고 그때 주변의 다른 온도 습도 압력의 공기덩어리가 강풍을 만들어내지 싶다.


 외국은 비 오는 일상풍경마저 무척 다르다. 아무튼 오늘은 지구과학 얘기를 하려고 한 건 아니니까 인트로는 여기쯤에서 패쓰.




 비바람 몰아친 다음날 출근길.


이렇게 까지 촘촘하진 않지만...


 차를 타고 사무실로 향하는 좁은 길에서 매우 낯익은 물체가 바닥에 뒹굴고 있는 게 보인다. 지사 내 출근길에는 수많은 가로등이 있고, 가로등마다 회사를 상징하는 배너가 달려있는데, 그중 하나가 강풍을 못 이기고 떨어져 버렸다. 아이구. 마음이 철컹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지만 일과가 시작되고 운영요원들이 소내점검을 돌면 어지간히 알아서 처리하겠지 싶어 보고도 못 본 척하고 출근을 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출근길.

 어제 본 그 배너가 아직도 여전히 길바닥에서 뒹굴고 있다.

 하아. 안 시키면 진짜 안 하는구나.

 늬들이 이러니까 내가 자꾸 빌런이 되는 거 아냐.


 환경담당 매니저를 불렀다.

 출근길에 저거 안 봤냐고. 점검해서 당장 치우라고 얘기를 하니,


 "현수막 거치관리는 정비팀에서 하고 있습니다. 정비팀에 점검하라고 할게요."


 야이 xxx... 업무미루기 핑퐁질 고만하고 쓰레기부터 먼저 처리하라고 이 xx...라는 말이 목구멍으로 기어오르는걸 간신히 참고... 분을 삭인 다음에 장문의 정신교육문을 작성해서 매니저방에 날린다.


좋은 아침입니다, 여러분.

나는 회사 배너가 바닥에 떨어져서 나뒹굴고 있는 걸 어제 아침에 발견했어요.
그리고 애석하게도 그건 아직까지 방치되고 있고,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네요.

회사 로고와 깃발은 신성시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얼굴이자 우리의 정신입니다.
우리의 혼이 담긴 깃발이 저렇게 쓰레기처럼 방치되고 있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저 말고 누군가는 저 배너가 손상되어 바닥에 떨어진 것을 발견했을 겁니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를 치우는 것은 "모두의 일"이지 "내 일"이 아닐 겁니다.
다만, 저는 관리자인 여러분들이 이런 일에 좀 더 신경 써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굳어가는 내 표정과 무언가 비장해 보이는 내 메신저를 보고 난 후에서야 모두가 움직인다. 환경팀은 떨어진 배너가 있는지 소내 전 구역 점검청소를 했고, 정비팀은 당장 크레인까지 동원해서 남은 가로등 배너들의 부착상태를 점검하고 보강한다.


 아 왜 꼭 지적하고 화를 내야 하냐고. 나, 나쁜 사람 되기 싫다니깐?




 내가 아침에 발견한 쓰레기가 단순한 과자봉지나 비닐봉지였다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발견한 것은 회사 조직원이라면 누구나 신성시 여기고 소중히 다루어야 할 "회사 깃발"이란 말이다. "회사 깃발"이 무참하게 바닥에 내동댕이 쳐 있는 꼴을 보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이틀이나 방치해? "알아서 하겠지" 생각했던 나부터 잘못했다. 출근버스를 당장 세우고 그 자리에서 호들갑을 떨었어야 했다.


 나는 "브랜드 관리"에 매우 신경을 많이 쓰는 조직장이다.

 회사의 로고와 깃발은 회사조직 그 자체의 상징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훼손되거나 그 가치가 폄하되어선 안 된다.

 단체로 얼차려를 받더라도 기수는 언제나 열외가 되는 이유는, 깃발 그 자체는 언제나 신성하기 때문이다. 공통으로 믿는 신념과 가치에 흠이 생기거나 가치가 격하되는 일이 발생해선 안 되며, 만의 하나 그런 일이 발생하면 그 즉시 시정되어야 한다.

 이미 현지 직원들도 내가 회사 로고 브랜드 관리에 민감한 사람이란 거 알기에 나에게 올라오는 결재문서에는 회사 로고가 장평비 훼손 없이 제대로 박혀있는지 제일 먼저 확인한다. 브랜드는 회사의 철학과 신념, 조직문화, 제품의 신뢰, 문서의 어투와 색깔까지 모든 걸 일관되게 담아낼 수 있어야 하며, 공통의 이미지로 내부고객과 외부고객에게 어필할 수 있어야 함과 동시에 소통의 창구가 되어야 한다.


 아니, 그런데.

 회사 깃발이 저렇게 내동댕이 처져 있는데, 이틀이나 방치해? 내가 또 뚜껑이 열린다.


 이 현지 친구들도 종교적 상징물에는 매우 극도로 민감하다. 이슬람 창시자로 추앙받는 무함마드 초상화가 저렇게 나뒹구는 쓰레기로 방치가 되었다간 폭동이 일어나고 관리부실 및 대표책임으로 내가 산 채로 화형을 당하고도 남을 일이란 거 내가 잘 안다.


https://www.insight.co.kr/news/371240


 그런데, 자기들만큼이나 내가 소중하고 신성시 생각하는 회사 로고와 깃발은 왜 소중하게 관리하지 않는단 말인가. 늬들 종교가 이슬람교라면 내 종교는 회사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냐고. 늬들, 무슬림이기전에 우리 회사 직원들 아님? 그럼 끓어오르는 애사심까진 아니더라도 최소한 깃발을 보며 소속감 정도는 느껴줘야지.



 내가 어릴 때 국기하강식이 있으면 운동장에서 하던 놀이도 중단하고 내려오는 태극기를 바라보며 가슴에 손 얹고 애국가가 마칠 때까지 부동자세로 있어야 한다고 배웠고 안 지키면 혼나던 꼰대세대라서 그런 걸 수도 있다. 현지 친구들은 입사한 지 채 몇 년 되지도 않았고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애사심이 조금도 없어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연중 그렇게 회사 로고를 소중히 다루라고 입버릇처럼 앵무새처럼 읊어대면, 이제 좀 자동으로 반응할 때도 되지 않았냔 말이지...


 회사 로고를 소중히 대하고 아끼는 조직문화를 낯선 이국땅에 심는다는 건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지진이 일어났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