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 다발국가 파키스탄
2023년 3월 21일 저녁.
며칠 몸을 좀 많이 썼더니 무진장 피곤하다.
오랜만에 일찍 자보려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눕자마자 침대가 흔들리는 것 같다.
아, 몸이 많이 부실한가? 벌써 이러면 안 되는데.
몇 초 뒤, 이번엔 더욱 많이 흔들린다. 최소 30초는 흔들린 것 같다. 갑자기 공포감이 밀려온다.
"아, 지진이구나."
머리로는 배웠는데, 순간 몸이 얼어붙어서 꼼짝도 못 하겠다. 더 심한 지진이 오기 전에 빨리 책상 아래로 숨는 것이 지진 매뉴얼인데 이론과 실전은 다르다.
흔들림이 멈췄다. 끝났나? 이거 전진인가? 본진인가?
모르면 구글. 스마트폰으로 검색창에 "earthquake"라고 치니, 바로 딱 뜬다.
신기한 세상이다. 불과 5분 전에 발생한 건데 바로 딱 뜬다. 아마 알고리즘이 자동으로 올렸겠지? 알면서도 늘 신기한 생각이 든다.
(이후 공식발표를 통해 진도 6.5로 수정되었다.)
초강진이네? 대충 진앙지를 보니 여기서 300~400km쯤 떨어진 아프가니스탄 북부 접경지대.
여기저기서 카톡과 왓츠앱 단톡방이 울린다.
진앙지에서 더 가까운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는 물론 저 멀리 라호르에서도 진동을 느꼈다며 불안해서 집 밖에 나왔다는 메시지가 올라온다. 운영팀장은 24시간 가동 중인 설비 상태를 묻고 진단점검을 지시한다. 앗, 이런 적은 없었는데? 잠깐 흔들렸을 뿐인데 설마 여기까지 파급손상이 생기려나? 짧은 불안감이 엄습한다.
곧 보고가 올라온다. 설비 주기기에 강한 진동이 기록되긴 했지만 정상범위 이내이고 가동에는 아무 지장이 없단다. 다행이다. 휴... 설마 손상된 곳 없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정비팀장이 현장 긴급점검을 마치고 대면보고를 한다.
"지사장님, 걱정 마십시오. 돌아보고 왔는데 설비는 특별한 이상징후가 안 보입니다."
"한 밤중에 수고했어요. 고맙습니다."
파견자 단톡방에서도 놀라서 서로 안부를 챙긴다. 다행히 이슬라마바드에서도 건물이 잠시 살짝 흔들린 것 외에는 큰 이상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있어봐라... 이거, 진도 7.7짜리 대형 지진이면 아무리 진앙지가 멀어도 몇 분 후면 국제뉴스로 여기저기 뜰 거고, 내일 아침이면 본사가 다 알겠네? 늦은 밤이지만 상황보고서 써야겠다. "지진은 났지만 이상 없음"으로 보고서를 쓰려고 마음먹고 있는데, 직원 단톡방에 심상찮은 사진이 올라온다. "숙소 벽에 금이 갔어요" 아, 저런. 역시 뭐가 좀 불안하다 했어.
상황보고서의 톤을 좀 수정해야겠다. "설비는 아무 지장 없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파키스탄 파견자도 모두 무사합니다. 단, 숙소 노후건물 일부에 균열이 발생하여 날이 밝는대로 정밀조사 하겠습니다."
후다닥 보고서를 써서 본사에 송부하고 다시 잠드려는데, 놀란 마음이 진정이 안 되어서 잠이 잘 안 온다. 이게 혹시 여진이면, 본진이 곧 올 테고, 본진이 오면 자다가도 대비를 해야 할 테니, 가장 가까운 대피장소를 살펴본다. 일단 흔들리면 책상 아래로 숨어야겠어... 머리는 알고 있는데 몸이 반응하려나. 또 흔들리면 꼭 숨어야지 숨어야지 머릿속에서 대피계획을 세워본다. 지진 피해가 얼마나 되려나 구글과 유튜브를 검색해 봤는데 진앙지와 가까운 곳의 소식은 하나도 없고 대부분 저 후방 인도 파키스탄 대도시에서 "진동을 감지했다"는 기사밖에 없다. 아프가니스탄 북부지역은 워낙에 낙후된 곳이라 인구 자체가 많지 않고 통신인프라도 좋지 못해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사람 자체가 많지 않은 탓이겠지. 저 정도 지진이면 또 분명 사상자가 있지 싶은데 아무쪼록 그들에게도 신의 가호가 있길 빌어본다...
https://www.yna.co.kr/view/AKR20230322002652075?input=1195m
지질학적으로 파키스탄 북부 지역은 유라시아판과 인도판이 만나는 지역이다. 두 지질판이 만나서 봉기하는 지역으로 여기서 형성된 것이 히말라야 산맥이며 누구나 잘 아는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산도 이 산맥에 속해있다. 에베레스트 산은 네팔에 있지만 세계에서 2번째 높은 산인 K2는 파키스탄에 있고 이 일대 산들이 높은 이유는 지각판이 만나 밀려 올라가서 그렇다고 한다.
상황이 그런지라, 이 히말라야 산맥 주변일대는 지진 다발 지역이다.
2015년 네팔 카트만두 일대에서 일어난 진도 8.1 지진으로 사망자 약 9천 명, 이재민 약 660만 명의 피해가 발생했다.
https://namu.wiki/w/2015%EB%85%84%20%EB%84%A4%ED%8C%94%20%EB%8C%80%EC%A7%80%EC%A7%84
2005년 10월 8일, 파키스탄 카슈미르의 주도(Capital City) 무자파라바드 인근에서 진도 7.6의 천발 대지진이 있어났다. 사망자 8만 7천여 명에 이재민 330만 명, 대도시 전체가 폐허로 변해버린 끔찍한 재앙이 일어났다. 무자파라바드는 내가 사는 곳과 불과 직선거리 약 150km 거리에 위치한다.
https://imnews.imbc.com/replay/2006/nwdesk/article/1983786_29291.html
2019년 9월 24일에는 이곳에서 불과 40km밖에 안 떨어진 소도시 미푸르에서 진도 5.8 규모의 지진이 발생한 적이 있다.
https://www.yna.co.kr/view/AKR20190924180951009
위키피디아에서 2019년 이후에 파키스탄에서 발생한 주요 지진기록을 살펴봤다. 강도가 낮은 지진을 모두 포함한다면 연간 수십 수백 건이 될 것 같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은 아자드 잠무 앤드 카슈미르라는 자치구인데, 지역 대부분이 주황색 또는 붉은색 지진위험구역에 속해있다.
대자연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
맨틀의 대류현상으로 지각이 이동하며 그 이동과정에서 발생하는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섭리가 지진이라고 하지만, 저렇게 큰 거 한 방 보다는 잘게 잘게 쪼개서 모쪼록 큰 피해 없이 안전하게 지구땅 위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지각판이 만나는 경계에다 기름칠이라도 잔뜩 해놓는다면 좀 미끄럽게 비껴가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