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자 여행기를 조금조금 쓰고 있는 사이, 갑자기 하늘이 캄캄해지고 우르릉 우르릉 시동 거는듯한 소리가 나더니, 언제나처럼 세찬 소나기가 쏟아붓는다. 비만 오는 게 아니라 바람도 거세다. 기온도 갑자기 뚝! 떨어진다. 여긴 비만 왔다 하면 언제나 이렇다. 단기간에 쏟아붓고, 비바람과 천둥번개가 거의 항상 같이 친다. 대기가 불안정해지지 않으면 비가 안 오고, 비가 안 오면 대기가 안정적인 모양이다. 한국처럼 보슬보슬 몇 시간씩 내리는 비는 여기서 본 적이 없다. 봄비, 보슬비, 이슬비. 참 운치 있는 말인데 여긴 그런 말 자체가 없네...
그러고 보니 나는 현지 사람들이 우산을 쓰는 걸 거의 못 봤다. 어지간한 상점에서도 우산을 잘 팔지 않는다. 사실, 나도 여기 와선 우산을 "거의" 챙기지 않는 편인데 비가 오는 중 피치 못하게 이동해야 할 때는 우산을 쓰던 안 쓰던 똑같고(바람과 함께 세차게 내려서 어차피 우산으로 못 막고 쫄딱 젖는다.) 당장 급하게 이동할 게 아니라면 대부분 몇십 분 안에 그치니 조금만 기다렸다 이동하면 되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치면 본격 장마철에 해당하는 몬순 기간에도 내내 줄기차게 비가 오는 게 아니고 왕창 쏟았다가 잠잠하다가 또 왕창 쏟았다가 하는 식으로 비가 내려서, 우수관 범람, 토사 매몰 등의 사고도 심심찮게 벌어진다.
창 밖으로 차캉 차캉 소리가 들린다. 여기 좀 봐주세요~ 하면서.
오늘도 요란하게 비바람이 치는데, 비 오는 소리가 평상시와 좀 다르다. 차캉~ 차캉~ 하면서 무언가가 난간 핸드레일과 강화유리를 치는 소리가 난다.
"아, 우박이구나~"
테라스에 나가보니 진짜 우박이 있다! 한국에서도 우박이 아주 드물지는 않은 자연현상이지만 내가 우박을 실제로 만져본 날은 오늘이 처음이다. 전에도 우박이 내리는 소리를 몇 번 듣긴 했지만 직접 만져볼 생각을 해 보진 않았다. 우박은 구름씨 알갱이가 불안정한 대기 속에서 요동을 치면서 오르내리며 커지다가 무게를 못 이기고 떨어지는 거니까 잔잔하게 비 오는 환경에선 만날 일이 잘 없다. 날씨가 바람 불고 요동치고 할 때 비가 와야 만날 수 있는 확률이 높다는 말.
투명한 좁쌀처럼 생긴 파키스탄 우박. 비를 맞으며 찍어서 초점이 살짝 안 맞다.
오늘 내린 우박은 좁쌀만 한 크기였고, 30도가 육박하는 대지에 내린 탓에 떨어지자마자 다 녹아버렸다. 난간에 몇 걸쳐있는 작은 우박을 손으로 집어들고 방으로 들어왔지만 실내에서 카메라 초점 맞출 시간도 없이 다 녹는다. 우박은 딱히 특별하진 않다. 그냥, 작디작은 얼음 알갱이 느낌, 끝.
가끔 토픽에 나오는 뉴스를 보면 메추리알이나 탁구공만 한 우박이 내려서 차량 유리가 깨졌니 어떠니 하는 말도 듣는데, 저런 우박이 내리면 밖에 나가면 안 될 것 같다.(원래 집 밖에 잘 안 나가는 집돌이 성향 99% 내향인이긴 하지만.)
인생의 절반을 지내 온 나이 같은데 여전히 새로운 경험들이 많네.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하면 천천히 늙는다는데, 그런 의미에서 오늘도 새로운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