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숫자를 세는 단위
파키스탄은 루피를 국가 공용화폐로 사용한다.
그런데, 자국 화폐로 루피를 사용하는 나라들이 꽤 많아서, 파키스탄에서 사용되는 루피를 말할 때는 이를 또 "파키스탄 루피"라고 구분 지어 부른다. "루피" 화폐단위는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동남아시아까지 꽤 범위가 넓다. 루피를 자국 화폐단위로 쓰는 국가는 다음과 같다.
인도 루피
파키스탄 루피
몰디브 루피
스리랑카 루피
네팔 루피
모리셔스 루피
세이셸 루피
인도네시아 루피아
영국령 걸프 루피
루피를 사용하는 나라들 중 인도 문화권에 속한 나라들(인도, 네팔, 파키스탄, 스리랑카) 및 루피는 안 쓰지만 그 인접 문화권 나라들(아프가니스탄, 부탄, 미얀마, 방글라데시 등)은 화폐를 셀 때 쓰는 특수한 공통적인 단위가 있다. (엄밀히 말하면 숫자를 세는 단위인데, 평상시 가장 많이 접하는 숫자가 돈이니까 돈을 셀 때 먼저 접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랙(Lahk, 라크라고도 한다)과 크로어(Crore)이다.
랙(Lahk)은 십만(100,000)을 의미한다.
1 Lahk Rupee, 줄여서 1 Lahk은 즉 십만 루피이다.
2023년 5월 말 현재, 한화로 약 47만 원 정도 되는 돈. 중견회사에서 10년 넘는 경력을 쌓고 과장급 정도는 되어야 월급으로 받을 수 있는 적지 않은 돈이다.
크로어(Crore)는 천만(10,000,000)을 의미한다.
1 Crore Rupee는 천만 루피. 우리 돈 약 4천7백만 원 정도. 대충 차 한 대 값이라 생각하면 되겠다.
물자가 부족하고 차량을 수입에 의존하는 파키스탄은 차량가격이 매우 비싸며, 중고차 가격도 안 떨어진다. 1 Crore Rupee를 줘도 좋은 차는 못 산다.
숫자를 세는 단위가 저렇기 때문에, 이 나라에선 큰 단위 숫자를 표기할 때 컴마(,)를 특수하게 찍는다.
천만(10,000,000)을 숫자로 표현하면 1,00,00,000 이렇게 찍는 게 일반적이다.
(내가 처음에 공문에 숫자표기 오탈자가 났다고 지적을 하다가 망신을 당했다... 이 나라에선 저게 맞다....)
생각해 보면, 큰 단위 숫자에 동그라미 세 개마다 구분쉼표를 찍는 것은 철저하게 영미권 국가를 위해 그렇게 하는 거다. 1,000,000,000. 즉, 싸우전드(천), 밀리언(백만), 빌리언(십억) 단위를 세기 편하게 딱 저렇게 쉼표를 찍은 거다. 한국식으로 숫자를 세면, 만, 억, 조 단위로 동그라미 4개가 늘어날 때마다 단위가 바뀌는데 동그라미 3개인 천 단위를 제외하곤 저 영미식 숫자구분 쉼표하고 늘 어깃장이 난다.
5,123,456,789,123
이런 숫자가 있다고 치자.
영어 쓰는 사람들은 읽기 편하겠지. 컴마 구분에 맞게 5 트릴리언 123 빌리언 456 밀리언 789 싸우전드 123이라고 읽으면 되니까.
한국인인 나에게는 이렇게 4 단위마다 끊어주면 훨씬 편하겠다.
5,1234,5678,9123
5조 1234억 5678만 9123
얼마나 보기 좋고 읽기 좋아?
5,123,456,789,123
요렇게 적으면 어디가 억 단위인지 인생 40년을 넘게 살아도 여전히 뒤에서부터 하나하나 세어서 올라온단 말이다. 말하기 훈련을 전문적으로 받은 아나운서들도 선거개표방송을 하면 순간적으로 큰 숫자를 못 읽어서 버벅버벅 하는 걸 보면, 큰 숫자 읽기가 나만 힘든 건 아닐 게다.
파키스탄에 살기 전에는 숫자구분쉼표 3 단위마다 찍는 걸 어기면 큰일 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여기 살아보니 숫자 구분쉼표는 그 나라 문화에 맞게 찍는 게 훨씬 간편하고 좋다. 그리고 이 친구들은 당당하게 그렇게 쓰며 살고 있다.
숫자 표기 문화 하나만큼은 인도 / 파키스탄 문화권의 뚝심이 무척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