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리가 있나
지은 지 채 1년 남짓밖에 안 된 숙소 건물에 언젠가부터 지붕에 물이 샌다. 엉성하게 마감한 옥상 방수층이 고작 겨우 네 계절을 겪었을 뿐인데 그 새 갈라지고 그 틈새로 물이 스며들어 물이 사방팔방 번졌다. 요즘엔 몬순기간이라 말 그대로 "고온다습" 곰팡이 배양장 같은 환경이라 급격하게 여기저기 곰팡이가 자란다. 아놔 진짜.
건설 하자를 청구하려 했는데 이 건물은 계약상 하자보증이 1년이랜다. 무슨, 집이 스마트폰도 아니고 하자보증이 1년밖에 안 돼? 할 수 없이 소내 기술직을 동원하여 누수처 세부진단을 하고 외부에서 미장공을 임시채용해서 보수를 시작한다.
그런데, 보수공사가 진행된 첫날.
퇴근 후 쉬고 있는데 갑자기 에어컨디셔너가 작동을 멈춘다. 응? 정전인가? 아닌데. 조명은 그대론데. 너무 더워 과부하가 걸렸나? 갸웃갸웃하고 있는데 정비책임자가 와서 현황보고를 한다.
"천장에서 새던 물이 전선관으로 유입되어 전원분배기와 차단기가 타버렸습니다. 급한대로 해당 전원을 차단해서 오늘은 에어컨디셔너 가동이 불가능합니다."
"오늘부터 누수처 수리 착수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더 심해졌네요?"
"아니 그게... 작업자들이 누수처를 보수한다고 옥상 블록을 몽땅 다 들어내놓고, 어떤 방수 대비도 하지 않고 그대로 퇴근해 버렸어요. 거기에 다시 비가 오니 조금씩 새던 비가 왕창 새 버렸습니다. 그 물이 이번에는 차단기까지 들어간 거고요."
"에그... 그 미장공들 말이죠? 많은 걸 바라면 안 되지만 정말 너무하게 해 놓고 갔네... 허긴 뭐 이 나라 문화상 그 사람들 역할은 금 간 블록 시멘트 다시 메꾸는 거니까 전선관에 물이 차든 말든 아무 신경을 안 썼을 것 같긴 하네요. 전기 지식도 없던 사람들이었을 거고. 그런데, 작업감독은 오늘 마감도 확인 안 하고 퇴근시켰대요?"
"송구하지만 작업현장까진 확인 안 하고 말만 듣고 보내버린 것 같습니다."
"에효... 이왕 벌어진 일이니 어쩔 수 없죠. 그나마 공조기 전원만 나갔고 불나지 않아서 천만다행입니다.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내일 긴급히 복구하시죠."
일선작업자의 엉성한 작업마무리 때문에 정비책임자는 불그락 푸르락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다. 여기서 나까지 화내면 안 되지. 아무래도 내일 한 푸닥거리 하시겄네... 에그 뭐 가끔 군기잡기도 필요하긴 한데 현지인들을 너무 쥐 잡듯 잡으려나 살콤 걱정이 되기도 했다. 어쨌든 당일 작업마무리 부실에 따른 인재니 충분히 잘못한 일이긴 하다. 혼날땐 혼나기도 해야지 뭐...
파키스탄은 요즘 몬순기간. 구름이 끼고 비가 자주 오는 시즌이라 되려 6월보다 기온은 살짝 낮아졌다. 그럼에도 여름은 여름이라, 한 밤에도 30도에 가까운 온도와 80~90%를 넘나드는 습도 탓에 말 그대로 한증막이다. 이 날씨에 에어컨 없이는 단 하루도 살기 쉽지 않은데, 에어컨은 무슨 선풍기 보급도 제대로 안 된 일반 가정 서민들은 이 후텁지근한 몬순시즌을 어떻게 견디나 모르겠다.
더워죽겠지만 잠은 자야지. 일단 샤워부터 하고, 창과 문을 다 열고 통풍로를 확보하고 자려는데... 채 30분도 안 되어 목덜미에 땀이 줄줄 떨어지고 베개가 흠뻑 젖는다. 아, 역시 인류 최대의 발명은 에어컨이었어...ㅠㅠ 내가 더운데 우리 팀장님들도 당연히 덥겠지. 팀장님들 중 한 분은 2층 숙소의 더위를 결국 견디지 못하고 자다 말고 1층 다목적실에 내려가서 소파에서 쪽잠을 잤다고 한다. 숙소는 2층이 태양열을 직접 받는 구조라 1층이 그나마 1~2도는 더 시원하다. 문제는 1층은 다용도 공간이고 침실은 모두 2층에만 있다는 거. 아, 덥다. 너무 덥다. 한국에 가고 싶어...ㅠㅠ
어쨌든, 살아서 밤을 넘기고 다음날 보수작업이 시작되었다. 손상된 케이블과 차단기를 신품으로 교체하고, 누수처는 해가 지기 전에 실런트와 시멘트로 밀봉되었다.
이날 퇴근을 했는데 유독 숙소 건물이 매우 시원하다. 웬일이지? 가는 곳곳마다 에어컨이 최대로 가동 중이다.
"아니, 이러면 전력사용이 엄청날 텐데? 필요한 곳만 틀죠?"
"아, 차단기 교체하고 전원부하를 감당할 수 있는지 지금 시운전 중이라 그렇습니다."
아, 그런 거구나. 그렇지. 정비 후 초기부하를 최대치로 운전해 보고 안정성을 확인하는 것 역시 중요한 절차다. 아직까지 잘 돌아가고 있는 걸 보면 큰 문제는 없겠지. 근데 언제까지 테스트하려나...? 알아서들 하시것지. 어쨌든 에어컨 없는 집에 하루 살다가 에어컨이 들어오니 천국이 따로 없다.
그 다음날, 금요일 오후.
모두 다 퇴근하고 금쪽같은 주말이 다가 왔다. 이번 주말은 정말 아무 일 없기를.
모든 직원들 다 집에 보내고 숙소에 있는데, 잠깐, 오늘도 뭔가 좀 이상하다. 왜 저 앞 비어있는 전진사무실 유리창이 오늘따라 유독 뿌옇지??? 설마 불났나???
사무실 문을 확 열었는데, 세상에... 북극 한기가 확 느껴진다. 유리창이 뿌예진 이유는 실내 공기는 한기가 느껴질 만큼 내려가고 문 밖은 습도가 80%가 넘는 상태이니 유리창에 이슬이 맺힌 것. 어제 시운전한다고 에어컨 가동을 최대치로 해 놓고 그 상태 그대로 모두 다 집에 가버린 거다. 설마 지금까지 테스트 중인건가? 그럴리가 없다. 직원들은 모두 다 퇴근해버렸고 주말에 이 집에 혼자 주거하는 나는 어떤 계획도 들은게 없단말이다.
어제 오후부터 오늘 오후까지 요리사 청소부 문서배달부 운전사 등 수많은 사람이 이 건물을 드나들었을 텐데, 어느 누구도 텅 빈 전진사무실에 에어컨이 필요 이상으로 이틀이나 빵빵하게 가동되는 걸 신경 쓴 사람이 없었다. 뭐, 이해는 한다. "내 일 아니니까." 내가 주의 깊게 안 봤더라면 주말 내내 커다란 냉장실을 가동할 뻔했다.
이 나라에서 현지인 직원들을 통솔하는 조직장으로서 가장 힘든 일 중 하나가 주인의식 책임의식을 심어주는 일과 사각지대 애매한 업무분장을 나눠주는 일이다. 한국에서도 요즘 "그걸요? 제가요? 왜요?" 하고 정확히 묻는 젊은 세대들에게 기성 관리자들이 땀꽤나 쏟는다는데 여기선 그게 한 열 배쯤 더 한 것 같다. 특히 업무범위가 좁고 급여가 낮은 하급직원들에게서 이런 경향이 매우 심해지는데, 사실 그들이 받아가는 급여를 생각하면 또 "책임의식"을 가지고 주인처럼 일하라는 주문을 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하단말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아서 하겠지" 생각하면 어김없이 "알아서 안 하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최대한 마이크로 매니징을 안 하고 싶어도 걱정이 되고 의심이 되는데 어쩌란 말인가.
"잔소리하지 않는 친구 같은 편한 조직장"은 아마도 유니콘처럼 현실 세계에 없는 상상의 동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