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을 쓰면서 죽을 정도는 아닌데 너무 징징댔나 하는 생각이 살콤 든다. 사실 그렇게 견디기 힘든 것도 아니고 여기도 사람 사는 곳, 다 살만 하기도 한데 모든 건 마음먹기 나름이다.
어쨌든, 파키스탄 살이도 나름 살만하다는 이유. 시작해 봅니다.
1. 귀족 / 연예인 코스프레
선진국 사람이 개도국으로 가면 신분이 떡상한다. 상대적인 물가 수준 차이도 크고, 사회 전반에 "선진국 사람"이라고 우대하는 문화가 있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된 진 아직 얼마 안 지나서 그런 건지 유럽이나 북미로 가면 은근한 인종차별이 있는 거 모르는 바는 아니나, 적어도 파키스탄에선 기대이상의 "우대"를 받는다.
파키스탄에선 "동양인"이라고 하면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이니 기본적으로 자국민보다 다 부자다. 그리고 선진국에는 개도국 사람들이 돈 벌러 노동자의 자격으로 많이 가지만 선진국 사람이 개도국에 노동자로 갈 이유가 있나. 당연히 부유한 관광객 아니면 사업가, 기업인 또는 정부고관들이지. 파키스탄보다 못 사는 나라가 별로 없는 관계로 파키스탄에 방문하는 모든 외국인은 피부색이 희던 까맣던 일단 파키스탄 현지인보다 사회적인 신분이 무조건 높다고 보면 되며 이 사실을 현지인들도 잘 안다. 어딜 가든 기본 호칭으로 극존칭인 "Sir" 소리를 듣는다. 은행이나 병원에 가도 자연스레 운영자들이 알아서 줄 제일 앞으로 끼워준다. 굳이 새치기할 마음이 없었는데 운영자가 열어주는데 마다할 이유가 있나. 대중들도 당연하다는 눈치다. 원래 이 나라는 국민구성이 무슬림 97%의 찐 이슬람 국가인데 이슬람교 코란에 "외지자와 여행객에게 환대하라"는 종교적 가르침이 있는 것도 큰 영향을 주는 것 같다. 파키스탄 자체가 "남아시아"로 분류되는 국가이니, 같은 아시아 민족이라는 인식이 있어 그런 건지 파키스탄에서 "아시안 비하"의 제스처는 한 번도 겪어보질 못했다.
파키스탄은 여전히 폐쇄적인 국가이며 슈퍼여권 국가(무려 100여 개국 이상 무비자 입국 가능)인 우리나라도 비자 없이는 입국이 안 되는 나라이다. 국제운전면허도 여기선 통용되지 않는다. 위험하다고 동네방네 소문난 나라인 데다(수시 테러 다발국...) 출입국마저 까다로우니 당연히 외국인이 무척 드물다. 길거리만 나가도 같이 사진 찍자며 달려드는 수많은 사람들을 마주할 수 있다. 연예인 기분 느껴보고 싶다면 사람이 좀 많이 모이는 관광지를 찾아가면 된다. 사진 모델만 하다 와도 바쁠 것이다. 처음엔 이런 경험도 우쭐하곤 했는데 좀 지나면 무척 귀찮아진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현지인을 대동해서 좌, 우로 끼고 다니면 그나마 좀 덜 건드린다.
2. 값싼 인건비
1번의 연장성격이다. 저개발 개도국 특성상 인건비가 워낙에 싸다. 한 달 법정최저임금이 한화로 20만 원도 채 안 되는데 그나마도 민간영역에선 잘 안 지켜진다. 운전기사와 가사도우미는 거의 모든 외국인 가정에서 필수로 채용되며 주택규모가 좀 되는 집은 경비원, 가드너까지 채용하는 경우도 많다. 손하나 까딱 안 하고 왕처럼 살 수 있다. 회사 사모님들 사이에서 개도국으로 발령받으면 울면서 나갔다가 울면서 돌아온다는 말이 있다. 처음 나가보는 막막한 해외생활에 엄두가 안 나서 울면서 나갔다가, 돌아올 때는 왕비처럼 살던 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에서 치열하게 다시 적응하고 살 생각에 다시 눈물이 난다는 의미다. 가끔 전업주부 신분으로 남편 따라 나왔다가 여기서 사업을 차려 정착하려 하시는 분들을 본다. 현지인 부리며 편하게 살다가 다시 한국으로 가서 스스로 밥하고 청소하는 거 못해먹겠단다.
3. 직급 상향
이 또한 1번 항목과 유사하지만, 파견 나온 회사원(또는 공무원)에게만 적용되는 항목이다. 파견자에겐 본국에서 적용되는 직무권한보다 훨씬 큰 직무권한이 주어진다. 조직의 규모와 특성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한데 통상 1~2단계는 상향해서 적용된다. 나는 한국에서는 부서장 직위를 가진 회사원이지만, 여기에선 본부장 급에 맞먹는 직무권한을 가지고 있고 그에 걸맞은 사회적 직함, 예우가 제공된다. 직무권한과 지위가 높아질수록 책임도 커지고 책임지는 범위가 넓어져서 연중 마음 편할 날 없는 게 단점 이긴 하지만 (직급에 비해선) 비교적 젊은 나이에 커다란 직무권한을 행사하며 조직경영 경험을 쌓아갈 수 있다는 것은 파견자 개인에게는 다른 무엇과도 비교하기 힘든 엄청난 장점이다.
4. 해외 경험 그 자체
당연하게도 이건 꼭 파키스탄 살이의 경험이 아닌, 모든 해외파견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파견자로서의 해외살이 자체가 큰 장점이다. 내가 파키스탄 살이를 안 해봤으면 어떻게 파키스탄 이야기를 몇 권이 넘는 책 분량으로 꺼내 놓을 수 있겠나. 비단 브런치 소재로서의 이야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만큼 폭넓은 경험을 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지고 현지에서 살아보지 않으면 절대로 모를 체험을 통한 방대한 지식이 쌓인다는 얘기다.
비단 파키스탄뿐만 아니라 주변국가로의 여행기회도 더불어 오는 장점이다. 한국인이 가장 많이 여행 가는 외국이 일본, 그다음이 동남아 국가이다. 왜? 가깝고, 비행기표가 싸니까. 여기도 마찬가지다. 한국처럼 주변 국가(인도, 아프가니스탄, 이란 등)들과의 사이가 별로 안 좋아서 육로로 갈 수 있는 해외여행지가 제한되는 게 좀 단점 이긴 하지만 한국에서 가는 것보다는 훨씬 저렴한 가격에 중동과 유럽 여러 나라에 여행 갈 수 있다. 해외파견 회사원에게 국한된 것이긴 하지만 파견자에게는 회사에서 연 1회 선진국 전지휴가 항공권을 지원해 주는데, 이 또한 회사 해외파견자에게는 매우 큰 장점. 나는 작년 전지휴가 때는 이탈리아와 스위스를 다녀왔고 올해는 어디 갈지 아직 궁리 중이다.
5. 저렴한 먹거리(특히, 과일)
현지인들이 최저 임금 20만 원도 못 받는데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그래도 산다. 먹거리만큼은 놀라울 만큼 싸기 때문이다. 10kg 수박 한 덩이 2천 원도 안 한다. 한국에서 개당 5천 원 넘는 망고도 여기선 1만 원만 주면 궤짝으로 준다. 야채 5천 원 치 장을 보면 무거워서 못 들만큼 담긴다. 과일 좋아하는 분들께는 여기가 지상낙원이지 싶다.
다만, 저렴한 먹거리는 가공을 거치지 않은 1차 농산물 한정이며 맥도널드, 배스킨라빈스, KFC 등 글로벌 프랜차이즈 가격은 한국과 비교해도 그렇게 많이 싸진 않으며 현지쌀(안남미. 길쭉하게 생기고 찰기가 없음) 말고 수입쌀(짧고, 찰기 있는 쌀. 주로 중국에서 들어옴)은 비싸며 한국 라면 등 수입식품도 엄청나게 비싸다.
6. 휴식이 있는 느린 삶
한국만큼 삶이 치열하지 않다. 너무 당연한 소린가? 중국은 아니지만 여기도 만만디 문화. 인샬라 문화라고 하는 게 더 맞겠다. 일과 삶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대충 하다가 못하면 내일 또 하고 그래도 못하면 다음 주에 또 한다. 한국이면 1주일이면 끝나있을 도로공사를 1년 내내 하는 것 같다. 모 회사랑 철물 제작구매 계약을 했는데 이제 철광석을 주으러 간 건지 언제 납품하겠다는 연락이 없다. 직원 좀 찾아 회의라도 할라치면 기도 시간이랜다(무슬림은 하루 5회 기도를 한다.). 매년 연중 1개월은 라마단 기간이라고 해서 단식기간이 있는데 못 자고 못 먹어서 일을 못 하겠단다. 처음엔 무진장 갑갑해서 뒷목 잡고 쓰러지는 줄 알았는데 이미 일하는 시스템은 그에 맞게 세팅되어 있고 나만 마음을 내려놓으면 그게 또 그리 문제 될 것도 아니다. 이 친구들 일하는 속도만큼 마음을 내려놓았더니 삶에 여유가 찾아왔다. 나는 그동안 왜 그렇게 치열하게 살았나 싶은 생각마저 든다.
사회의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고 요람부터 무덤까지 언제나 남과 경쟁하며 속도전을 치르는 한국은 죽을 때까지 노동자가 갈려나가는 시스템일 수밖에 없지만 파키스탄은 참 뭐랄까 노동자의 인권이 살아있는 사회, 알라신이 대중을 지켜주는 사회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경제발전 속도는 좀 늦춰도 천천히 살며 여유를 가진 사회. 어쩌면 이게 더 좋은 걸지도 모르겠다.
7. 불요불급 전화호출 대폭 감소
오늘 작가, 본디 성향이 히키코모리에 콜포비아 환자다. 아니, 그런 사람이 한국에서 어떻게 사회생활 했냐고? 본성이 그럴 뿐 직장인의 의무를 안 한 건 아니다. 그래서 늘 불편하고 힘들었다. ㅠㅠ(아, 불쌍해라...)
시차가 있는 해외에 나오니 전화호출이 1/100 이하로 줄었다. 해외 전화요금이 비싸니, 어지간히 급하고 중요한 거 아니면 전화 걸 사람이 없다. 때때로 지인이나 회사에서 카카오 보이스톡 호출이 오기도 하지만 인터넷 속도 문제로 접속이 되는 날보다 안 되는 날이 더 많다. 여기선 카카오 보이스톡보단 Zoom 화상회의가 접속 성공률이 더 높다. 국내에서 현지인들하고 통화할 일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정말 급한 일 아니고선 왓츠앱으로 영어로 채팅하며 소통한다.
어쨌건, 전화로 수다 떠는 거 좋아하는 사람에겐 갑갑하기 이를 데 없는 그지 같은 환경일 수 있으나 나 같은 콜포비아 환우님께는 전화 걸려올 두려운 일 없는 평온한 곳이다.
아, 사실 이게 제일 중요한데 처음부터 1번으로 쓰자니 너무 속물 같아 보여서 쓸까 말까 하다 그래도 써본다.
해외파견자에게는 파견자 수당을 준다. 파키스탄은 위험국가라서 위험수당도 얹어준다. 내 목숨값에 비하면 너무 싼 것 같기는 한데 아무 생각 없이 받으면 이 또한 쏠쏠하다. 파견자 수당 + 위험수당을 추가로 받으면서부터 한국에 남아있는 마누라님한테 돈 쓰는 잔소리를 좀 안 하기 시작했는데 한국 돌아가서 수당 똑 끊어지고 다시 카드값이 급여를 초과하면 다시 또 쫌생이 남편으로 돌아갈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요다음부턴 1편의 시선 바꾸기. 1편 읽고 오셔야 이해가 잘 되심(글머리에서 읽으셨으면 패쓰).
좀 자주 끊기고, 무지무지 느리긴 하지만 되는 게 어딘감. 심지어 내가 사는 곳은 첩첩시골인데, 여기서 인터넷이 된다는 것 자체에 감사하며 살고 있다.
10. 벌레 : 자연관찰
정말 갖가지 벌레를 다양하게 볼 수 있다. 몇 주 전부터 내 방 창문틀에 노랑벌들이 벌집을 짓고 있는데, 벌집이 지어지는 과정을 관찰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단, 내 방에 들어오지만 말지어다.
11. 정전 : 그래도 최우선 전력 공급
정전이 잦긴 하지만, 전력이 공급되는 게 어디냐. 정말 정말 다행히도, 내가 살고 있는 지사는 배전망이 아닌 송전망에 직결된 전력공급 최우선 단지 중 하나라서 주변 민가에 비해서는 정전 빈도가 상대적으로 많이 낮다. 인샬라. 감사합니다.
12. 더위 : 그래도 4계절 존재
엄청 덥고 여름이 긴 나라긴 하지만 엄연히 겨울도 존재하는 곳(그렇다고 겨울에도 얼음이 얼 정도로 춥진 않다.). 늘상 더운 아프리카 상상하고 왔었는데 그래도 연중에 숨 돌릴 계절이 있다는 건 괜찮은 일이다.
13. 음식 : 그래도 한식 해 먹는다
종교적 이유로 돼지고기를 아예 못 구하며 해산물이 귀해 식단이 단조롭긴 하지만 그래도 한식재료 구해서 유사한식을 해 먹을 수 있다. 앞서 서술했다시피 한국쌀과 유사한 찰기 있는 중국쌀도 구할 수 있고 애호박, 배추, 파, 양파, 당근 등 기본적인 야채는 동일하다. 매 끼를 파키스탄 현지식으로만 먹게 되었다면 한국이 너무나 그리울 뻔했는데 이만큼이라도 구해서 먹을 수 있다는 현실에 감사해하며 살고 있다. 금주국가지만 알음알음 술을 구해 먹을 수 있는 스킬도 익혔으니 그것도 크게 문제 되진 않는다.(그래도 전어구이는 먹고 싶다.)
14. 물 : 관정수는 씻는 물로만
마시는 물은 정수처리된 병입수를 쓰고 있으니 이 또한 살만하다. 병입수는 비싸서 딱 식수로만 쓰는데, 관정수로 설거지 하고 물기 제거를 제때 하지 않으면 식기 표면에 석회가루가 끼니까 잘 보고 닦고 먹으면 된다.
15. 이동 제약 : 밖에 나가지 않아도 되는 이유
이곳 지사가 위치한 곳은 보안상의 이유로 경호대를 동반하지 않고는 울타리 밖을 한 발짝도 나갈 수가 없는, 이동의 자유가 심각하게 없는 곳이지만 괜찮다. 원래 나는 히키코모리다.(기가 막힌 반전!)
콕 박혀 사는 삶을 즐기며 살다가 누가 오면 못 나가서 갑갑하다고 징징대면 술 넣어주고 달래준다(거짓말이다. 사실 안 갑갑하다. ㅋㅋㅋ). 아,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그렇단 말이지 에너제틱한 사람한테 해당되는 내용은 아니다...
16. 기약 없는 일처리 : 여유가 있는 삶
아까 6번에서 얘기했으니 중복. 시선을 바꾸면 여유가 있는 삶. 인샬라.
17. 대기질 엉망 : 역시 밖에 안 나가는 이유
밖에 나가지만 않으면 괜찮다. 그래도 대도시에 비해선 여기 상태는 양호한 편.
18. 공산품 부족 : 생활비 절약
안 사고 안 쓰니 생활비가 굳는다. 그래도 꼭 필요한 거면 한국 가서 비행기로 업어오면 된다.
오, 역시 긍정적 마인드로 써봤더니 파키스탄이 갑자기 살기 좋은 국가가 된 것 같다. 역시 긍정의 힘은 위대하다. 원래 좋은 건 나만 알고 있고 너무 떠들면 안 되는데 이다음부터 소문나서 파키스탄 파견자 선발 경쟁률이 올라가는 건 아닐까 모르겠네.
쓰다보니 "파키스탄 라이프"의 장점하고 "해외 파견자의 장점"이 애매하게 섞여버렸다. 어쩔 수 없다. 나는 해외 파견자 회사원 신분으로 파키스탄에 살고 있으니 내 입장에선 그게 그거니까. 삶의 영역이 지사 안이며 나머지는 관찰자 입장이라 둘을 딱 나누기도 뭐가 좀 애매하니, 읽다가 분류가 좀 이상하다 갸우뚱하신 분들도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길.(다 써놓고 나서 지금 보니 보이는데 다시 쓰기 싫은 1인.)
자자. 어쨌든, 애니웨이.
여러분 모두 명심하셔야 합니다. 싫고 좋은 건 절대적 현상이 아니라 모두 본인들 마음속에 있는 거란 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