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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제보다 나은 오늘 Aug 19. 2023

"양복"에 대한 단상

우리는 어쩌다 한국 명절, 기념일에 "영국 전통의상"을 입게 된 걸까

 양복. 정장(正裝). 또는 Suit.

 영국 잉글랜드 전통의상에서 비롯된 격식을 갖춘 옷차림.

 이게 어쩌다 전 세계 모든 문명권에서 격식을 갖춰 입는 옷의 상징이 된 걸까.


 우리나라에서 양복이 대중화된 건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개화기 이전에는 이런 옷을 만들 줄 아는 사람도, 입을 이유도 없었던 게 당연하지 않은가.



 헤이그 열사 사진을 봐도 잘빠진 양복을 입고 계신 걸로 봐선 이미 당대 고관들에겐 양복의 복식문화가 뿌리내렸던 것 같다.


 양복의 사전적 의미는 서양의 복식이란 말이며, 정장은 정식으로 갖춰 입은 옷이란 뜻이니 서로 그 사전적 의미는 서로 다르지만 일상 중 통용되는 뜻은 서양식 비즈니스 재킷과 바지로 그 의미는 사실 동일하게 쓰인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각 문화권마다 그 나라 고유문화를 반영하며 갖춰 입는 옷의 격식 문화를 보유하고 있다. 잘 알다시피 우리는 한복에 두루마기, 갓이 공식 예복이며 기타 결혼식용 화려한 색상의 한복이나 장원급제 시 쓰는 어사화 관모 등 TPO(시간, 장소, 상황)에 맞는 고유 복식문화를 가진 나라이다. 그런데 갈수록 우리 고유 한복 구경하기가 힘들어진다. 모든 자리 막론하고 대부분 양복으로 대체되어서다.


양복 안 입고 온 사람 손~ (2015 세계 기후변화 총회 사진)


 세상이 언제부터 "영국 전통의상"이 세계표준 격식의복이 된 걸까.

 왜 "양복"을 입지 않으면 비즈니스 미팅에서 결례라는 인식이 생겨버린 걸까.

 나는 영국인도 아닌데 왜 "영국식 정장"을 입도록 사회적 압박을 받아야 할까.




 공식 행사나 미팅에서 서양식 정장인 양복을 입지 않아도 그다지 어색해 보이지 않는 부류가 있긴 있다.

2022 이집트 기후변화총회

 만수르 형님으로 대변되는 중동 국가들. 언제 어디서건 한결같은 전통의상을 고수한다. 매우 당당해 보이며 정장을 입지 않아도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는다.


프란치스코 교황, 2021

 종교지도자. 비단 교황뿐만 아니라 천주교 사제불교 스님들도 정장을 입지 않는다. 사실 이 분들이 정장을 입고 다니면 그게 더 어색할 것 같기는 하다. 


김진표 의장, 부하리 나이지리아 대통령 면담(2022)


 아프리카 등 3세계 지도자 및 정치인들. 열강 제국주의의 홍역을 톡톡히 치른 나라들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그래도 영국식으로 대변되는 서양 문화가 완전히 뿌리내리진 못했나 보다. 상당수의 정치인들이 평일에도 전통 의상을 고수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파키스탄 전 총리 셰바즈 샤리프(좌), 전전 총리 임란 칸(우)


 한 때 영국 식민지 경험을 가진, 내가 살고 있는 파키스탄에는 이런 문화가 반반이다. 일반 국민들은 대부분 평소에도 전통 의상인 샬와르 카미즈를 주로 입고 다수의 정치인도 즐겨 입는다. 서민과 청장년 층 지지도가 더 높은 전전 총리 임란 칸은 언론에 모습을 보일 때 거의 샬와르 카미즈만 입었지만 기득권 및 사회보수층의 지지도가 더 높았던 셰바즈 샤리프 전 총리는 거의 정장에 넥타이 차림으로만 언론에 나왔다.


G7 Hiroshima Summit


 지난 2023년 5월, 히로시마 G7 정상회의 사진이다. 남성 중 정장 & 타이 착용을 안 한 유독 눈에 띄는 한 사람, 우크라이나 젤린스키 대통령이다.



 그는 군복 티셔츠 차림으로 우리나라 국회에서 화상으로 연설을 하기도 했다. 복장 불량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는데 이건 다 자국이 전쟁 중임을 강조하며 일선 군인들을 대변하기 위한 그의 철학과 뚝심으로 일부러 이렇게 하는 것이며 그 의미를 이해한 세계 시민들로부터 응원을 받고 있다.


https://www.mk.co.kr/news/world/10262284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첫 양복을 사러 갈 때는 무척 설레는 마음이 있었다.

 대충 캐주얼을 입었을 때 하고 양복을 입었을 때 하고 주변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하늘 땅처럼 변한다는 걸 알아가던 나이였었다. 중요한 날, 양복에 타이까지 갖춰 입으면 나 스스로 중요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고 안 그래도 작지 않던 키가 5cm는 더 커 보이고 그랬다.


 어렸을 때야 사회비판의식도 별로 없고 사회화가 시작되는 처음이니 주변세상이 그러면 그런가 보다 하며 살았는데 나이가 들고 나만의 자아가 점점 색깔이 분명해지며 사회와 세상을 바라보는 나만의 시각을 갖추면서부터는 저 양복에 대한 의문이 점점 커져만 간다. 저게 최선인가. 왜 영국 전통의상만 매너인 건가. 평상시에 한복을 입으면 이상한가. 왜 세계정상회의를 하면 세계각국 전통예복을 입고 오지 않는 건가.

 세계 전통의상을 입고 국제회의를 하게 된다면 영국하고 미국 정도만 "양복"을 입으면 될 텐데. 다른 나라는 대부분 자국 전통의상들이 다 있지 않나. 왜 그걸 입고 가지 않는 건가.


 드레스 코드, 정장 격식이 주는 의미를 내가 모르진 않는다. 내가 화이트 셔츠를 받쳐 입고 정장에 타이까지 완벽히 코디하고 구두에 광내서 가면 그만큼 내가 그 미팅자리에 신경 썼다는 의미이며 상대방도 비슷한 수준으로 참석해 주면 나도 예우받는 기분이 들어 좋다. 그리고 국적을 막론하고 이 "영국식 정장"은 마치 "유니폼" 같은 신뢰관계를 형성해서 말은 잘 안 통해도 같은 마음가짐, 같은 의례를 지켜 참석한 동지의식 같은 것을 잘 심어준다. 세계 어디에 가도 살 수 있는 비슷한 옷. 그러면서 매우 비싸고 관리하기 힘든 옷. 중요할 때만 입는 옷. 부자들이나 사회적 위치에 있는 사람만 입는 옷. 그런 이미지가 있는 것이 영국식 정장, 즉 "양복"인 줄 나도 잘 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하면, 이런 복식문화는 결국 영국식 제국주의 탓에 세계로 전파된 거 아닐까? 세계에서 해가 지지 않는 유일한 나라였던 영국. 전 세계에 걸쳐 식민지를 만들었고 식민지가 아닌 나라라도 근현대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미국 역시 영국 이민자들이 주력이 되어 건설한 나라이니 영국의 바통을 이어받은 초강대국 미국의 영향력도 문화적으로 해석하면 영국문화 전파하기 시즌 2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영어가 세계 공용어가 된 배경이나 영국식 정장, "양복"이 표준 비즈니스 의전 매너가 된 배경은 거의 비슷하지 싶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변성 다양성 고유문화 존중의 시대, 양복을 강요하는 문화는 스스로 좀 내려놓고 전통예복 되살리기 운동을 했으면 좋겠다. 외국인이라곤 한 명도 없는 국내행사에 왜 모두 양복만 입고 다니게 된 건지 현상만 놓고 보면 이거 참 이상하다. 우리가 너무 익숙해서 이게 이상하다고 인식을 못 해서 그렇지, 우리 정치인들이 모두 기모노만 입고 다닌다고 상상해 보라. 우리가 일제 하에 식민살이를 했으니 역사가 그렇게 흘렀어도 이상하지 않을 가정 아닌가.


제19대 국회의원 단체 기념촬영. 정장에 타이를 메지 않은 남성분은 단 한 명도 없다.
2023년 파키스탄 의회 해산 기념사진. 양복을 입은 의원들이 훨씬 더 드물다.

 이미 깊이 뿌리 박힌 사회적 에티켓과 문화를 한 사람이 바꾸기 쉽지 않다. 혼자 한 번 하면 이상하지만 혼자서라도 자주 하면 그게 눈에 익어 익숙해지고, 서넛이 거들면 무언가 자연스러워지고, 여럿이 거들기 시작하면 그때부턴 문화가 된다. 생각해 보면 양복을 입는 문화는 길어도 100여 년 밖에 안 된 신생문화다.


강기갑 전 국회의원 공중부양 샷... 아참, 논점이 그건 아님.


 수염을 기르고 언제나 한복만 입고 다니던 강기갑 국회의원. 처음엔 어색해 보이기도 했지만 두세 번 보다 보니 그 분만의 정체성이 확실해지고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도인이나 신선처럼 아이덴티티가 너무 강하고 그에 따른 호불호가 갈리긴 했지만 주류시선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하시던 모습이 나는 좋아 보였다. 한국인이 한복 입는 게 어디가 어때서.



 장소마다 어울리는 복장이 있듯, 윤석열 대통령도 민속명절에는 한복을 입고, 군부대 방문 시엔 군복을 입고, 잼버리 행사 시엔 대원복을 입었다. 한복을 빼곤 좀 안 어울리긴 하시지만 그래도 좋은 시도라고 생각한다.


광복절에도 독립열사처럼 한복을 입으셨으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국빈 자격으로 외국을 방문하시거나 광복절처럼 우리 대한민국 국민에게 뜻깊은 날 등에도 좀 더 적극적으로 한복을 입으시면 어떨까. 비단 대통령 말고 주변 참모 및 정치인들도 일상 중 한복에 보다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자주 입어서 양복으로만 점철되어 버린 "정장 문화"를 한국식으로 조금씩 조금씩 바꾸어 가시길 제안드려본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면서.


 제일 위에서부터 모범을 좀 보여주시면 안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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