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주변에는 툭하면 미사일 날아다니는 긴장 팽팽한 휴전 중 국가이지만 치안 하나만큼은 안전하다는 소릴 듣던 대한민국이 요즘 위험해 보인다. 대중을 상대로 한 무차별 칼부림 테러가 도심 한복판에서 발생하고 이를 모방하는 범죄마저 잇따르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테러라니. 폭탄만 안 터졌지 내가 사는 파키스탄과 별반 다를 게 없잖아. 아, 정말 요즘 세상이 왜 이러나... 걱정스럽고 불안하다.
해외 나와 사는 나마저 불안불안한 나날의 연속들이니 정부가 대책을 수립 안 할 수 없다. 뭐라도 해야지. 그냥 가만있다간 또 "이게 나라냐" 소리 듣게 생겼다. 아니 최소한 대낮에 거리는 안전하게 걸어 다닐 수 있게 해 줘야지. 그게 나라지.
국민들의 불안한 민심이 점점 커지더니, 지난 8월 23일, 한덕수 총리가 이상동기범죄 재발방지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하면서 의무경찰 재도입 검토를 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했다. 행안부 장관과 경찰청장도 배석하여 구체적인 설명을 거들었다.
나는 최루탄 냄새가 뭔지 아는 고인물 세대라 의경이 있던 시절 군대를 다녀왔고 의경이 뭔지 잘 안다. 그리고 저 발표 듣기 전까지 우리나라에 의경제도가 없어졌다는 것도 몰랐었다. 나중에 좀 찾아보니 우리나라가 젊은 인구 급감으로 국군 50만 명이 무너졌고 전방부대마저 인력충원이 안 되어서 해체되고 있는 한계로, 결국 경찰청에 파견할 인력이 없어 의무경찰제도를 폐지한 것이라고 한다. 사회가 안정되어 필요가 없어서 폐지한 것이 아니고 사람이 없어서. 치안보단 국방이 우선이라고 판단한 결과였을 것이다.
뭐 어쨌든 다시 나랏님께서 국방보다 치안을 더 우선하겠다면 많이 고민하고 그에 맞는 결정을 하셨을게다. 국민이 도심에서 칼부림에 죽어나가는 나라가 되어서야 되겠는가. 당장 전쟁이 난 것도 아니니(사실은 여전히 전쟁 중 휴전이지만) 그 또한 합리적인 의사결정일 수도 있다.
으헉... 그런데, 오늘 이런저런 뉴스를 보다가 두 눈을 의심케 하는 뉴스를 보고야 말았다.
국방부 장관이 오늘(8.25) 벌어진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의경 부활 정책에 대해 협의한 바가 없다고 말한 것이다. 어지간하면 정부 편을 드는 여당 출신의 국방위 위원장조차 국방부 장관을 질타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사실, 국방부 장관은 정말 몰랐던 죄밖에 없었을 수도 있었던 것 같은데 좀 불쌍해 보이기도 했다. 내가 국방부 장관이었으면 "아, 저도 피해자입니다. 저한테 말 안 해주고 지들 맘대로 발표하는데 저한테 왜 그래요?" 했을 것 같다. 왜 의원님들은 엄한 사람한테 자꾸 소리 지르고 저러실까나.
협의도 안 되는 걸 억지로 밀어붙여 추진하다 사달이 나는 것보단 좀 쪽팔려도 빨리 실수를 인정하고 되돌리는 것이 백번 낫다. 쪽팔렸겠지만 도로 본인 입으로 주워 담았으니 그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그런데 이 박수는 딱 그 용기 까지에만이다.
에효.
대국민 담화문이 무슨 장난인가. 총리면 우리나라 부통령 격 아닌가. 툭 찔러봐서 반응 좋으면 하고 아님 말고 무슨 정책 발표를 이런 식으로 하나. 8천여 명 의경을 부활하려면 예산도 봐야 할 거고, 8천 명이 드론이나 안드로이드가 아닌 다음에야 사람일테고 의경을 정년퇴임하는 장성들로 채울게 아니라면 병력의무자 중 차출해서 보낼 텐데 그럼 군대는 누가 가나. 지금도 현역 자원이 보충이 안 되어서 일선 부대가 해체되고 신규 보급되는 장비를 운영할 인력이 모자라서 난리라는데 거긴 어떡하고. 모자란 인력은 또 며칠 뒤에 의무 여군제도 발표를 후다닥 하려나?
의경 재추진 담화를 들었을 때 국방부 장관의 마음은 어땠을까? "헛, 나만 빼고 지들끼리만 결정했네?" 했을 건데 가만 보니 발표하는 사람이 총리다. 마음은 부글부글 끓지만 직접 가서 따지진 못했을 것 같다. 경찰청장한테는 전화해 봤으려나....? "아니, 사람이, 이런 게 있으면 미리 얘기를 하셔야지, 이렇게 저를 엿 먹이시면 어떡합니까? 어떻게 수습하시려고 그래요? 군인 중 의경 빼가시면 그럼 현역 경찰을 그만큼 군대로 보내주실 겁니까?" 하셨을래나.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괜히 국방위원회 전체회의 끌려가서 가루가 되도록 까이는 모습을 보니 그냥 측은지심이 든다. 쯧쯧쯧.
나라가 평온하면 군대가 대민 지원을 나오기도 하고 나라가 시끄러우면 계엄령을 내리고 군대가 치안을 담당하기도 한다. 공권력을 쓰는 결정은 나랏님이 하시는 거 맞고, 이미 국민이 그 권한을 위임하긴 했다. 그런데 왜 그 결정이 프로페셔널하지 않아 보이나 모르겠다. 심지어 현 총리는 현 임기 포함 두 번이나 총리를 지내고 있는 "총리 전문가" 아니신가. 정책이란 게 최소 세부 방안과 장단점을 분석하고 찬성 반대 목소리를 좀 듣고 발표되어야지 이런 찔러보기가 어딨나.
우리 민족 특성이 빨리 끓고 빨리 잊는 민족이긴 하지만, 이 비슷한 선례가 얼마 전에 또 있었다.
민심이고 여론이고 싹 무시하고 그냥 질렀다가 엄청나게 욕먹고 정책 발표 4일 만에 백지화해 버린 2022년도 만 5세 조기입학 정책.
취지 자체는 좋은 방향이었겠지만 사회적 공감대 형성 및 합의란 거 없이 시작된 졸속 행정이었다. 딴 건 참아도 내 아이 문제라면 물불 안 가리는 학부모의 거센 항의를 받은 교육부 장관이 자진사퇴까지 하면서 논란은 일단락되었다.
정책이란 때론 과감할 필요도 있다.
철의 재상이라 불리던 영국 마가렛 대처 수상은 강성 노조의 파업에 굴복하지 않고 대화와 타협 없이 공권력으로 혁파해 가며 "영국병"을 고친 위대한 지도자로 칭송받았으며,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기습적으로 "금융실명제"를 시행해서 부작용은 좀 있었을망정 검은 지하경제를 양성화하는 것에 큰 전기를 마련했다. 강력한 지도력과 뚝심, 국가를 위하는 철학이 바탕이 되고 국민을 이해시키는 능력이 된다면 사회적 협의를 100% 거치지 않은 거친 정책이라도 추진될 필요가 있고 성공하면 위대한 업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정책 추진 시 장점과 단점이 명확히 보이고 이익과 손해를 볼 집단이 나뉘고 그에 따른 민심이 분열될만한 정책이라면 정책을 논의하고 입안하고 발표하기 전까지 당연히 국민적 합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정치인과 행정가는 분열과 혼란을 조장하는 사람이 아니고 그것을 봉합하고 더 나은 미래를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만 한다.
아, 그런데, 저 위에서부터의 "찔러보기 맛보기" 정책발표는 이제 좀 신중했으면 좋겠다.
작은 조직을 운영하는 나도 품의서가 올라오면 "예산은 얼마나? 기간은? 하고 나면 효과는? 안 했을 때 문제점은? 이거 말고 다른 대안은? 직원들 반응은?" 등등 물어보며 시시콜콜 두루두루 따져가며 신중하려고 노력하는데 국가를 경영하시는 분들이 찔러보고 아니면 말고 그러면 어느 국민이 정책을 신뢰하겠나? 발표할 때마다 불안불안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