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는 비가 지독히도 많이 와서 국토의 1/3이 잠겨버린 대참사가 났는데 다행히 올해는 작년만큼은 퍼붓지 않았다. 작년에는 정말 밖에 나가기가 두려웠고 낭떠러지 길 근처엔 언제 어떻게 무너질지 몰라 늘 조마조마 했었는데 올해는 적어도 내가 사는 사택 주변에서 심각한 산사태는 거의 없었다.(아예 없진 않았고...)
올해는 되려 동남아와 우리나라(그러니까, 대한민국. 여기 오래 살다 보니, 내가 우리나라라고 하면 꼭 파키스탄을 말하는 것 같이 스스로 느껴져서 다시 강조해 본다. 나는 한국인.) 쪽이 비폭탄이 와서 난리가 났다. 해걸이를 해 가며 퍼부으려나. 모쪼록 내가 근무하는 지역만큼은 제발 별일 없었으면 좋겠다. 아무리 잘 대비한다고 한들 자연재해 앞에선 무력한 인간일 뿐이다. 나도 지사 재난대비를 위해 직원들 훈련도 시키고 모래주머니를 사다가 방재 대응도 하고 했지만 실상 재난이 닥치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그저 오늘도 무사하기를. 무슬림은 아니지만 나도 매번 인샬라를 외치게 된다.
파키스탄 몬순기는 한국의 장마철처럼 비가 집중적으로 오는 기간이다. 파키스탄은 남한 대비 국토 면적이 대략 8.8배나 넓은 나라로 지역에 따라 날씨 및 계절 편차가 매우 크긴 하지만 통상 6월 말에서 8월 말까지를 몬순 기간으로 치며 이 기간에는 비가 집중적으로 온다. 비가 오는 상황 자체는 한국과 비슷하지만 비가 오는 느낌은 사뭇 다르다. 한국의 장마철에는 소나기가 내릴 때도 있지만 우중충한 날씨에 비가 오락가락 하거나 가는 빗줄기가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내리는 일이 잦지만, 여기 파키스탄은 비가 왔다하면 천둥 번개와 새찬 바람을 동반하여 일시적으로 쏟아붓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파키스탄은 열대국가는 아니지만 열대성 소나기 스콜(scuall) 생각하면 비슷하겠다. 우리나라도 여름 기온이 점점 올라가면서 스콜 현상이 잦아지고 있다고 듣긴 했다. 어쨌든 이 스콜성 비바람은 몰아칠 때는 매우 매섭게 쏟아붓는데, 통상 길어도 한 시간 내 그치며 곧 말짱해진다. 몬순 기간 내내 스콜성 소나기가 내리다 말다를 반복하며, 서너 시간 이상 연속해서 비가 내리는 경우는 여기선 매우 드문 편이다.
나는 파키스탄 중에서도 매우 한적한 시골마을에 살고 있다. 나는 여기 살면서 현지인들이 우산을 사용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마트에 가도 우산을 파는 곳이 거의 없다. 여기 오자마자 우산을 사긴 샀는데, 골프 초보 입문할 때 골프용품샵에서 산 골프용 장우산이 전부다. 골프용 우산은 비를 피하는 용도로 쓰기 보담 햇살을 피하는 용도로 훨씬 많이 썼다.
어쨌든 나도 우산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여기서 살면서 비를 피하기 위해 우산을 써 본 경험이 거의 없다. 그게 다 이유가 있다. 일단, 비 오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 스콜성 소나기는 매우 짧은 시간 집중해서 내린다. 그리고, 스콜이 시작되면 천둥 번개 바람이 거의 항상 세트로 동반되기 때문에 우산을 쓰는 것이 별로 의미가 없게 된다. 비가 옆에서 때리니까 어차피 신발, 옷이 다 젖는다. 그리고 천둥 번개가 거의 세트라 뾰족한 우산을 쓰는 것이 훨씬 위험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뾰족한 금속물체는 번개를 부르니까. 아무튼 스콜이 시작되면 밖에 안 나가는 것이 상책이며 어쩔 수 없이 이동해야 할 경우엔 다 젖을 것을 각오하고 나가야 한다. 태풍만큼은 아니지만, 태풍 속에서 우산 쓰고 걷는 게 별 의미가 없는 상황을 상상하면 거의 비슷하겠다.
현지 사람들은 "봄비", "이슬비" 같이 비가 잔잔히 오래도록 내리는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비가 오는데 어떻게 천둥 번개가 안 쳐요?" 반문한다. 어쩌다 매우 매우 드물게 잠깐잠깐씩 "봄비"같은 상황이 있을 때가 아예 없지는 않지만, 그런 날은 한국 생각이 나서 향수에 잠기기까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