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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제보다 나은 오늘 Jan 06. 2024

결국 폭발해버린 조직장의 최후

저 꼰대인가요?

 나는 적지 않은 직원수의 해외 지사를 운영하는 조직장이다.

 2024 새해가 열린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이때, 오늘도 내 마음에 안식과 평화를 외치며 밝은 마음으로 사무실에 들어서며 아침 인사를 건넨다.


 "Hello, Everyone~, Good Morning~"


 대부분의 직원들이 웃으면서(또는 의무감으로) "Hello~ Sir~"하며 화답해 준다.

 한국과 좀 다른 모습이 있다면, 이곳 사람들은 인사할 때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고개는 오직 알라신 앞에서만 숙이며, 평상시엔 존경과 존중의 의미로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올리며 인사하는 것이 이 나라에서 상급자에게 인사하는 관례이다.


 올해 1월 1일부터 채용된 신입사원이 있다.

 오늘로써 출근 5일 차.

 나는 이 친구가 출근한 첫날부터 자꾸 눈에 밟힌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나한테 인사하지 않는다.

 처음엔 수줍음을 많이 타나? 적응에 시간이 걸리나? 생각했었는데 오늘 확신이 들었다.


 "아 ㅅㅂ 이 쉐키 나 개무시하네..."


 아침 인사를 건네며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는데, 내 인사를 듣고도 또 멀.뚱.멀.뚱.

 너 내가 세고 있었어. 쓰리 스트라이크 아웃 아니야. 파이브 스트라이크야.

 내가 아침마다 카운트하며 곰삭이고 있었는데 오늘 찜통의 수증기추가 열렸다. 피이이이익~~~~


 이 쉥키를 어떻게 조지지.... 일단, 담당 매니저 들어오라 그래.


(이후 모든 대화는 영어로 진행. 적절한 번역과 의역.)

 "저 신입, 어때요?"

 "아, 제가 보긴 유능하고 성실해 보입니다. 잘 가르치면 금방 따라올 것 같습니다."

 "아니, 그거 말고. 태도. 태도 어때요?"

 "글쎄요. 별 특기할만한... 혹시 뭐 문제라도?"

 "문제 많지. 저 쉥키 단 한 번도 나한테 인사 안 해요. 이건 조직 위계에 관한 문제 같습니다. 신입이 들어오면 기본적인 직장예절 교육 안 합니까? 내가 일일이 지적해야 하나요?"

 "아... 그랬나요. 제가 조용히 불러 확실히 교육시키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번엔 조용한 경고입니다. 반복적으로 불손한 태도를 보이고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면, 나는 상응할 조치를 취할 겁니다."


 그래. 잘 참았다.

 신입하고 나하고 직접 싸우면 내 체면이 말이 서나.

 지휘체계가 있는데 착착 깨면 되지.


 오 주님, 알라님, 부처님. 제 마음에 안식과 평화를...을 외치며 마음을 삭이고 있는데, 쎄컨드 웨이브가 밀려왔다.


 "○○○님, 노후 의자 교체에 관한 구매청구서 품의 건입니다. 결재 부탁드립니다."

 "어디 봅시다. 아니, 이거....?"


 겨우 진정하려던 찜통의 수증기추가 아까보다 더 세게 돌아간다.

 소모성이 아닌 자산화품목 구매에 대해서는 사내 소프트웨어를 이용해서 자산화연계 구매청구를 해야 하는데, 소모성 구매와 같은 절차를 밟아 내 선까지 올라왔다.


 "아니 이것들이... 내 그리 재차삼차 절차 지키라고 강조했건만. 기안자야 그렇다 치고 매니저들 하는 일이 뭔데 다 여기다 싸인해놨어?"


 다시금 마음을 진정하고, 사내용 메신저 매니저방에 공지문을 써서 올린다.


 "모든 매니저들 보세요.

  자산화물품 구매 시 사내 소프트웨어를 이용해서만 구매청구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우리 회사의 기본 절차이며, 이렇게 하지 않을 경우, 자산화 물품이 회계 시스템과 연결되지 않습니다. 모든 매니저들은 결재 시 이를 유념해서 확인해 주세요."


 부글부글 끓어오르지만, 짜증과 화는 빼고, 정중하게. 나는 프로니까.

 하지만 나는 몰랐다. 이게 끝이 아니란 걸.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써드 임팩트가 왔다.


 오늘은 안전관리 절차에 대해 전 직원 집합교육이 있는 날.

 최고 책임자가 참석할 필요가 없는 실무교육이지만, 전체 집합교육 시 최고 책임자가 참석하는 이유는 딱 하나다. 참석률을 제고하고 조직에 긴장을 불어넣는 일.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집합교육을 좋아하는 직원들은 세계 어디에도 없으며 당연히 이 나라도 마찬가지다.


 "저도 참석해서 교육 수준을 보겠습니다."


 딱 지정된 교육시각 정각.

 이 ㅅㅂ.... 전 직원의 1/3도 안 보인다. 다 어디 갔어.

 공지시간 3분쯤 지나니 몇몇 직원들이 스멀스멀 기어오고 5분이 지나서야 대충 자리가 다 찬다.

 내가 일일이 잔챙이들 상대할 군번사번은 아니니 한놈만 잡자.



(상당히 격양된 목소리로... 사자후. 쩌렁쩌렁.)

 "어이. 거기 매니저. 당신 뭔데 공지시간보다 늦게 옵니까? 이유가 뭔지 말해보세요!"

 "아, 그게... ○○○님이 요청한 보고서를 보고하느라 살짝 늦어서..."

 "이봐요. ○○○가 내 상사요? 내가 기다리고 있잖아! 집합시간 공지를 했고 참석하라고 했으면 보고하던 중이라도 ○○○에게 환기를 시키고 여기로 왔었어야죠. 이런 결례가 어딨어요!"


 사실, 교육시간 집합이 5분쯤 늦은 것에 대해서는 내가 크게 화났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 지사 돌아가는 꼴을 가만 보고 있자니 이것들이 여기서 나사가 빠지고 저기서 삐거덕거리는 게 보여서 오늘 단단히 정신기강 좀 잡아야겠다 싶어 사자후를 시전했다. 모처럼 느껴보는 쩌렁쩌렁 내 목소리. 회의실에 마이크가 필요없었다.


 교육을 마치고 정신훈화


 "여러분. ○○○입니다.

 여러분은 회사 직원으로서 당연히 따라야 할 규칙과 규율이 있습니다.

 첫째, 기본적인 에티켓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출퇴근 시간뿐만 아니라 공지된 회의시간 교육시간을 엄격하게 준수하는 것은 직장인에게 기본 중 기본입니다.

 둘째, 서로를 존중하시기 바랍니다. 아침에 출근하면 서로 인사를 주고받는 것은 즐겁고 활기찬 아침 시작의 기본적인 룰입니다. 상대가 인사하면 반갑게 화답하세요.

 셋째, 상사에겐 예의범절을 갖추시기 바랍니다. 상사가 보이면 도망가지 말고 먼저 인사하고 상사에게 적절한 예우를 갖추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조직의 기본적인 규율입니다. 당신의 상사는 당신의 친구가 아니며, 그들은 존중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나는 이 곳의 최고 책임자입니다. 내가 출근을 하든 안 하든 나를 컨트롤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정해진 출퇴근 시간을 준수하는 이유는 나 역시 조직원이며 지켜야 할 규정과 절차가 있기 때문입니다. 회사에서 정한 규정과 절차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업무를 수행할 때, 규정과 절차를 상기하며 올바른 방향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여러분들의 의무입니다.

 여러분의 관심과 협조를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단단히 화가 났더니 오늘은 영어울렁증도 없이 영어가 잘 나오네. 아니면 영어가 잘 나와서 더 화를 내는 걸 수도 있다.






 아흑. 맞은 놈은 잘 자도 때린 놈은 웅크리고 잔다고 계획에도 없던 사자후를 시전했더니 온종일 마음이 심란하다. 나도 결국 이렇게 꼰대가 되었구나.


 퇴근하고 숙소에 와서 혼자 가만히 있으니 별 생각이 다 든다. 내가 꼭 그렇게 퐈이어 했었어야 했나. 내가 심했나. 아니, 내가 덜 심했나. 불러다 반쯤 조져놨어야 내 속이 시원했나.


 이래도 후회. 저래도 후회가 된다.


 이 모든 건 다 아침에 고 놈 때문이다.

 원래 부드럽게 넘어갈 일도 심기가 한 번 뒤틀리면 제자리를 찾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고 놈은 왜 그랬을까?

 뭐, 사실 그것도 그렇게 이해가 안 되는 일은 아니다.

 나는 인사를 건네는 혼자고, 인사를 받는 쪽은 먼저 출근해서 기다리는 사무실 직원들이다.

 보통 1:다(多) 인사를 하면 대중 모두가 인사를 다 받아주는 게 아니고 무리가 건네는 인사에 묻혀간다. 적극적으로 인사하는 부류하고, 인사를 안 하는 부류하고 섞여있는 게 당연한 게 군중인데 군중이 정말 많으면 별 티가 안 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나는 눈썰미가 매우 좋고 예민하며 이런 것에 민감한 상사란 말이지.

 그 짧은 시간에 누가 나한테 화답 인사를 했고 안 했고가 다 카운트가 되고 있단 말이다. 지는 몰랐겠지. 내가 세고 있었던 걸. 모르겠지 안 보이겠지 하는 건 니 생각이고. 나는 다 보인다고. 아니, 상사가 먼저 인사 하고 있는데 씹어? 그것도 신입이? 응?


 조직의 위계와 질서에 대해선 나도 사실 선배들로부터 욕을 바가지로 처먹던 신입이던 시절이 있었다.

 선배들 입장에선 당연하던 걸, 나는 몰랐던 시절도 있었다.



 "이봐. 출장지에 도착했으면 잘 도착했다고 보고를 해야지 전화가 없어 시간이 없어? 어떻게 된 거야?"

 "네....? 아... 네..... (다녀와서 보고서 쓸건데 뭘 못 믿고 일일이 간섭이지??)"



 "식당에 왔으면 막내가 수저 놓고 방석 깔고 해야지. 너 뭐 해?"

 "네...?? 아... 네.....(아 ㅅㅂ 내가 지들 노옌감. 지들은 손이 없어 발이 없어. 내가 식사 수발까지 들라고 입사했어???)"


 뭐, 나도 그랬긴 했었는데.............

 이제 와서 나도 내 인사 안 받아줬다고 조직을 그냥 쥐 잡듯 잡고 있네 세상에..... ㅡ_ㅡ;;;


 하지만 조직에서 위계는 엄청나게 중요하다. 위계가 무너지면 명령체계에 흠이 나기 시작하고 조직장의 권위에 금이 간다. 이게 고착화되면 규정과 절차에 의거해서 뭘 하려고 해도 "그건 니 생각이고"가 만성화가 되며 조직이 여기저기 삐거덕거린다. 어느 조직이든 상급자에게 어느 정도의 위계와 질서, 의전이 필수로 요구되는 이유이다. 나도 옛날에는 "의전"과 "갑질"이 헷갈리던 시절이 있었는데, 두 단어의 의미는 명확하게 다르며,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의전은 조직의 규율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프로토콜이자 의식이며 갑질은 그냥 위계를 이용한 괴롭힘일 뿐이다.


 오늘 본의아니게 퐈이어를 많이 해버렸는데, 조직장도 사람인지라 퐈이어에는 다 이유가 있다. 사안을 보면 하나같이 다 사소한 것들이지만, 일련의 과정을 보면 저것들이 조금씩 조금씩 쌓이고 쌓이다 마지막에 퐁~ 하고 폭발해 버리는 거다. 그러니까... 진심 부탁인데... 평소에 잘해야 하는 거라고 오늘도 빡빡 우겨본다. "아니 뭐 별 것도 아닌 걸 가지고 저 미친개가 왜 저러지?" ...아니래니깐. 별거 아닌 게 수십 번 쌓인 결과라니깐. 당신은 안 세고 있었어도 당신 상사는 세고 있었던 것뿐이야.


 암튼 어쨌건,

 조직 에티켓 모른다고 쿠사리먹던 녀석이 어느 날 눈떠보니 조직의 수장이 되어가지고 인사 좀 안 했다고 퐈이어하고 있는 내 자신을 보니... 뭐랄까 좀 애잔한 마음도 들고... 나도 어쩔 수 없는 꼰대가 되어버린 건가 하는 생각도 들고... 내가 너무 심했나... 아니아니 반대로 내가 너무 그간 말랑했었나... 내가 제대로 살고 있는 건가... 오만가지 생각이 오가는 복잡한 밤이다.


 해외에서 이국 사람들과 한 마음으로 조직을 끌어나가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전 세계 조직장님들. 오늘도 파이팅.(콩글리시인 줄 알지만 K-감성으로 정말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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